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흥섭
2012년 12월 6일. 경기도 수원의 경기도문화의전당 소극장에서는 색다른 연주회가 열렸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여성합창단의 연주회지만, 합창단원들에게는 독특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모든 단원들이 50세 이상의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수원시여성실버합창단’은 창단연주회를 성공리에 마치며 첫발을 내딛었다. 공연 내내 합창단원들의 시선이 모였던 꼭짓점에는 지휘자 송흥섭(58) 씨가 서있었다.
혹독한 조련사 ‘송마에’의 부드러운 변신
경력 30년이 넘는 베테랑 송흥섭 지휘자는 아마추어들로 구성된 지역사회 합창단의 지휘를 맡아 전국·세계규모 대회에 다수 입상시켰다. 80년대 초, 수원 남창초등학교 합창단 지휘를 맡아 전국규모 대회인 ‘새마을 합창대회’에 입상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송흥섭 지휘자는 “그 당시 아이들을 이끌고 대회에 나가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36개 팀 중 대상을 차지했었다”고 회상하며 “그 때의 감동이 합창단 지휘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송 지휘자는 이후 ‘수원시여성합창단’의 지휘를 맡아 2004년 7월, 독일 브레멘에서 열린 세계합창올림픽에서 여성합창부문 금메달, 연출합창부문 은메달을 수상했다. 전공자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즐비했던 각국 합창단과 경쟁해 올린 성과였다. 수원시여성합창단은 송흥섭 지휘자의 지도 아래 ‘거제도 전국합창대회’ 대상, 중국 샤먼에서 열린 ‘제4회 세계합창올림픽’ 여성합창부문 금메달 수상 등 놀라운 성과를 연달아 거뒀다.
비전공자인 주부들로 구성된 합창단을 이끌고 각종 대회를 석권한 비결은 무엇일까. 송흥섭 지휘자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혹독한 연습이었다”고 답했다. 실제로 송흥섭 지휘자는 단원들 사이에서 혹독한 연습과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로 유명하다. 송 지휘자는 “수원시여성합창단을 이끌고 브레멘 세계합창올림픽을 준비할 때는 3개월 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을 하고, 각 파트를 모두 CD로 녹음해 만족스러운 소리가 나올 때까지 훈련시켰다”고 말했다. 합창단원들 중 일부는 강한 연습 강도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리기도 했고, 합창에 나서기 전 우황청심환을 먹어야 하기도 했다. 송 지휘자는 자신의 지휘 스타일에 대해 “내가 다른 지휘자들보다 그래도 조금 더 나은 면이 있다면 단원들 내면에 있는 정신적인 면들을 최대한 이끌어내고자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 지휘자가 이끄는 연습은 단순히 소리를 맞추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아마추어 단원들 내면의 ‘정신성’을 쏟아내는 과정이다. 연습 기간 중 합창 단원들을 일일이 다시 오디션해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 파트를 전면 조정하기도 했다. 소프라노에서 메조소프라노로 ‘강등’된 단원들은 한때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치밀한 계획과 치열한 연습은 세계대회 석권이라는 열매로 돌아왔다.
그랬던 ‘송마에’가 달라졌다. 수원시여성합창단을 거쳐 갔던 단원들을 다시 모아 만들어진 수원시여성실버합창단 지휘를 맡으면서부터다. 송흥섭 지휘자는 “합창단을 맡아 맹렬한 연습을 통해 입상을 거듭하면서 희열도 느꼈지만, 그 과정에서 이것이 과연 행복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이제는 단원들이 합창을 하며 스스로의 감성에 젖고, 행복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입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음악이 곧 열정이 없는 음악을 뜻하지는 않는다. 수원시여성실버합창단은 가을로 예정된 정기공연을 앞두고, 여름 내내 무더위 속에서 연습에 매진했다. 전력 위기로 인한 냉방 중단으로 찜통 같았던 연습실에서 송흥섭 지휘자를 비롯한 실버합창단원들은 땀을 비 오듯 쏟아냈다. 송 지휘자는 “단원들 중에서는 70이 넘은 노인 분들도 계신데, 합창이 주는 감동을 느끼고자 이 더운 날에도 연습을 거르지 않고 나오신다”고 귀띔했다. 실버합창단은 음악적으로 수준 높은 소리를 내기는 힘들지만, 그들만이 갖는 소리의 매력은 특별하다. 인생의 풍파를 겪은 단원들이 삶과 가족과 관련된 곡을 노래할 때는 다른 합창단이 낼 수 없는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송흥섭 지휘자는 “실버합창단원들이 양희은의 ‘당신’과 같은 노래를 부를 때는 내가 지도한 어떤 합창단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감동이 몰려온다”며 “일반 합창단이 내는 소리가 그냥 맛있는 음식의 느낌이라면, 실버합창단의 음색은 뚝배기에 선지국을 먹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한다.

