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수를 모르던 왼손잡이, 나 자신과의 화해
일기장을 폈다. 그동안의 일기를 천천히 읽어보던 나는 일기장 안에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의 글이 많은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스무 한 해 동안 나조차도 나 자신의 팬이 돼주지 못했던 것이 너무 미안해졌다. 누구보다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할 나였는데. 마지막 일주일만큼은 아무리 바보짓을 하더라도 나 그대로를 아껴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첫 날 아침, 어떻게 일주일을 보내야 할지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일주일까지도 꽉 채워야한다는 압박이 나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은 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어젯밤에 생각한 것이 떠올랐다. 내 마음부터 잘 다독거려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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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숍에 앉아 진지하게 마지막 글을 남기고 있는 모습. |
너무 작은 기숙사 방은 왠지 기분을 더 우울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한산한 커피숍에서 나는 말 그대로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때론 유서를 쓰게 될 때가 되면 ‘내가 죽은 게 모두 네 탓이야’하며 그동안 미워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한가득 써줄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사람은 정말 죽을 때가 되면 착해지는 것일까? 종교를 빼놓고 죽음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친구들과 신부님, 선생님들이 좋아서 성당을 열심히 다녔었다. 그러다 갑자기 회의가 들었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신이 아니라 사람들이었고, 상처를 받을 때도 모두가 사람들 때문이었다. 나는 종교를 더 이상 갖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런 말도 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 죽을 때 더 행복하게 죽는다고. 사후 세계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일까? 8년 만에 상설고해소가 마련된 한 성당을 찾아갔다. 얇지만 서로를 전혀 보지 못하게 하는 검은 판이 신부님과 나를 가로 막고 있었다. 신부님께서는 내 그동안의 고민과 잘못을 묵묵히 들어주셨다. 그런데 시원할 것 같았던 마음은 성당을 나서며 또 한 번 복잡해졌다. 나는 죽음을 일주일 앞둔 순간에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따르기엔 너무 영악해져버린 영혼이 돼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신부님의 말씀을 새기며 나는 내 안의 나와 진심으로 화해를 했다. 만 스무 해 동안 언제 어느 순간에나 사실은 나를 가장 사랑해주었던 내 자신에게 처음으로 왼손이 아닌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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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해성사 후 의자에 앉아 조용히 상념에 젖어있다. |
나를 지탱해주는 힘, 가족이라는 이름
전주에 도착하니 벌써 새벽 두 시, 조금이라도 빨리 부모님을 보겠다는 욕심에 밤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런 딸을 위해서 엄마, 아빠는 오늘도 단잠을 마다하고 마중을 나오셨다. 어쩌면 또 한 번의 일상적인 재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에게 자식이라는 존재, 자식에게도 부모라는 존재는 잠시만 떨어져있어도 항상 그리운 것 같다. 그런 부모님께 가상이라고 하지만 딸이 일주일 뒤에 죽기 때문에 집에 내려왔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먼저 근처 산에 놀러가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때는 곧잘 산에 따라가곤 했었는데, 점점 귀찮다는 핑계로 함께하는 일이 드물었었다. 산이라기보다는 산보를 위한 공원과 같은 그 곳은,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장소였다. 40분 정도 걸리는 산 정산 위, 팔각정에 올라가면 전주시내가 훤히 보여 무엇보다 마음이 시원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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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만에 가족과 함께한 공원나들이로 즐거운 한 때. |
문득 요즘 건강이 안 좋아지신 아빠가 걱정이 됐다. 벌써 지천명의 나이가 되버린 아빠. 오빠와 나를 이십년 넘게 키워오시면서 아빠의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나 버렸다. 산보를 끝내고 엄마와 함께 목욕을 했다. 엄마 등을 밀어드린지가 언제인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작은 일마저도 엄마한테 해드리지 못했던 것이 맘에 걸렸다. 목욕이 끝나고 우리 모두 오이 마사지를 했다. 예전에는 남사스럽다고 싫어하시던 아빠가 오이를 얼굴에 붙이신 모습에 자꾸 웃음이 났다. 마침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는 9월에 휴가를 나올 때는 병장이라며, 그때는 아빠 대신에 사촌오빠와 함께 벌초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오빠는 늘 그랬다. 내가 언제나 철없는 막내티를 냈다면 오빠는 한 살 많았을 뿐인데도 이렇게 든든했다. 항상 내 편이기에 가족에게는 고맙다는 미안하다는 한마디에도 인색해져버린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가족. 