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설국열차’가 관객을 무섭게 모으고 있다. ‘설국열차’는 간결한 메타포로 구성돼있지만 그 메시지는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무임승차한 꼬리칸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특권을 누리고 있는 앞칸으로 나아가는 수평적 진행 과정에서, 두 계급이 화해할 수 없는 수직적 위계가 나타난다. 앞칸은 압도적인 화력를 가진 군대를 보유하기도 하는데, 따라서 꼬리칸 사람들이 칸막이를 하나씩 넘어가는 일은 그 자체로 피를 부른다. 기차는 꼬리칸 사람들도 쉽게 앞으로 갈 수 있을 것처럼 평평하지만, 그 안의 관계는 기울어져있다.
<서울대저널> 122호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층위에서 볼 수 있는 ‘수직적 위계’에 주목했다. 기획 ‘그 여름의 추억’은 국가기관과 국민 간 위계에 대한 것이다. 87년 이후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정치적으로 평등해졌다고 하지만 2013년의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국가정보원은 그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국민의 절반을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종북 세력’으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 안보를 생각한다는 국정원은 “명예를 위해” 국가 기밀 문서도 서슴지 않고 공개했다.
첫 번째 특집 ‘자고 일어났더니 학교가 하나 더 생겼다!?’는 대학본부와 학생 간 위계에 대한 것이다. 본부는 경기도 시흥시에 서울대학교 캠퍼스를 짓기 위해 우선협상대상자까지 선정한 상태지만, 정작 그곳에서 생활할 당사자인 학생들은 이 사실을 ‘자고 일어났더니’ 바뀌어있는 것으로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무려 7년 동안 추진해온 일인데도 말이다. 학생, 교직원, 교수가 대학의 3주체라는 외침이 진실이 되려면 아직도 몇 밤은 더 ‘자고 일어나야’ 할 것이다.
두 번째 특집 ‘삼성반도체 직업병 산재인정을 향한 길고긴 싸움’는 자본과 노동 간 위계에 대한 것이다. 혹자는 요즘 세상에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게 말이 되냐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성반도체는 노동자를 그저 기계보다도 못한 하나의 생산요소로 취급했다. ‘클린룸’이라고 자랑하는 반도체 공장 안에서 자본은 노동자로부터 나오는 먼지를 막는 것에 급급했지, 공정 과정에서 노동자에게로 흘러들어가는 유해물질을 막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노동자들이 병에 걸린 뒤에도 자본은 ‘영업기밀’을 지킨다며 그 안에서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했는지 피해자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기획·특집은 비교적 거시적이어서 눈에 잘 띄는 위계 관계를 다뤘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거시구조를 뒤바꾸는 혁명이 있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해소될 순 없다. 따라서 거시구조의 부당함에 지속적으로 도전을 하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꼬리칸’ 안에서의 위계를 집어내는 일이다. ‘설국열차’에서 꼬리칸 사람들 내부에서도 먹을 것을 둘러싼 갈등이 형성됐듯, 소위 ‘서민’들의 사회에서도 위계는 나타날 수 있다. 짧은 기사지만 기획·특집보다도 편집장으로서 추천하고 싶은 기사는 ‘심야의 어둠 속에 가려진 버스기사들’이다. 기사는 서울시 심야버스의 운전기사를 조명했다. 24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며 단순히 내지르는 환호는, 주간버스 운전 때보다도 적은 임금과 높은 노동 강도에 고통 받는 심야버스 기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심야버스가 필요하다고 요구한 사람들과 심야버스 기사는 사실 같은 꼬리칸 사람들일 것이다. 심야버스를 요구한 사람들이 심야버스의 편리함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심야버스 기사의 노동 실태를 ‘함께’ 고발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앞칸에 도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고해성사를 하려 한다. <서울대저널> 122호를 만들며 본의 아니게 ‘열정 노동’을 착취했다. 모든 기자들이 하루 이상 밤샘 작업을 했고, 급기야 8월 29일에는 책을 디자인해주시는 디자이너 분까지도 자정에서야 퇴근을 하실 수 있었다. 진심으로 <서울대저널>의 제작에 참여한 모든 기자들과 노동자들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