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다룬 두 개의 영화가 올 가을 개봉을 목표로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다. 김태윤 감독의 ‘또 하나의 가족’과 홍리경 감독의 ‘탐욕의 제국’이다. 영화 ‘또 하나의 가족’은 삼성 백혈병 문제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故 황유미 씨와 그의 아버지 황상기 씨, 그리고 이들을 돕는 사람들을 그린 극영화다. 홍리경 감독의 ‘탐욕의 제국’은 2011년 4월부터 현재까지 직업병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따라다니며 전자산업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들여다본 다큐멘터리다. 막바지 작업에 분주한 두 감독을 만나 각자의 영화에 대해 들어봤다.
::: 영화 전반에 대하여 :::
이번에 촬영한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
김태윤속초에 사는 택시 기사가 딸을 반도체 공장에 취직시켜 보냈는데, 딸이 1년 반 만에 백혈병에 걸려서 돌아와요. 아버지는 딸이 일했던 공장에서 병이 걸렸던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죠. 그러던 중 딸과 병원엘 갔다가 속초로 돌아오는 자신의 택시 안에서 딸을 보내게 돼요. 딸을 보내면서 아버지는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겠다고 딸과 약속하는데, 그 약속을 지켜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에요.
홍리경영화의 중심축이 두 개가 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반도체 공장에 취업해서 하얀 방진복에 하얀 마스크를 쓰고 일했던 이름 없는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한 축이고, 여성 노동자들이 왜 병에 걸리게 됐는지 규명하려는 당사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다른 한 축이에요.

▲‘또 하나의 가족’은 故 황유미 씨와 그의 아버지 황상기 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다룬 영화를 찍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김태윤2011년 6월 황상기 아버님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승소하셨다는 기사가 났어요. 설마 이길 줄은 생각을 못해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거든요. (황상기 씨의 사연이 실린) 기사를 읽는데 굉장히 눈물이 나더라고요.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알림과 동시에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홍리경제가 속해 있는 ‘푸른영상’은 사회문제, 노동문제, 여성문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공동체에요. 저 역시 그런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들어왔는데, 사무실 선배가 첫 작업으로 삼성 직업병에 대해 해보는 거 어떠냐고 제안을 해주셨어요. 특별히 관심 있었던 소재는 아니었는데 제가 하려고 했던 이야기일 수 있어서 하게 된 거죠.
‘또 하나의 가족’과 ‘탐욕의 제국’ 제목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
김태윤시나리오를 쓰려고 황상기 아버님, 피해자 유족들,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님을 취재를 했어요. 가족을 잃으신 분들인데 이 분들이 (반올림을 통해서) 또 다른 가족을 만드신 것 같았어요. 물론 과거 삼성 광고 카피 중에도 ‘또 하나의 가족’이 있었죠. 그 의미보다는 이 분들의 끈끈한 유대관계나 서로 생각하는 마음을 보면서 ‘또 하나의 가족’이 적절한 제목이 될 것 같다 생각했어요.
홍리경선배 감독님께서 장 지글러(Jean Ziegler)의 ‘탐욕의 시대’를 읽어보라고 던져주셨는데, 그 책의 불어 원제는 ‘수치의 제국’이에요. 그 제목을 보자마자 ‘수치’라는 단어가 삼성을 수식할 수 있는, 상징적인 단어라고 생각했어요. ‘수치’라고 하자니 어감이 이상해서 한국어 제목인 ‘탐욕’과 원제의 ‘제국’을 붙여서 ‘탐욕의 제국’이 됐죠. 그런데 이 영화랑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 영화는 삼성이라는 큰 기업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는 작고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거든요. 그런데 첫 상영을 이 제목으로 해버려서 바꿀 수 없게 됐어요.
본격적인 영화 제작에 앞서 사전조사 중에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김태윤스텝들이랑 장소 섭외도 할 겸 속초에 황상기 아버님을 뵈러갔어요. 황상기 아버님이랑 술 한 잔 하면서 다들 아버님께 많이 감동했어요. 딸을 잃고 어려운 싸움을 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그러고서 아버님이 딸의 유해를 뿌린 장소에 가서 같이 묵념하고 영화 잘 되게 해달라고 했던 그 순간이 제일 기억에 남네요.