수원시여성실버합창단의 창단 기념 연주회 모습 ⓒ수원시여성실버합창단
막노동 일을 하면서도 버릴 수 없었던 음악의 꿈
송흥섭 지휘자는 고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어려웠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생활비를 벌기 위해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송 지휘자는 성악을 전공하는 형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성악가를 꿈꿨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책 전집을 파는 직업이었던 월부 책판매원, 공사판 막노동꾼, 청소일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지금도 친구 집에 가보면 내가 어려웠던 시절 그 친구가 팔아준 책 전집이 꽂혀있다”고 말하는 송흥섭 지휘자는 그 시절을 돌이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송 지휘자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송 지휘자가 군에 입대했을 때 국방부로부터 문선대를 조직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송 지휘자는 문선대에 선발돼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제대하고 나서는 현재 안양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신학대학교에 입학해 음악 공부의 꿈을 펼치게 됐다. 낮에는 과대표로, 밤에는 나이트클럽의 가수로 일하면서 주경야독한 송 지휘자는 대학을 최고 성적으로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송흥섭 지휘자는 “생활비를 벌면서 수학하던 시절에는 하루에 2시간 자기도 힘들어 청년 탈모가 오기까지 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노동과 공부를 병행한 끝에 송 지휘자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학업을 마친 뒤에도 송 지휘자의 음악 인생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학연과 지연을 중시하는 음악계에서 송흥섭 지휘자는 처음부터 철저히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송 지휘자가 강박적일 정도로 공부에 매진하고, 단원들을 훈련시켰던 것은 오로지 ‘음악’ 으로만 승부해야했던 환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송흥섭 지휘자는 “나는 지금까지 음악의 길을 걸어오면서 내부에 알력 다툼이 생기거나 할 때면 항상 무대에서 이야기하자고 말해왔다”며 “음악에 외적인 요소가 개입되면 벌써 소리부터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송 지휘자의 지론에 따르면 음악인의 순수성은 합창 분야에서 더욱 중요하다. 합창은 사람의 목소리로 하는 것이고, 사람의 목소리는 마음의 반영이기에 초심과 순수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힘들었던 시기를 이겨내고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게 된 송 지휘자이기에 고학생 제자들은 그에게 더욱 특별하다. 송흥섭 지휘자는 ‘난파소년소녀합창단’을 비롯해 많은 지휘자 양성과정에서 레슨비를 받지 않고 고학생들을 지도했고, 지금은 그 학생들이 성장해 지휘봉을 잡고 있다. 그는 “음악의 길은 힘들어서 누군가 나에게 음악을 계속 해도 되겠느냐고 물으면 90%에게는 취미로 하라고 권한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길을 가고자하는 고학생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수원시여성합창단의 정기공연 ⓒ수원시여성합창단
영혼을 파고드는 ‘사람의 목소리’
“나는 죽을 때까지 합창하고 싶다”
많은 분야 중 유독 합창단 지휘에 주력하는 송 지휘자는 “악기의 소리도 매력 있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사람 본연의 인성(人聲)이 주는 감동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합창이 가진 놀라운 힘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난파소년소녀합창단에게 조두남의 ‘선구자’를 처음 가르칠 때 아이들은 가사와 곡의 매력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 조두남 곡, 윤해영 시 ‘선구자’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이뤄진 합창단원들이 곡에 담긴 일제시대 민족의 애환을 이해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합창 단원들과 지휘자는 함께 일제 강점기 시절의 사진을 보고, 글을 읽으며 이야기를 거듭했다. 송흥섭 지휘자는 “한 곡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를 때와, 그 곡을 온전히 이해하고 부를 때 합창의 소리는 완전히 달라진다”며 “아이들이 백 년 전 이야기를 담은 노래에 공감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음악이 달라진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작은 기적”이라고 합창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합창단을 지휘했음에도 송흥섭 지휘자의 열정은 여전하다. 아직까지도 수원시여성실버합창단 뿐만 아니라 ‘평택여성합창단’, ‘Evangelical Singers’ 등 다수의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송 지휘자의 마지막 꿈은 무엇일까. 송흥섭 지휘자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자신의 최종 목표를 밝혔다. “나중에 나이가 많이 들게 돼 양로원에 들어가게 되면 치매 노인, 중풍 노인 할 것 없이 양로원의 모든 노인들이 함께하는 합창을 지휘하다 하늘나라로 가고 싶습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제10회 평화의합창제에서 연합 합창을 지휘하는 송흥섭 지휘자 ⓒ난파소년소녀합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