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반도체 노동권을 향해 ‘함께’ 달리다

▲지난 8월 20일 울산지역 선전전 모습.짧은 시간동안 많은 시민들이 탄원서에 서명했다.서울시 동작구 사당동에 위치한 한 주택.이곳 1층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한국노동보건안전연구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일하고 있는 김록호 박사가 자신이 과거 운영하던 ‘사당의원’ 자리를 이들 단체에게 무상임대로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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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0일 울산지역 선전전 모습. 짧은 시간동안 많은 시민들이 탄원서에 서명했다.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에 위치한 한 주택. 이곳 1층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한국노동보건안전연구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일하고 있는 김록호 박사가 자신이 과거 운영하던 ‘사당의원’ 자리를 이들 단체에게 무상임대로 내줬다. 사무실 마당 이곳저곳에는 선전전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피켓과 반도체 칩 모형 등이 있었다. 이곳 반올림 사무실은 정부나 기업의 지원은 꺼리나 방문자들이 사온 아이스크림 지원은 환영한다.

반올림이 조직되기까지

 2007년 11월 20일 반올림의 전신인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 기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발족됐다. 공동대책위원회는 황유미 씨 사건으로 시작됐다. 황유미 씨는 속초 상고 3학년에 재학 중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취직했다. 황 씨는 삼성반도체 오퍼레이터(작업자)로 근무하다 1년 반 만에 백혈병에 걸리게 된다. 황 씨는 한차례의 골수이식에도 불구하고 2007년 3월 6일 병원에 갔다가 속초로 돌아가는 길에 택시기사였던 아버지의 택시 안에서 사망한다. 그런데 황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딸이 투병 중일 때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황유미 씨와 같은 라인에서 2인 1조로 근무했던 이숙영 씨도 백혈병에 걸려 한 달 만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황상기 씨는 딸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물었다. 딸은 화학약품에 반도체를 담구는 일을 했다고 했다. 황상기 씨는 딸이 사망하자 그 화학물질 때문에 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하고 언론, 정당 사무실 등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만난 기자를 통해 같이 싸워줄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고, 이에 기자는 수원의 다산인권센터를 소개해줬다.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박진 씨와 민주노총 경기법률원의 이종란 노무사는 황상기 씨의 호소를 듣고 혼자서 싸울게 아니라 함께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노동건강권 관련 단체들을 모았고, 19개 단체가 모였다. 이로써 공동대책위원회가 발족된 것이다. 각 단체의 연대체로 출발했던 공동대책위원회는 점차 늘어나는 제보자 수에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상임활동가를 두기로 했다. 이종란 노무사가 상임활동을 맡게 됐고, 삼성반도체에만 국한 돼있던 이름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으로 바꿔 활동반경을 더 넓혔다.

 현재는 독립된 단체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유관 단체들의 모임으로서의 성격도 갖는 형태로 발전했다. 그 사이에 상임활동가도 두 명이 늘었다. 제보가 늘면서 기존에 정기적으로 했던 선전전 활동은 줄어들었다. 대신 여름기간에 집중적으로 여러 실천 행동에 나서는 ‘반달(반도체 노동권을 향해 달리다)’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반도체 노동권을 향해 달리다

 7월 23일 오전 11시 반달 공동행동 첫째 날에는 삼성반도체·LCD 노동자 10명의 집단 산재 신청이 있었다. 산재 신청에 앞서 장맛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에는 직업병 피해자 중 한 명인 박민숙 씨가 나와 발언을 했다. 박민숙 씨는 함께 근무했던 故이숙영 씨에 대한 기억을 얘기하며 메어가는 목소리로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죽은 현실에 마음이 너무 아파 이런 자리에 나와 발언하기 힘들다”고 했다. 반올림에서 비상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공유정옥 산업의학 전문의는 “이제 불과 30대 후반의 나이에 옛 동료를 기억하는데 병명과 생사여부로 기억해야겠느냐”며 “오늘로써 산재 신청자가 39명이 되는데, 더 많이 죽고 병들어서 더 많이 산재 신청하면 그 때서야 들어줄것인가”라고 호소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반올림과 피해자 가족들은 근로복지공단으로 들어가 산재 신청서류를 접수했다.