홍리경선배한테 제안을 받고 자료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선배가 자료조사보다는 현장에 나가보는 것이 먼저라고 하시더라고요. 피해자 가족 분들과 활동가들을 만났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유쾌하게 싸우시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삼성’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삼성’의 문제를 꼬집는 영화를 제작함에 있어 주변의 만류나 두려움은 없었나.
김태윤주변에서 많이 말렸죠. 누가 투자를 하겠냐, 어떤 배우가 하겠냐, 배급은 할 수 있겠냐며. 저도 처음엔 망설였는데 ‘도대체 일개 대기업이 뭔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리 힘 센 상대라고 해도 그 힘만큼 또 다른 힘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도와주실 분이 분명히 나타날 거라 생각했죠. 일단은 부딪쳐보자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썼어요. 그 시나리오를 배우와 스텝들한테 전달했을 때 기꺼이 돕겠다고 했어요. 그 힘으로 온 거죠.
홍리경작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저는 두려움이 없었어요. 작업을 제안했던 선배가 농담으로 가족 중에 삼성 다니는 사람 있냐고 물어봤거든요. 저는 삼성에 다니는 가족도 없고, 사람들이 말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해서 두려운 건 없었어요. 그런데 피해자들이 삼성으로부터 해코지를 당했다는 얘기를 가까이서 들으면서 두려움이 생긴 건 있어요.
투자사들은 영화 ‘또 하나의 가족’의 배우와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자를 거절했다. 하지만 6천명의 사람들이 제작두레를 통해 ‘또 하나의 가족’이 돼줬다. 한 여성 영화제의 메인스폰서였던 삼성은 이 여성 영화제가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을 제작지원한 사실을 알고는 후원을 끊었다. 역설적으로 삼성의 이런 행동이 영화를 더욱 주목받게 했다.

▲ ‘또 하나의 가족’의 김태윤 감독은 ‘용의자X’, ‘인사동 스캔들’ 등의 각본을 썼고 ‘잔혹한 출근’을 연출한 바 있다. ⓒ김태윤
::: 제작에 관한 이야기들 :::
영화촬영 중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김태윤아무래도 예산이 부족한 점이죠. 확실하게 투자처가 있던 게 아니기 때문에 돈 구하는 게 가장 힘들었죠.
홍리경아무래도 아픈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찍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프던 피해자 분이 돌아가셨을 때예요. 누군가 아프고 누군가 죽는 상황이 일상적인 경험은 아니잖아요. 그런 경험이 제게 조금 무거웠던 것 같아요.
촬영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김태윤굉장히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엑스트라 부르면 다 돈인데 지방에서 자원봉사 하러 와주시는 분들도 있었고. 가방 쇼핑몰 하시는 분은 가방을 보내주시고, 갓김치 공장에서 김치도 보내주시고. 그렇게 현물로 지원해주시면 그걸 팔아서 제작비를 마련하기도 했죠. 다른 영화에서는 전혀 없는 일이죠. 저희도 이 영화를 하면서 처음으로 겪는 일들이에요.
홍리경행정소송을 하시는 분들 중 두 분이 2011년 6월에 1심에서 승소했어요. 황상기 아버님이랑 애정 언니(2005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故 황민웅 씨 아내)가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하지 말라고 농성을 하다가 근로복지공단 직원에 의해 1층 밖으로 끌려나왔어요. 그 날 비가 많이 왔는데 애정언니는 바닥에 누워서 소리치고 황 아버님은 들여보내달라고 하고 계셨어요. 그 때 제가 카메라가 없어서 상황만 지켜보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안 찍고 뭐하냐’고 그래요. 그 때 나는 진짜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되는구나 느꼈죠.
가장 신경 써서 촬영했던 장면은 무엇인가.
