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없는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

‘칠드런 오브 맨’은 알폰소쿠아론 감독의 2006년 작품이다.쿠아론 감독은 얼마 전 개봉한‘그래비티’의 감독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칠드런 오브 맨’은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않았지만 감독 특유의 카메라 기법과 영상미는 ‘그래비티’ 못지않다.미래 사회를 그린 헐리웃 영화지만 광학 무기나 날아다니는 자동차는 등장하지 않는다.도시의 풍경도 등장인물의 모습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칠드런 오브  맨’은 알폰소쿠아론 감독의 2006년 작품이다.쿠아론 감독은 얼마 전 개봉한‘그래비티’의 감독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칠드런 오브 맨’은 국내에서는 개봉하지 않았지만 감독 특유의 카메라 기법과 영상미는 ‘그래비티’ 못지않다. 미래 사회를 그린 헐리웃 영화지만 광학 무기나 날아다니는 자동차는 등장하지 않는다. 도시의 풍경도 등장인물의 모습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가전은 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헐리웃 영화의 필수요소인 자동차 추격신도 한심스러울 만큼 느려터졌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점들이 가공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를 판타지가 아닌, 우리의 삶을 그린 드라마로 만든다.

2027년, 런던

영화의 배경은 2027년 런던으로, 원인 모를 전 세계적 불임현상으로 18년째 아기가 태어나지 않고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퇴폐와 폭력으로 대다수 국가의 치안이 붕괴됐다. 영국에서는 불안하게나마 질서가 유지되고 있지만,이 곳 역시 절망의 분위기가 만연하다. 불임이라는 ‘심판’ 앞에 회개할 것을 외치는 광신적 집단들이 횡행하고 고통 없는 죽음을 가져다주는 자살용 독약이 공중파에서 광고되고 있다.

작중에서 영국의 이민자 문제는 심각하다. 불임으로 혼돈에 빠진 세계 각지에서 그나마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영국으로 이민자가 끊임없이 들어온다. 영국 정부는 이민을 불법으로 규정한다. 수시로 검문검색을 해 이민자를 색출해 중세시대 게토를 연상시키는 강제거주구역으로 보낸다. 이 과정에서 이민자의 인권은 없다. 폭언, 폭력은 물론이고 값나가는 물건을 갈취하기도 한다. 경찰의 눈에 난 이민자가 사살되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정부의 이민자 탄압에 대항해 이민자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피쉬’과 같은 무장단체도등장한다. 이들은 도심 폭탄테러도 주저하지 않는다. 강제거주구역 입구의 철창 사이에서는 “영국 정부는 당신을 지지합니다. 테러에 동조하지 마십시오”라는, 지독히 아이러니한 방송이 나온다. 이민자 탄압과 이에 맞선 테러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시계태엽 오렌지’, ‘1984’, ‘브라질’로부터 ‘브이 포 벤데타’까지, 우리는 미래 사회가 극우적인 정권에 지배되는 시나리오에 너무 익숙하다. 그러나 과거 이민자에게 관용적이었던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에서조차 치안 악화, 일자리 부족 등으로 인해 반 이민 정서가 만연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작품이 그리는 미래를 단순한 클리셰로 여길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도 정부가 다문화가정 지원 정책을 펼치지만 복지 예산 부족과 실업 문제가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작중의 디테일한 탄압 장면은 용산 참사와 같은 사건들을 연상시키며, 소수자에 대한 엥톨레랑스가 현실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음을 일깨운다

사진1.jpg

 

소시민이 된 운동가

주인공 테오는과거 반정부 시위를 하던 운동가였으나 아들이 죽은 후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마지막으로 태어난 아이’디에고가 사망했다는 뉴스 속보에 절망하는 대중들을 조소하지만 그 또한 삶에 별다른 희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회사를 조퇴하고 유일한 친구인 늙은 히피 재스퍼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인 듯하다. 재스퍼는 과거 유명한 시사 만화가였지만 현재는 아내와 함께 은둔한 채 안전가옥에서 대마초를 키우고 있다. 그의 아내도 과거에는 이라크전의 참상을 고발하기도 했던 사진기자였으나 지금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폐인이다. 영국의 정보기관인 MI5의 고문 후유증임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재스퍼와의 대화에서 테오는 “불임이 치료된다 해도 너무 늦었다. 전 사회가 썩어있다. 불임 사태 이전부터 이미 다 늦었다”고 말한다. 운동가 시절의 문제의식은 그대로지만 변화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피쉬단의 리더인 전처 줄리안 앞에서 근래의 폭탄 테러를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정치엔 관심 없다. 20년 전 얘기지. 이젠 돈을 좀 벌거든.”

