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관악 학생사회를 돌아보다

2010년 12월 2일, 두 번의 총학생회 선거 무산을 딛고 53대 총학생회가 세워졌다.선본은 35%의 표를 얻어 총학생회로 선출됐다.총학생회장 지윤(인류 07) 씨와 부총학생회장 두헌(응용생물화학 07) 씨는 이날 인터뷰에서 “무너졌던 총학생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많다”며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학생사회의 부흥이라는 과업을 안고 이들은 올해 학생사회의 중심에 섰다.

2010년 12월 2일, 두 번의 총학생회 선거 무산을 딛고 53대 총학생회가 세워졌다. 선본은 35%의 표를 얻어 총학생회로 선출됐다. 총학생회장 지윤(인류 07) 씨와 부총학생회장 두헌(응용생물화학 07) 씨는 이날 인터뷰에서 “무너졌던 총학생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많다”며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학생사회의 부흥이라는 과업을 안고 이들은 올해 학생사회의 중심에 섰다. 비상총회에서는 2천여 명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학생들의 의사를 본부에 전달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민중해방의 불꽃, 53대 총학생회(총학)의 행적을 따라 지난 학생사회를 짚어보자.재선거 끝에 꾸려진 53대 총학, 그 후 1년 53대 총학을 선출하기 위한 학생사회의 노력은 2009년부터 난항을 겪었다. 2009년 말에 실시된 첫 번째 선거의 경우 선본이 투표함 사전 개봉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면서 선거 무산이라는 파행으로 치달았다. 당시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져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의 선거부정과 선본의 도청에 대한 조사작업을 벌였다. 이듬해 3월에는 새로운 선관위의 구성과 함께 재선거가 시행됐다. 이 선거에서는 개표를 앞두고 선관위 측이 투표자 명단을 누락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또 다시 난항을 겪었다. 결국 누락된 명단을 포함함에 따라 투표율이 50% 미만으로 집계돼 선거가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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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 파행으로 치달은 2009년 53대 총학생회 선거는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 서울대저널

계속되는 선거 무산 속에서 학생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관측이 나왔다. 2010년에 몇몇 단과대 선거조차 무산되면서 이대로 학생사회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이 와중에 성사된 53대 총학 선거는 이제까지 제기됐던 학생사회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총학은 선출 이후 김인혜 교수 규탄, 추모제 기획, 희망버스 참가에서부터 학생복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총학이 추진한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페미니즘 온 마치(Feminism on March)’, ‘유니온 디베이트(Union Debate)’를 들 수 있다. 페미니즘 온 마치는 여성담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기획된 행사다. 3월 21일에는 총장잔디에서, 22일에는 중강당 앞에서 장터와 전시회를 열었고 30일에는 페미니즘 온 마치 포럼을 진행했다. 포럼에는 3~40명의 학생들이 참여해 목표했던 인원에 비해 다소 적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니온 디베이트는 학생들의 의견을 총학생회운영위원회에 반영하겠다는 취지로 계획됐다. 공약에 따르면 유니온 디베이트는 매달 열리는 토론의 장으로 소개됐지만 실제로는 봄 축제 기간인 5월 25일에 한 번 진행됐다. 총학 집행위원장 훈녕(사회교육 08) 씨는 “3월 페미니즘 온 마치, 4월 4·30-Mayday실천단, 5월 비상총회와 같은 중요한 행사들로 인해 유니온 디베이트를 매달 진행하기가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훈녕 씨는 “적은 인원이 참여해 ‘집단적 토론을 통한 집단적 실천’이라는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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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위원장 훈녕(사회교육 08) 씨는 “페미니즘 온 마치, 유니온 디베이트의 홍보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아 아쉽다”고 총학의 사업에 대해 평가했다.

