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 오늘은 드디어 3주 전에 구매한 연금복권의 번호가 발표되는 날이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화살이 꽂히고 돌림판이 멈췄다. “어디 보자.. 1등이.. 6조.. 3..7..9..7..1..7.. 7조.. 8..0..4..8..4..7.. …에잇!! 그럼 그렇지.” 혹시나 했던 기대는 항상 이렇게 역시나로 끝나버리고 만다. 5장의 복권은 오늘도 무참히 손에서 찢겨나갔다. 무려 3주나 지갑 속에 고이 품고 다녔던 놈들이건만 순식간에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말았다. 내 삶의 희망도 저 종이 쪼가리와 함께 버려지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을 감출 길 없다. 고달픈 오늘과 별반 달라질 것 없어 보이는 내일.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일도 복권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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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시 이후 큰 열풍을 불러일으킨 연금복권과 식지 않는 인기의 로또복권. @아시아경제 |
연금복권 열풍과 식지 않는 로또복권의 인기 연금복권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봉천동의 복권 판매소 한마음복권방 주인 한미경 씨는 “요즘은 정말 정신없이 바쁘다. 연금복권의 경우 손님들의 예약을 받아 팔고 있는 상황”이라며 예약 명단이 빼곡히 적힌 노트를 내밀어 보였다. 지난 7월 1일 출시된 연금복권은 매주 1등 당첨자 2명을 발표해 총 20년간 매달 500만원씩(세제 공과 전) 연금 형태로 지급하는 복권이다. 10월 5일 현재 기준, 14회차까지 발표가 끝난 연금복권은 전회 매진됐다. 판매율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보통 2~3주 후에 당첨자가 발표되는 복권을 구매할 수밖에 없다. 한국연합복권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연금복권 발행량을 늘려줄 것을 요청하는 글이 적지 않다. 연금복권이 출시된 지 약 한 달 후였던 지난 8월, 기획재정부는 ‘연금복권 520 바로알기’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다른 복권과 마찬가지로 몇 차례 구매를 통해 당첨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되면 인기가 진정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출시된 지 4개월이 지난 현재의 판매 추세를 통해 볼 때 이 예측은 이미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연금복권의 열풍이 거세다고 해서 다른 복권의 인기가 주춤해진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전체 복권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로또복권 판매액은 연금복권 출시 이후 주당 500억원대에서 400억원대로 잠시 줄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판매액은 최근 다시 500억원대를 회복했고, 9월 기준 지난해보다 10% 가량 늘어난 1조 9,8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복권위원회는 현 추세대로라면 올해 복권 총 판매액은 작년 판매액 2조 5,255억원보다 15% 증가한 2조 9,0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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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천동의 한 복권 판매소. 사람들이 구매에 앞서 번호를 분석하거나 이미 구매했던 복권의 당첨번호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
“기댈 곳이 없으니 복권에라도 기대보는 것” 봉천동에 거주하는 30대 여성 A씨는 “연금복권의 당첨 확률이 로또복권 보다 높다고 해서 출시 이후 매주 구매했다. 적게는 5장에서 많게는 10장까지 사고 있다”고 말했다. A씨는 “앞으로 해야 할 결혼과 출산 등으로 인해 직장생활 유지에 대한 불안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며 “고정적 수입에 대한 기대로 복권을 사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A씨는 연금복권 뿐만 아니라 몇 년 째 로또복권도 꾸준히 구매하고 있다. 로또의 경우 매주 적게는 5천원에서 많게는 3만원까지 구매한다. 이날도 퇴근길에 복권 판매소에 들러 선택할 번호를 분석하고 있다는 그는 “복권을 사는 사람들 모두 이것이 부질없는 기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복권을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봉천동에 사는 50대 남성 B씨는 연금복권의 가장 큰 구매층인 평범한 중년 남성이다. 그는 아직 발표가 나지 않은 지갑 속 연금복권을 보여주면서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벌어 놓은 게 없으니까 연금복권을 사고 있다”고 말했다. 연금복권을 사는 것 이외에 제대로 된 노후대비책이 없으니 복권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시 봉천동에 거주하는 70대 남성 C씨는 로또복권 3만원 어치를 구매하고 복권 판매소를 빠져나갔다. 그는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기댈 곳이 없으니 복권에라도 기대보는 것”이라며 “수십 년 째 복권을 구매해왔고 지금도 매주 몇 만원씩 복권을 사고 있지만, 제일 컸던 당첨금액은 고작 5만원”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봉천동 한마음복권방 주인 한미경 씨는 가게에 꾸준히 복권을 사러온다는 어느 80대 할머니 손님을 떠올렸다. 한 씨는 “복권에 당첨되면 남편의 병원비에 사용할 것이라며 매번 복권을 사가시지만 한 번도 큰 액수에 당첨된 적은 없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열풍은 사회 구성원들의 불안과 압박에서 비롯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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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섭 교수는 “국민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서 국가가 복권을 팔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
