검찰을 위한 변명
민주노동당 관악법대 고학번 모임을 준비하며
'고전적 소재'에 대한 일갈(一喝)

민주노동당 관악법대 고학번 모임을 준비하며

유난히 길었던 고향에서의 방학이 끝나고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수험생” 혹은 “고시생” 이란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에 그리 마음 편한 생활을 하고 있지 못했단다.그 감정은 실체는 죄책감일까.자괴감.배신감.아니 실망감.대학 시절의 대부분을 대중매체에 나오는 대학생활의 모습이나 사회에서 흔히 바라보는 서울법대생에 대한 환상과는 거리가 멀게 보냈기 때문일까.

유난히 길었던 고향에서의 방학이 끝나고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수험생” 혹은 “고시생” 이란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에 그리 마음 편한 생활을 하고 있지 못했단다. 그 감정은 실체는 죄책감일까? 자괴감? 배신감? 아니 실망감? 대학 시절의 대부분을 대중매체에 나오는 대학생활의 모습이나 사회에서 흔히 바라보는 서울법대생에 대한 환상과는 거리가 멀게 보냈기 때문일까? 우리는 항상 무언가에 미안해야만 했고, 그 자리에서마저 목소리를 낮추어야 했고, 말하기를 망설여야 했어. 남들이 자연스럽게 가는 도서관에 가는 게 너무나도 부담스러웠고, 아크로에서 얼굴을 익히던 사람들을 서로 보는 것이 왠지 민망해서 시선을 돌리기 일쑤였고, 여기저기에서 싸우고 있는 후배들과 동기들, 선배들이 있음을 알기에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만 있는 것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어. 어줍지 않은 미련일까 아니면 과거에 대한 향수일까? 민중가요가 들리는 도서관 창문 가에 앉은 날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고, 그런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여 있음에 자책하기도 했었어. 하지만 우리가 정작 두려웠던 것은 그러한 부담감과 마음의 짐이 점점 옅어져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을 거야. 法書를 보고 자기 생각과 다른 내용을 답안지에 적어 내면서 느끼는 감정은 “씨바, 졸라 열받네.” 가 아니라 “언젠가 나도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지?” 라는 자신없음이었고 혼자서 느끼는 불안감이었어. 10명중 9명이 같은 책을 보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행동을 하면 나머지 1명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대세를 거스르려면 용기와 자존심, 자신감이 필요한 것 같아. 네가 나에게 물었지? “요새 무슨 고민없어?”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신문과 방송에 나오는 것이 세상의 전부이고 그것이 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차라리 내가 본 法書와 判例가 모두 타당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믿을 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잘 알잖아.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을 말야. 근데 말야 우리 고민을 좀 더 객관화시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학생 운동을 했던 아니던 간에 법대생의 상당수가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부를 하고 사회에 나가게 되는 게 현실이잖아. 하지만 우린 법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말이 참이 아님을, 그리고 착한 법조인이 되는 것이 이 사회의 많은 부조리를 해결할 수 없음을, 나만 깨끗한 법조인이 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족한 건 “그럼,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우린 수많은 선배들이 우리와 비슷한 고민과 결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해서 사회에 진출했고 그 선배들의 노력에 의해 조금씩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답답한 건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는지, 판사·검사·변호사라는 직업이 아니라 그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야.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 란 막스 말을 긍정하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아리스토텔레스 말을 긍정하건 우린 스스로가 미칠 영향력을 알고 있어. 동시에 우리는 “같이 합격해서 열심히 하자” 는 말이 너무나도 이상적인 말임을, 똑같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똑같이 합격하는 것이 아님을 알잖아. 또 연수원 생활과 남자들은 군대 40개월을 통해서, 그리고 결혼과 가정을 꾸리는 그 중요한 순간만큼은 위의 명제와 달리 철저한 “개인”으로 남겨지고 개인의 선택과 그 자유에 모든 것이 맡겨지고 있는 게 현실임을 알아. 그리고 이 상황은 “어느 누구도 개인의 삶과 선택에 간섭할 수 없어!” 라고 정당화되지. 난 학부 시절과 같은 정도의 서로에 대한 개입이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과 그것이 반드시 타당한 것도 아니라는 점도, 반대로 철저한 개인의 선택으로 남겨진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점도 알아. 