2011년 한 해 학생사회의 화두는 단연 법인화였다. 2010년 12월 8일, 서울대 법인화법 날치기 통과는 법인화 반대투쟁에 불을 지폈다. 총학은 서울대학교민주화교수협의회 등이 참여한 ‘서울대학교 법인화 반대 공동대책위원회’와 뜻을 함께 하며 본부 앞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1학기가 시작되자 법인화 관련 토론회, 법인화반대 3천인선언 등 법인화반대를 위한 행사를 이어갔다. 법인화 반대운동은 1학기가 끝날 무렵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5월 30일 열린 비상총회에서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아크로에 모여 본부점거를 결의한 것이 시작이었다. 약 한 달간 계속된 본부점거 동안 법인화 반대운동은 학생들의 지지를 업고 절정에 이르렀다. 6월 25일 열린 임시전학대회에서 본부점거 해제를 결의함으로써 본부를 향한 투쟁은 막을 내렸다. 총학은 법인화법 폐기를 위한 투쟁을 학교 밖으로 넓혀가겠다고 밝혔다. 그 출발로 총학은 27일 한나라당 당사에 진입을 시도했다. 영등포 민주당사와 세종로 원표공원 앞에서 법인화법 폐기를 외치는 릴레이촛불문화제가 열렸다. 방학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법인화캠프를 열어 법인화법 폐기를 위해 2학기에 어떤 준비를 할 것인지 논의했다. 2학기가 시작되고 9월 28일에는 법인화반대를 위한 동맹휴업이 진행됐다.총학을 바라보는 엇갈리는 시선 총학의 투쟁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특히 본부점거 해제를 기점으로 이들의 시선은 급격히 변화했다.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본부점거 해제를 결정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총학은 비상총회를 성사시키면서 많은 학생들의 지지를 받았었다. 비상총회 성사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가 많은 상황이었다. 학내커뮤니티 에는 “총학 진짜 잘 뽑았다”, “서울대생들이 자랑스러웠다”는 글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다. 본부점거 동안 과/반 단위에 소속된 학생뿐만 아니라 어떤 단위에도 소속되지 않은 ‘원자’들도 많이 찾아왔다. 본부점거의 불꽃은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면서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방학을 맞아 학교를 떠난 학생들은 본부를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학생회가 아닌, 학생들의 기획으로만 이뤄진 본부스탁은 본부점거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6월 24일에 열린 임시전학대회에서는 결국 본부점거를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의 참여 저조는 본부 측의 침탈 가능성과 점거 동력을 잃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실었다. 임시전학대회의 결정은 곧바로 학생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에는 “지금 총학에 화가 난다”는 글이 올라오며 본부점거 해제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했다. 법대학생회는 자보를 통해 “학생이 없는 학생사회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며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결정된 본부점거 해제에 아쉬움을 남겼다. 총학이 절차적 정당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전학대회에서의 표결이라는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점거해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학대회가 학생들의 의견을 모두 포괄하고 반영하는 자리였는지에는 의문이 남는다. 2학기가 시작된 직후,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 지지 서울대모임은 총학과 본부가 벌인 비공개 협상 내용을 언급하면서 “총학이 점거해제 명분을 얻기 위해 기만적인 이면합의를 제안했다”며 총학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후 법인화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었다. 9월 28일 진행된 동맹휴업의 경우, 300여 명의 학생들이 아크로에 모였다. 비상총회에서 모인 2천여 명에 훨씬 못 미치는 숫자다. 훈녕 씨는 “비상총회 준비 기간은 1달 정도였지만 동맹휴업의 경우 추석연휴로 인해 그보다 짧았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았다. 훈녕 씨는 “점거 해제 후 학생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논쟁이 있던 것으로 안다”며 점거 해제의 영향을 언급했다. 이밖에 단과대 학생회와의 공조가 아쉬웠다는 점, 비상총회와 동맹휴업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덧붙였다. 비상총회는 정족수 1700여명 학생들의 참여 여부로 성패가 확실히 드러나고 참여한 학생들이 자신의 의사를 비표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동맹휴업은 참여한 학생들의 숫자로 성패를 단정하기 어렵고 투표와 같은 절차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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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총회와 동맹휴업에 참가한 학생들의 숫자는 약 2000명과 300명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왼쪽은 5.30 비상총회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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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은 9.28 동맹휴업 당시

학생사회, 변화의 바람을 맞다 2010년 총학의 부재는 ‘학생사회 위기설’을 학생들에게 인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위기설은 법인화를 비롯한 많은 사안들로 혼잡했던 2011년 학생사회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학생사회의 주체인 학생들이 점점 떠나고 있다는 우려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두 번이나 선거가 무산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학생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길을 택했다는 설명이다. ‘학생사회 위기설’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다. 전미르(인류 08) 씨는 “많은 학생들이 진정 무관심했다면 선거가 어떻게 됐든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학생들의 반응은 무관심과 냉소가 아닌 분노였다”고 지적했다. 전 씨는 “기존의 학생회는 학생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모두 담아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와 이를 대변할 수 없는 학생회 사이에서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탈’정치를 선택하게 된다. 학생들의 발길이 점차 줄어드는 곳은 ‘학생사회’가 아니라 ‘학생회’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올해, 학생회라는 울타리 밖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학생사회에 전달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제3섹터’와 ‘反지성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학생회 제도를 벗어나 다른 방법으로 학생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제3섹터’는 운동권, 비권 학생회의 한계에 공감한 학생들이 대안을 시도하고자 만들었다. 한빛(정치학과 08) 씨는 앞으로 다가올 학생사회의 바람직한 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본부점거 당시를 언급했다. 한빛 씨는 “원자학생들은 본부점거라는 투쟁을 계기로 본부스탁과 점거영상 등의 활동을 보여줬다”며 “이러한 활동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모습이 바람직한 학생사회”라고 설명했다. 학생회가 중심이 된 법인화 반대투쟁이 이번 활동의 계기가 됐다면 앞으로의 활동은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3섹터’에서 학생 개개인은 각자 자유롭게 활동하고, 인터넷에 자신의 글을 쓴다. 이들의 활동은 학생회나 동아리와 달리 자율적으로 이뤄진다. 한빛 씨는 “강제적인 활동이 아니라 긴장감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며 집필 활동이 요즘 침체기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한빛 씨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反지성 프로젝트’는 ‘반지성적’이라고 불렸던 점거 당시의 투쟁을 이어나가기 위해 결성됐다. 팀프로젝트 형식으로 법인화반대의 목소리를 자작곡, 개사곡 등에 담아 앨범으로 내놓을 계획이다. 기획, 작사, 홍보를 맡은 신중휘(교육학과 10) 씨는 “원자학생들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앨범 제작에 참여했다”며 프로젝트의 의의를 밝혔다. 2집에는 약 10개 곡이 수록되며 부스전을 통해 학생들을 찾아간다. 신 씨는 “최근 미대 축제와 사회대 축제에서 수록곡 일부를 공연했다”며 “앨범은 늦어도 11월 중에 나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53대 총학은 1년여의 활동을 마치고 10월 17일, 54대 총학선거를 위한 선관위를 구성한다. 54대 총학과 함께하는 2012년 관악 학생사회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길지, 곧 있을 총학선거의 결과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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