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경험과 노하우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글 하나 맛깔나게 쓰는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은 오직 하나, 민망함을 무릅쓰고서 뒤늦게나마 기자생활을 시작하고 그것으로서 대학생활을 마치려했던 생각뿐이었다. 그랬다. 대학 초년 시절 나는 기자를 꿈꿨었다. 여기 저기 떠돌다 결국 기자와는 관계없는 길에 들어섰지만, 옛 시절의 꿈을 아무 것도 해 보지 않은 채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애 첫 취재를 시작했다. 마르크스경제학 기사였다. 그런데 처음치고는 너무나 혹독했다. 오직 ‘침묵’만이 나를 맞아줬던 것이다. 이상하리만큼 누구도 이 문제를 시원히 얘기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는 다 끝난 문제라고 했고 누구는 할 얘기가 없다고 했다. 취재는 확실히 난항을 겪고 있는데 마감기일은 차츰 다가온다. 어느날, 아무래도 내 손으로 기사를 킬(kill)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곧바로 편집장에게 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지면이 비면 어떡하냐고 전화했는데, 어떤 서글픔이 나를 파고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어디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이었다. 불쾌한 ‘침묵’을 그대로 놔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정말 ‘징하게’ 취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마추어의 열정마저 없다면 어차피 나에게 승산이란 없다. 목소리부터 크고 또렷하게. 메일보다는 전화를, 전화보다는 면담을 택했다. 망설이는 그 순간 전화기를 집어들었고, 징글맞은 웃음과 웃지못할 아부까지 양념으로 버무렸다. 피치 못할 경우 메일을 보냈는데, 메일 하나 보내는 데도 거짓말처럼 몇 시간이 넘게 걸렸다. 영화 에 나오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란 게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우습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은 강고했다. 특히 채용과정을 주도했던 당시 경제학부 학부장 이영훈 교수의 침묵은 완강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야 굳이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한다. 언론을 보며 찡그릴 일이 많았을 터. 하기야 노무현도 이명박도 언론이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당분간 언론과 인터뷰하지 않겠다고 했다지? 그렇지만 당시의 상황마저 신임 학부장에게 물어보라는 논리에는 입이 떡 벌어졌다. 신임 학부장이 당시 상황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인터뷰 과정에 만난 사람들 모두가 이영훈 교수를 만나보라고 했다. 채용 촉구 운동을 벌였던 학생들뿐 아니라 경제학부의 동료 교수들조차 이영훈 교수을 만나라고 했다. 마감 당일까지 문틈에 명함을 끼워뒀었다. 그러나 정말 징하게 매달려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내 오늘에야 알았다.이영훈 교수는 침묵을 깨야할 당사자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다. 어쨌거나 서울대는 관대하다. 떠밀려 사라지는 마르크스경제학의 등 뒤에 “실력이 없다”는 오명마저 얹어주게 됐다.
마르크스경제학과 어떤 침묵
늦깎이 기자생활을 시작했다.경험과 노하우가 있을 턱이 없었다.그렇다고 특별히 글 하나 맛깔나게 쓰는 것도 아니다.내가 가진 것은 오직 하나, 민망함을 무릅쓰고서 뒤늦게나마 기자생활을 시작하고 그것으로서 대학생활을 마치려했던 생각뿐이었다.그랬다.대학 초년 시절 나는 기자를 꿈꿨었다.여기 저기 떠돌다 결국 기자와는 관계없는 길에 들어섰지만, 옛 시절의 꿈을 아무 것도 해 보지 않은 채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