테오와 재스퍼의 냉소주의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어쩐지 이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386세대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2.jpg

다시 일상을 떠나

불법 체류자 소녀 키(Kee)와의 만남으로 테오의 안일한 일상이 깨진다. 키는 임신 중이다. 18년째 아기가 태어나지 않던 세계에서 키의 임신은 기적이며, 그녀의 이름이 상징하듯 희망의 문을 열 ‘열쇠’이다. 키의 임신 사실은 키 본인과 피쉬단 간부들만 알고 있다. 테오는줄리안에게서 금전을 대가로 키의 여권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받는다. 이민자인 키가 정부의 손에 넘어가면 아기를 빼앗기고, 그 아기는 정부의 선전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줄리안은 키를 불임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단체인 ‘휴먼 프로젝트’로 보내 인류의 희망이 되게 하려 한다. 그러나 다른 피쉬단 간부들의 생각은 줄리안과 다르다. 그들 역시 아기를 자신들의 정치적 선전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 때문에루크는줄리안을 갱단의 습격을 가장해 살해하고, 새 리더가 된다.이어서 그는테오를 살해하고 키를 잡아두려 한다.

테오는 자신에게 의지하려는 키를 두고 차마 혼자 떠나지 못한다. 그는 아기가 정부나 피쉬단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결국 테오는 키를 데리고 피쉬단을 탈출한다. 왕년의 투사는 정부와 피쉬단 양쪽에게 쫓기며 분투한다. 키가 휴먼 프로젝트의 의료선 ‘내일’호에 도착할 수 있도록. 테오를 움직이는 동인은 정부에 대한 냉소주의도, 전처 줄리안을 살해한 피쉬단에 대한 적개심도 아니다. 아기와 산모를 위한 휴머니즘이 현실에 좌절한 운동가를 다시 일어서게 한다.그가 현실의 절망을 잊기 위해 늘 가지고 다니던 술은 새 생명의 탄생을 돕기 위해 그의 손을 씻는 소독약이 된다.

 

사진3.jpg

사람의 아들이 아닌, 인류의 아이

작품에는 기독교적 상징이 여럿 드러난다. 제목인 ‘칠드런오브 맨(Children of men)’은 기독교에서 예수를 지칭하는 표현인 ‘사람의 아들(Son of man)’을 연상시킨다. ‘칠드런오브 맨’은 작품에 나오는 유일한 아이인 키의 딸을 가리키는 듯하다. 예수가 로마에서 천대받던 유대인이었다면 아기는 영국에서 천대받는 이민자의 자식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마구간에서 낳았듯, 키는 이민자 강제거주구역의 슬럼가에서 아기를 낳는다.또한 유일한 보호자로서 키의 출산을 돕는테오에게는 수를 친아들처럼 아꼈던 요셉의 이미지가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 아닌 ‘인류의 아이(Children of men)’이다. 정부와 피쉬단 모두 아기를 자신의 ‘아들’로 삼고 싶어 한다. 정부는 절망에 빠진 대중들을 위한 선전수단으로 아기를 이용하고자 했다. 이에 맞서는 피쉬단은 이민자의 아이라는 아기의 신분을 이용해 이민자 사회의 결속을 다지고 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기치로써 아기를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테오는 말한다. “아들이 아니라 딸이야, 루크.” 저마다 아기를 가로채려고 하지만 정작 아기의 성별조차 모를 정도로 무관심하다.

유색인종 불법 이민자 미혼모의 딸.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인 아기는 역설적이게도 인류 최고의 희망이자 구원의 아이콘이다. 영국군과 피쉬단의 충돌로 전쟁터가 된 이민자 강제거주구역에서 아기는 공포로 절망하던 이민자들에게 일어날 힘을 주고, 정규군이 총을 내리도록 한다. 미래를 물려 줄 세대가 있다는 것, 이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잊어온 미래에 대한 희망과 책임의식을 상기시킨다. 그렇기에 이 아기는 한 ‘사람(man)’이 아닌 ‘인류(men)’의 아이다. 미래는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닌 모두의 권리이자 의무이며 미래를 살아갈 아기 자신의 것이다.

 

사진4.jpg

2013년, 서울.

영화는 곳곳에서 2013년 대한민국을 돌아보게 한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미래가 없는 사회라는 설정은 저성장, 저출산의 늪에 빠져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멸망을 향해 가는 사회에서 정부와 피쉬단으로상징되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소외된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세력이 대립한다. 과거의 운동권인 테오는 변화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처음엔 생계를 꾸려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고, 생계가 어느 정도 안정된 지금은 과거의 문제의식이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시민을 기만하는 정부와 시민들의 안전을 담보로 정부를 위협하는 피쉬단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품은 키의 기적적 임신이라는 형태로 희망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이 영화만큼 극단적이지 않은 만큼,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 또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주어지지 않는다. 테오의 절망은 깊었지만 희망이 나타났을 때 그가 해야 할 행동은 명백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휴먼 드라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스럽지만 얼마간 만족스러운 현실에서 무엇이 해결책인지도 감을 잡기 어렵다. 해결책 자체가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기만 하다. 영화는 극장 안에서 제한된 플롯에 의해 결말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극장 밖에서도 이어진다. 영화가 그리지 못한 부분을 채우는 것은 관객의 몫일 것이다. 

사진5.jpg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시흥캠퍼스, 나와는 상관없으니까.”

Next Post

[르포] 반도체 노동권을 향해 ‘함께’ 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