그렇다면 그들은 왜 ‘814만분의 1’(로또복권 당첨 확률)의, ‘315만분의 1’(연금복권 당첨 확률)의 희망에 이토록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서울대 장경섭 교수(사회학과)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안’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장 교수는 “IMF 시기 이후 거듭된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로 인해 어려운 경제상황이 지속된 가운데 서민들은 미래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며 현 상황을 진단했다. 거듭되는 경제위기상황에 놓인 국민들은 삶에 대해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이러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요행에 대한 기대심리가 복합적으로 표출되는 현상이 바로 복권열풍이라는 설명이다. 안준헌 논설위원은 이러한 복권열풍에 계속 관심을 가져왔다. 안 위원 역시 사회 구성원들의 불안 심리를 열풍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안 위원은 “공직자나 교직자를 제외하고 노후생활이 보장될 만큼 연금을 받는 국민은 매우 적다”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세대들이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중앙대 신광영 교수(사회학과)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복권열풍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분석했다. 중·장년층의 경우 노동시장에서는 퇴출될 연령이지만 자녀 교육이나 자녀 결혼 등과 같은 이유로 경제적 부담이 커지는 상황을 겪게 된다. 신 교수는 “복권 구매층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중·장년층들은 노동시장에서의 역할과 가족 역할 간의 불일치를 경험하면서 압박을 느끼고 복권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평범한 소시민에 속하는 중·장년층들이 재산을 늘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희망으로 복권이 선택된다는 것이다. 한편 지난 7월, 한국연합복권이 20개 복권 소매점에서 연금복권을 구입한 3,29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19세~39세에 해당하는 구매자는 전체의 28%(923명), 40세~59세에 해당하는 구매자는 59.4%(1954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60세 이상은 전체의 12.8%(413명)였다. 중·장년층에 해당하는 40대와 50대의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나, 젊은 층에 속하는 20대와 30대의 비율 역시 적잖음을 알 수 있다. 안준헌 논설위원은 이렇듯 세대를 뛰어넘는 복권열풍에 대해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미래는 불확실성 그 자체”라면서 “일자리를 찾기도 힘들거니와 겨우 직장을 잡는다 해도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복권 당첨을 꿈꾸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행복한 나눔’인가 ‘제 살 뜯어먹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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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보에 사용되고 있는 복권위원회의 포스터 광고.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 |
‘복권은 행복한 나눔입니다’. 복권위원회의 TV 광고와 포스터에 사용되고 있는 문구다. 이렇듯 현재 복권 관련 부처들은 복권이 갖는 공익적인 측면을 최대한 부각시켜 복권을 홍보하고 있다. 지난 9월 복권위원회 발행관리과 공영국 사무관은 와의 인터뷰에서 복권열풍의 요인에 대해 “복권 조작의혹이 많이 해소된 것과 ‘복권은 건전한 나눔’이라는 복권위원회의 공익홍보 효과 덕분”이라고 언급했다. 복권이 갖는 공익성에 대한 인식 확산이 복권열풍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1월, 한국갤럽이 전국의 성인 남녀 1,0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복권으로 마련되는 공익 기금이 투명하게 사용된다는 것에 공감한다는 대답을 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36.6%였다. 이와 관련해 안준헌 논설위원은 “복권기금의 공익성에 대한 주장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복권기금이 정확히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해 투명성이 재고돼야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복권의 공익성에 관해 장경섭 교수(사회학과)는 “복권의 공익성을 내세우는 것은 정부가 나서서 복권을 팔고 있는 행위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면서 “국민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서 국가가 복권을 팔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장 교수는 “국가의 역할은 복권이라는 요행수에 의해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경제활동을 통해 사람들이 미래를 계획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복권의 공익성만을 강조하며 복권을 홍보하고 판매를 부추기는 정부의 행태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중앙대 신광용 교수(사회학과) 역시 “당첨 가능성이 대단히 낮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 돼버린 시대 상황을 오히려 정부가 나서서 이용하는 것은 정의로운 정부의 역할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신 교수는 “이렇듯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복권사업을 하는 것은 상당히 비윤리적이며, 어려운 서민들에게 복권을 사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세금을 더 물리겠다는 것과 사실상 다를 바가 없다”고 날을 세웠다. 연금복권 열풍은 정부 사업의 성공이 아니라 현대 국가의 정상적인 역할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복권에 관해 비슷한 주장을 펴고 있는 서울대 조흥식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지난 8월 와의 인터뷰에서 “복권은 서민들끼리 돈을 모아서 이를 소수의 서민에게 주는 ‘제 살 뜯어먹기’”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연금복권 열풍에 대한 논의는 정부의 미흡한 노후 복지 대책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7월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 인구조사 부가조사’ 결과는 우리 사회 고령층의 ‘불안한 노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결과에 따르면 55세~79세 고령층의 47.2%가 연금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는데, 그 평균 수령액은 한달 36만원에 불과했다. 또 생활비 부족 등을 이유로 고령층의 58.5%는 은퇴 이후에도 계속 일하기를 원했다. 정부가 우선해야 할 것은 복권 당첨이 노후를 보장해 줄 수 있다는 복권 홍보가 아니라 심각한 고령화에 처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직시한 실질적인 노후 보장 대책을 마련임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복권은 행복한 나눔’이라며 정부는 복권의 공익적 가치를 강조한다. 그러나 복권기금의 사용처에 대한 투명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많고 정부가 앞장서서 복권 사업을 펼치는 것에 비판의 목소리가 계속되는 상황을 정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복권에 관한 상반된 주장들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가운데, 복권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서민들의 고달픈 현실이 계속되는 한 복권열풍의 기세는 쉽사리 꺾일 것 같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