하지만 “그럼 타당한 건 뭐니?” 라고 묻고 싶어. 우리에게 던져진 대답은 두 가지 뿐이야. 이러한 상황을 계속 모두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상황을 모두 알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그 고민을 들여다보고 같이 고민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같이 만들어 나갈 것인가? 우린 후자를 선택했고 그에 대한 최소한의 동의 지반으로써 “민주노동당”을 선택했단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진보정당이 이제는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한다는 일반적인 명제에 대한 암묵적 긍정을 넘어 개개인들이 그 뿌리내림의 주체로 나설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과 함께 학생 운동 때의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넘어 사회에 나가서 하나의 틀로 묶일 수 있는 것은 추상적인 진보의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을 통해서라는 점 때문이었어. 하지만 그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우리 문제 의식은 일천했고 예각화되지 못했기에 첫 자보는 오히려 “고시생의 일상이 생각보다 그리 바쁘지 않다” 는 식으로 다른 곳에 인용되기도 하였고, 운동의 새로운 방식으로 거창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주변에서 생기게 되었어. 우리가 생각한 것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고민, 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상과 꿈에 대한 끈을 잊지 않고 싶고 그것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같이 하고 나아가서 비로소 사회인이 되었을 때 선배들의 모습에서 한 발짝 더 나가기 위한 것에 불과해. 같이 터놓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민은 점점 구체화되었고 이젠 내부규약도 만들고 목적도 좀 더 분명해졌어. 하지만 대부분이 수험생이라는 현실적인 제약상 2주에 한 번씩 준비주체가 발송하는 그 시기의 중앙당 대변인 논평을 회람하고 그 결과를 첨삭, 수정하여 우리의 입장을 자보화하는 정도와 중앙당 및 기존 정당의 소식을 메일로 읽어보는 것 정도 이상을 하고 있지 않아. 물론 미국의 전쟁에 대한 입장 자보를 회람하고 반전 서명 등을 같이 하는 것과 같은 활동을 하기도 했어. 그렇지만 여전히 그 활동은 수험생활이 끝나지 않는 한 그 정도를 넘어서기 힘들 것 같다. H야… 난 내 모습을 과대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기 비하하거나 조급하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나 혼자의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이상하게도 나의 선택은 10명중의 9명이 선택하는 것에 가까울 것 같다. 아니 그럴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곤해.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현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타당하지도 않다는 생각, 그렇다면 우리 작은 고민의 끈들을 연결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하나의 시작일 뿐이야. 난 자신에게 솔직하고 당당해지고 싶어. 내가 대학 때 고민하고 외쳤던 말들과 썼던 글들이 립서비스가 아니었음을, 지적 유희의 산물이 아니었음을, 조금은 다른 삶의 방식과 내용을 위한 고민의 시작이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도, 그 자신감과 자존심을 지키고 정작 사회에 나가서 실질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 필요한 일을 과감히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대학때 같이 웃고 울고 싸우면서 배웠던 소중한 경험과 가치들 중에서 이 교문을 벗어나면서 가지고 가야할 것은 무엇이며, 버리고 가야할 것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없는 이 막연함과 막막함. 학생운동이 소중한 것은 그것이 한 때의 경험이나 화려했던 대학 생활을 돌이키게 하는 하나의 추억거리여서가 아니라, 기나긴 개인들의 삶에서 종착역이 아니라 시발점이 될 때만이 그 가치를 발하기 때문이겠지?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그러잖아.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근데 “사랑” 이란 단어를 10년 후에 우리 모습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이 되지 않을까. 사람은 당연히 변해야 하는 게 정상이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변화의 방향성이 아닐까?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고, 비판하고, 부끄러워하던 그 사람들의 모습으로 너와 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너에게 유지태의 말을 힘없이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당연히 네가 나에게 이 질문을 하지 않았으면 하구. “H야, 한 번 만나지 않을래? 할 얘기가 있어. 우리 서로 기대어 지탱해주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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