김태윤 황상기 아버님을 모델로 했던 주인공이 재판정에서 증언을 하는 장면이었죠. 아버지가 딸에게 한 약속이 있어요. 네가 왜 억울하게 죽었는지, 네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주겠다고 약속을 해요.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법정에서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장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죠.
홍리경피해자 한 분이 투병 중에 돌아가셨어요. 삼성전자 앞에서 노제를 지내는 장면을 가장 잘 찍고 싶었어요. 고인이 가시는 날을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기록하고 싶어서요. 이 상황을 잘 기록해두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삶을 기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죠.

▲‘탐욕의 제국’의 한 장면. 한혜경 씨가 삼성본관을 향해 “나는 삼성반도체에 가서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는데 내몸은 이렇게 됐다”고 외치고 있다
촬영 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홍리경혜경 언니(2005년 10월 뇌종양 진단을 받고 수술 후 언어, 보행, 시력 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가 삼성전자 본관에서 처음으로 집회를 했던 날이었어요. 혜경 언니가 마이크를 잡고 거대한 삼성전자 본관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해요. 이건희 회장 거기 계시냐고. 한번 나와서 저랑 같이 얘기를 해보자고. 아무런 대답이 없으니까 울분에 차서 “이건희 나쁜 놈아”라고 하면서 “나는 삼성반도체에 가서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는데 내 몸은 이렇게 됐다”고 절규하는 장면이 있어요. 한혜경이라는 사람은 늘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삶만 살던 사람이에요. 자기 분노를 밖으로 표출할 줄도 모르고. 근데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를 향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김태윤영화가 뭘까 고민을 하고 사는데, 최근에 드는 생각은 주인공한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인공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영화인 것 같아요. 이 영화에서도 딸을 잃은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을 던지죠. 황상기 아버님이 존경스러운 이유는 거기서 타협하지 않고 나는 싸우겠다는 답을 보여주신 거잖아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도 그런 질문인 것 같아요.
홍리경영화가 의도하는 바는 두 가지가 있어요.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지 사람들이 공감하고 그들에게 응원의 말 한 마디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 또 하나는 이 작은 부품 하나 만드는 여성들의 삶을 사람들은 잘 모르잖아요. 우리가 몰랐던 이 삶에 대해서 알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영화가 해야 될 몫 아닐까요?
삼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태윤이건희 회장의 말을 들려주고 싶어요. 정직해야 된다. 그런 말 밖에는 더 할 말이 없어요. 제가 할 일은 그들에 대한 비판보다는 영화를 잘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요.
홍리경저는 외국에 가서 삼성전자 간판을 보거나 제품을 보면 자랑스러웠거든요. 그런데 작업을 하면서 봤던 삼성은 생각과 달랐어요. 가진 것 많은 큰 기업이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치졸한 방법으로 대응하는 모습이었죠. 한마디로 ‘찌질하죠’
더하고 싶은 말.
김태윤사람들이 우려도 많이 했지만 영화 만들면서 복 받았던 것 같아요. 내가 왜 영화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고, 결과물도 지금까지 본 사람들은 만족해하고요. 반올림 분들이나 유가족 분들이 보시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궁금하기도 해요. 이 분들이 제일 잘 봐줬으면 좋겠어요.
홍리경역사에는 거대한 사건들 그리고 위대한 사람들만 기록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사람들이 기록된 역사 말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작다고 말하는 그런 삶들에 대해서 역사로써 기록되는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다큐를 하는 것 같아요.

▲ ‘탐욕의 제국’의 홍리경 감독은 2년여간 전자산업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추적했다.
김태윤 감독의 ‘또 하나의 가족’은 지난 2월 촬영을 시작해 현재 컷 편집을 마치고 색 보정 작업과 사운드 믹싱 작업 중에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개봉 전까지 계속해서 제작두레를 모금할 예정이다. 제작두레는 www.anotherfam.com에서 참여할 수 있다.
홍리경 감독의 ‘탐욕의 제국’은 현재 막바지 편집 중에 있으며 영화제를 위해 가편집된 영화를 제주영화제, 여성노동영화제, 목포인권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