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한 4컷 만화, 그 달인을 찾아서

오늘날, 웹툰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만화가 대중들의 생활 속에 자리잡은 시대다.하지만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과 달리 만화가 귀하던 박순찬 화백의 초등학생 시절이 나타난다.만화책이 비싸서 마음껏 볼 수 없었던 때였다.초등학생 만화책이 비싸 마음껏 볼 수 없었던 때, 몇 안 되는 아동 만화 잡지가 그에게 만화가의 꿈을 갖게 했다.어릴 적부터 만화의 길을 걸어가리라 자신했던 그는 26세에 의 최연소 화백이 됐다.

오늘날, 웹툰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만화가 대중들의 생활 속에 자리잡은 시대다. 하지만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과 달리 만화가 귀하던 박순찬 화백의 초등학생 시절이 나타난다. 만화책이 비싸서 마음껏 볼 수 없었던 때였다. 초등학생 만화책이 비싸 마음껏 볼 수 없었던 때, 몇 안 되는 아동 만화 잡지가 그에게 만화가의 꿈을 갖게 했다. 어릴 적부터 만화의 길을 걸어가리라 자신했던 그는 26세에 의 최연소 화백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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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찬 화백은 2008년 제1회 올해의 시사만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 미디어오늘

가난했던 유년 시절, 만화와 동고동락하다.

아버지가 출판사를 하셨기 때문에 어릴 적에 유복했던 시절을 잠깐 보낸 적이 있다는 박순찬 화백, 덕분에 좋아하는 과학 만화를 사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유치원을 마치고 나서는 등록금이 비싼 사립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집안 형편이 극도로 어려워지게 된 것은 그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나서다. 어머니는 무리를 해서라도 사립 초등학교에 계속 다니는 것을 고집했다. 그러다보니 초등학교 시절 물질적, 정신적으로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등록금을 못 낸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손을 들게 하는 벌을 줬어요. 요즘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힘든 학교생활을 하면서 그에게 힘이 돼 준 것은 바로 만화였다. 매달 나오는 만화를 보고, 따라 그리면서 때로는 자기가 만든 줄거리에 직접 만화를 그려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중학교에 올라가서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를 만나 만화에 대한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됐다. “저는 만화체로 그림을 그렸던 반면 친구는 극화체 그림을 잘 그렸어요. 그 친구에게 영향을 받아 극화체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3학년 시절 우연히 접하게 된 일본 만화에 ‘필’이 꽂히기도 했다. “종이를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자주 썼는데, 하루는 친구가 일본 만화 잡지를 찢어와 코팅해왔어요. 그걸 보고 충격을 받았죠” 친구가 가져왔던 일본 만화의 정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였다. 고등학생이 돼 대학교 입시에 신경 쓸 일만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애니메이션으로 진출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학생운동에 뛰어들다! 아니, 끌려가다? 장도리의 독자로서 대학생 시절 얼마나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했을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순찬 화백의 답변은 철저하게 예상 밖이었다. “원래는 서양화를 그리는 동아리에 가입하려고 했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동아리방이 안 보이던 차에 ‘만화사랑’ 동아리가 보여서 문을 열었던 것이 발단이었죠.” 동아리 선배는 저녁을 사주겠다며 그를 환영했지만 그는 영 내키지 않아 가지 않았다. 만화는 이제껏 스스로 그려온 터라 매력을 별로 못 느꼈기 때문이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얼마 후 그는 길에서 동아리 선배를 만나 동아리방을 다시 찾아가게 됐다. 모여 있는 동아리 사람들에게 만화 실력을 보여주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작 동아리 사람들은 학생운동을 위해 모인 것이라 만화에 관심만 있었을 뿐 잘 그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만화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밥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 마시며 ‘만화사랑’의 어엿한 부원이 됐다. 어느 날, 선배가 천을 가져오더니 그에게 학생운동과 관련된 내용의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이를 발단으로 그림 그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의 몫이었기에 거의 혹사를 당했다고 한다. 그는 정작 동아리 사람들이 열렬히 나갔던 데모에는 한 번밖에 참여해보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겁이 많아서 돌 던지고 화염병 던지는 데모에는 안 나가려고 했어요. 선배들이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때마다 도망다녔죠.” 비록 데모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는 동아리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세미나를 통해 다양한 책을 접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안목을 키웠다. 장도리, 세상의 부조리를 깨부수다 박순찬 화백은 졸업하자마자 경향신문에 입사해 4컷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장도리라는 제목은 발음하기 좋고 거부감이 없으며 뜻이 와 닿는 단어를 찾다가 발견했다. “대학 시절 건축을 부전공으로 했고 무언가를 만드는 데에 관심이 많다보니 떠오른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시사만화가 매니아층이 아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다보니 그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만화를 그리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 여러 신문을 읽어보는 것은 물론 인터넷의 수많은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관심사를 알아보는 것은 이제 그의 일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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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게 항의를 받았던 2009년 5월 6일자 장도리, 촛불 시위를 탄압하는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고자 했다. ⓒ 경향신문

