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다스림을 위해서는 지혜와 생각에 힘쓰고, 몸을 힘들게 하고, 종(鐘)과 북의 즐거움을 폐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수업 준비를 위해 한 텍스트를 읽다가 뜬금없이 입에서 실소가 나왔다. ‘종과 북의 즐거움’이란 대목 때문이었다. 종과 북은 익히 아는 것처럼 타악기의 한 종류고,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면 즐거운 게 당연하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에서 ‘종’과 ‘북’과 ‘즐거움’을 이용해 작문을 해보라고 하면 ‘상대방을 종북(從北)이라고 공격하는 즐거움’ 정도가 될 것 같아서 혼자 몰래 웃은 것이다. 아마 123호를 만들면서 하도 ‘종북’이라는 단어를 봐서 자연스럽게 연상반응이 일어난 것 같다.

원고를 모두 넘기고 최종 교열을 하기 위해 장충동으로 향하던 길 위에서 법무부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간에 정당해산심판이 언급된 것은, 우리 사회가 ‘종북’ 논란이 다다를 수 있는 극한에 거의 근접했다는 신호로 읽혔다. 분단으로 인해 반공 이데올로기가 깊게 자리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종북’ 논란은 하루 이틀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도 자기를 공개적으로 ‘종북’이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북’과 어울리는 말은 정신 나간, 미친 등의 수식어를 비롯해 국가 전복, 내란 등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종북’세력이 어떤 주장을 하고 어떤 목표를 지니는지에 대해선 전혀 합의된 바 없다. “김정일 개새끼”를 따라하지 못하면 ‘종북’인지, 북한 지도부에 동조하며 지하조직을 꾸리면 ‘종북’인지, 아니면 그냥 아무나 ‘종북’인지 아무도 모른다. 국정원의 대북심리전단은 사실상 대‘종북’심리전 활동도 펴고 있었는데, 야당을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종북’이 됐으니 가장 넓은 의미의 ‘종북’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국정원의 이해와 궤를 같이 하는 보수적인 인사들은 이때다 싶었던지 여기저기서 아주 즐겁게 ‘종북’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다녔다. 종합편성채널에서 한 정치평론가란 사람은 ‘5대 종북 부부’를 선정해 보여주기도 했다.
유독 ‘종북’에 있어서는, 상대방을 ‘종북’이라고 공격하는 측이 입증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들은 ‘종북’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아주 손쉽게 우위에 있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종북’이 가리키는 대상은 쓰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5대 종북 부부’에서의 ‘종북’ 개념이 지나치게 넓다고 지적하면, 그가 도리어 ‘종북’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결국 ‘종북’은 의미 없는, 혹은 의미가 불분명한 종소리나 북소리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 울림 자체가 ‘종북’이라고 공격받는 측에게 두려움을 주고 그들을 위축되게 만드는 좋은 도구인 것이다. 두려워진 사람들은 ‘진짜 종북’과 거리를 두고 그들을 도려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을 도려내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되는가? 미약하나마 이번 <서울대저널>이 ‘종북’ 논란을 양성화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무작정 신나게 종을 울리고 북을 쳐댈 게 아니라 악보부터 봐야 ‘종과 북의 즐거움’이 나오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