만약 이 세상에 가족이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나는 또 어떤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갑자기 아찔해졌다. With My Friend, 추억 되새기기 전주로 전학을 오게 된 나는 6학년 때 한 친구를 만나게 됐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단짝이 됐다. 나는 당연히 주어진 일주일의 한 부분을 그 친구와 함께하고 싶어 전화를 했다.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친구는 만약 정말 네가 일주일밖에 살지 못한다면 어떡하냐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저 재밌는 설정이라고 생각할거라 짐작했었는데, 우울해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반대로 나는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냥 친구는 많다. 그리고 그냥 아는 사람은 더더욱 많다. 진정한 친구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내 삶을 마감하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지는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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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작게만 느껴지게 된 모교, 내 12년의 기억을 친구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
우리가 처음 향한 곳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다녔던 작은 초등학교였다. 40분 정도면 닿는 그곳을 나는 10여년 동안 가보지 못했다. 친구에게 친구를 만나기전 내가 살았던 이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 만난 13살 이후의 나를 잘 알고 있는 내 친구. 친구에게 그가 알지 못했던 나의 12년의 삶도 전해주고 싶었다. 그러면 친구의 기억 속에서 나는 21년의 흔적을 오롯이 남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훌쩍 커버린 뒤 다시 찾아간 모교는 아주 작게만 느껴졌다. 그곳에서 내가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여러 가지 꿈을 키워 갔다는게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서 연어는 마지막을 고향에서 맞이하는 것일까? 친구와 함께한 고향 나들이에서 나는 내 인생 가장 첫 번째 단추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희미하게나마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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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와 함께 바닷 바람을 맞으며. |
그렇게 짧지만 긴 고향 나들이를 마무리 하고 친구가 보고 싶다는 바다를 보러 부안으로 향했다. 바다의 기운이 우리를 좀 더 시원하게 만들어줬다. 생각해보면 이해해 줄거란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친구를 서운하게 한 적이 참 많았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나는 정말 못난 친구였다. 언젠가 우리 사이에 미안하다고 할 필요가 뭐 있냐고 이야기 해주던 내 친구. 나를 필요로할 때마다 같이 있어주지 못한다고 상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를 기억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그 추억들 때문에 아파진다면 그건 절대로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아름다운 작별을 위해,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들 나는 도서관을 좋아한다. 선반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재미는 어떤 것에도 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은 적지만 온전히 하루를 가지게 된 나는 가장 좋아하는 그 취미생활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봤다. 그동안에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읽지 못했던 책들인데 막상 ‘정말’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읽지 못하게 되니 후회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책들을 구경하는 것은 즐거웠다. 사실 식물과 동물 키우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나였다. 초등학교 시절 죽어버린 병아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서이기도 한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작은 화분을 샀다. 나의 분신을 남기고 싶어서였다. 내 이름을 따 ‘가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가순이’라는 이름표도 붙여주었다. 식물들도 사랑스럽다고 이야기 해줄수록 더 무럭무럭 큰다는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사는 동안에 나는 왜 그 좋은 말을 많은 사람들에게 해주지 못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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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마지막 흔적, ‘가순이’. |
정말 마지막이다. 몇 시간 남지 않은 이 순간, 무언가를 놓쳐버린 느낌이 들었다.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 중 한 사람에게 아직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가장 아꼈고, 지금도 종종 안부가 궁금한 한 사람. 고마웠다고 미안했다고도 말해주고 싶었는데, 애써 외면하다가 정말 마지막 순간이 오니 결국 외면할 수 가 없었다. 편지지를 꺼냈다. 죽는 순간에 뭔들 못하겠냐고 하지만 솔직한 마음을 꺼내보이는 것이 처음이라 쉽지가 않았다. 편지에 마지막 인사를 전한 후 이제는 밀린 숙제를 다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