16년째 만화를 연재하다보니 그 긴 세월에는 징한 에피소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2008년 촛불 시위를 주제로 한 만화를 실었을 때였다. 정부가 촛불 시위를 탄압하는 상황을 그렸는데 마지막 컷에 전투경찰을 그려 넣은 것이 불씨가 됐다. 자기 자식을 어떻게 무장공비에 빗댈 수 있냐며 에서 항의가 들어온 것이다. 처음에 항의전화가 걸려온 것에 이어 며칠 뒤에는 10여명 정도의 회원이 항의방문을 했다. 그가 전경이 아니라 현 정권을 비판하려는 의도였음을 해명하자 어머니 한 분이 갑자기 그에게 오른손잡이인지 왼손잡이인지를 물으며 손을 내밀어보라고 했다. 갸우뚱하며 그가 내민 오른손에는 어머니가 물면서 생긴 이빨 자국이 새겨졌다. 다행히 옆에서 말려서 큰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그는 어머니에게 물리면서 슬픈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무장공비, 빨갱이는 악마인데 어떻게 자기 아들을 거기에 비유했냐며 화를 내고 계신 거였어요. 전쟁을 겪은 세대가 그런 고정관념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펐어요.”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온 국민이 응원하던 시절, 줄기세포에 열광하던 분위기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도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는 세력으로부터 심한 항의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그중에는 테러를 하겠다는 섬짓한 협박도 포함돼 있었다. “잡혀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인터넷에 장도리를 검색해보면 네티즌들의 두 가지 반응을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장도리를 보면서 그 표현력에 감탄하게 된다는 찬사와 격려다. 또 하나는 요즘 세상에 이런 만화를 그리는 작가의 신상이 위태롭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섞인 목소리다. 네티즌들의 우려에 대해 박순찬 화백은 그런 걱정을 별로 해본 적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군부 독재 시절에 만화를 그렸던 선배들은 만화 내용 때문에 처음 보는 방에 끌려가서 컵라면 한 그릇 먹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고 해요. 요즈음 세상에 그런 시대착오적인 일은 없으니까 잡혀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아요. 그냥 손 좀 물릴 뿐이죠.” 덧붙여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할 정도로 만화를 그린 적은 없다면서 그런 만화는 그가 지향하는 풍자만화가 아니라 단순히 남을 비방하는 만화일 뿐이라고 말했다. “풍자만화는 풍자의 대상도 보고 웃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인정할 수 있는 만화라고 생각해요. 그게 제가 추구하는 풍자만화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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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정권의 실정을 풍자했던 장도리 작품들을 모아 엮은 책,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대학생, 자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할 때

오늘날 대학생들에게 불고 있는 스펙 열풍에 관해서 박순찬 화백은 나쁘지 않다는 입장이다. “어느 시대나 자기만의 스펙을 쌓으려고 했죠. 스펙이라는 말이 자기 계발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어요? 스펙도 분명히 중요한 일이고 권장될 일이에요. 문제는 누구를 위한 스펙 쌓기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요즈음 학생들은 지나치게 기업을 위한 스펙을 쌓으려고만 노력한다는 지적이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스펙 쌓기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기업을 위한 스펙을 쌓아서 나이 40, 50세에 정년퇴임 한다면 이는 너무 근시안적이지 않을까요? 장기적인 시각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스펙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할 것 같아요.” 그는 요즘 시대에 그런 고민을 할 여유가 충분하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나마 가장 여유 있는 시절이 대학생 시절이라고 말했다. 일단 사회에 나가게 되면 그런 고민을 할 여유가 더욱 더 사라지기 때문이다. “저같이 만화를 그리거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 외에는 고민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에요. 앞으로 제도가 더욱 정교해짐에 따라 자기만의 생각을 하기가 어려워질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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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앞으로 100살까지 살 텐데, 장기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스펙이 무엇일까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만화밖에 모르는 행복한 바보

박순찬 화백은 어릴 적부터 줄곧 만화를 바라보며 삶의 길을 걸어왔다. “나중에 크면 만화를 그리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주전공으로 천문대기학을, 부전공으로 건축학을 공부한 이유도 자신의 만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휴학을 했을 때는 미술학원을 다니거나 만화 작가 밑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각과 민주주의 탄압을 비판한 만화 ‘박정희’에서 그림을 맡았다. “매일 만화를 연재하는 상황에서 단행본을 그리기란 사실 굉장히 힘이 들죠. 그래도 평소에 극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굉장히 행복했어요.” 앞으로 만화 공부를 틈틈이 하면서 역사나 경제를 다루는 극화를 그리고 싶다는 박순찬 화백, 그에게 있어 만화는 그의 열정을 불타게 하는 아름다운 꿈, 목표이자 활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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