 반올림의 시작부터 함께해온 이종란 노무사는 반올림에서 산재 신청 서류를 작성하고 산재 신청자를 상담 하는등의 일을 한다. 이 씨는 대학 새내기 시절 전두환, 노태우 공소시효 만료에 대한 얘기를 듣고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다녀온 뒤부터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세상의 반쪽이 궁금해졌다고 한다. 그렇게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때, 이 씨는 “친구가 소개해준 노무사라는 직업에 ‘뿅’가서” 그 일을 하기로 했다. 금전을 바라고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배 쫄쫄 굶으면서’ 활동 할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 먼저 합격했던 선배가 민주노총 노동법률지원센터에서 자원활동을 하라는 얘기에 시작한 자원활동이 지금으로 이어졌다. 취재하는 동안 밤낮이나 휴일을 가릴 것 없이 사무실에 나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7월 23일 오후 6시 30분 대한문 앞에선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 2005년 사망한 황민웅 씨에 대한 추모제가 있었다. 추모제 시작에 앞서 시민들에게 반올림 활동을 홍보하고 진행 중인 소송에 대해 재판장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받았다. 반올림에서는 이런 활동을 ‘선전전’이라 부르는데 이날 선전전에는 한의대, 의대, 간호대 학생들로 구성된 보건의료 학생모임 ‘매듭’의 학생들이 함께했다. 언론을 통해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에 대해 알고 있다는 여러 시민들이 다가와 서명했다. 민중가수 지민주 씨가 故황유미 씨 추목곡인 ‘하얀방-나를 잊지 마세요’를 부르면서 추모제가 시작됐다. 故황민웅 씨의 아내이자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한 적 있는 정애정 씨는 전날 편지를 준비해달란 말에 컴퓨터 앞에 2시간 넘게 앉아만 있다가 완성하지 못했다면서 준비한 편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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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황민웅 씨의 추모제. 아내 정애정 씨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다.

 “짧은 인생 동안 큰 욕심 바라지 않고 살아왔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큰 욕심을 자주부리고 있어요. 하느님 제발 애들 아빠 좀 살려주세요. 아니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것도 큰 욕심이라면 한 번만 아이들과 아빠를 만나게 해주세요.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해보지만 그래도 틈틈이 기도를 합니다. 얼마 전 아이들과 약속했습니다. 엄마 열심히 싸워서, 이겨서, 집에서 우리 가족끼리 아빠 기일을 보내자고. 저는 아이들에게 꼭 그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추모제와 삼성 규탄집회가 진행되는 한편에서 반올림 권영은 활동가는 사진을 찍었다. 반올림의 홍보와 회계를 맡고 있는 권영은 활동가는 다음날 이 사진들과 함께 추모제 소식을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을 통해 전했다. 홍보를 통해 더 많은 제보를 받을 수 있고, 제보가 늘어날수록 산재 인정에 도움이 된다. 또 홍보를 통해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반올림 활동에서 홍보는 중요한 일이다. 권영은 활동가는 반올림 활동을 하고자 처음 인사하러 온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은 故황유미 씨의 기일이었는데,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던 때에 권 씨 자신도 아버지랑 통화를 하고 있었다. 권 씨는 “황상기 씨의 편지 낭독과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그 때 권 씨의 아버지는 권 씨에게 ‘떳떳한 일을 하라’고 했다.

 8월 7일 금속노조 4층 회의실에서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자운동연구소, 국제민주연대, 전국금속노동조합, 반올림 공동 주최로 ‘삼성전자 사례로 본 전자산업 하청노동권의 실태’라는 토론회가 열렸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원이자 반올림 비상임활동가인 공유정옥 씨는 QTS와 같은 삼성반도체 납품업체 등의 노동 실태에 대해 구체적 예를 들며 이야기했다. 이어 국제민주연대 나현필 씨는 아시아 지역으로 넓혀 아시아 지역의 삼성 공장 사례를 들었다. 나 씨는 삼성 중국 공장에서 아동노동을 시켰다는 제보를 소개하고 인도네시아의 삼성 노조운동을 소개했다. 토론회를 주최한 이유에 대해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는 “반도체·전자산업은 노동자들이 조직 돼있지 않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반도체 산업만 협소하게 볼 것이 아니라 반도체·전자산업 전체로 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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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7일 반올림은 ‘삼성전자 사례로 본 전자산업 하청노동권의 실태’ 토론회를 열었다.

 8월 13일 오후 2시 30분 서울행정법원 B219호에서는 삼성반도체 온양 공장에서 일하다 지난해 난소암으로 사망한 故이은주 씨의 유족급여신청 첫 공판이 있었다. 이날 변호는 반올림 임자운 변호사가 맡았다. 재판장은 공판에 앞서 이 재판과 비슷한 하이닉스 직업병 문제도 다루고 있다며 이 사건을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했다. 임자운 변호사는 변론에서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학조사에서 난소암은 석면, 탈크, 방사선 등과 관련 있는데 이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불승인했다”며 “세 가지라 보는 기준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망인은 1급 발암물질이 포함된 에폭시 수지를 사용했다”며 사실조회 신청을 하고 산업의학전문의의 진료기록감정을 요구했다. 첫 공판은 5분 정도로 짧게 진행됐다.

 이날 변호를 맡은 임자운 변호사는 올해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곧바로 3월부터 반올림 상임활동을 시작했다. 임 씨는 반올림에서 소송업무를 맡고 있다. 임 씨는 사법연수원 42기 동기들이 만든 공익인권활동 지원 펀드인 ‘낭만 펀드’로부터 월급을 받는 조금은 독특한 변호사이다. 변호사가 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공익 활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임 씨는 “저는 지금 그 고생한 시간을 보상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돈을 주고 있지 않나?”고 반문했다. 임씨는 “변호사 자격증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최소한 먹고 사는데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그런 자격증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근로복지공단과의 소송에 보조 참가하는 소위 ‘경험 있는’ 삼성 측 변호사들에 맞서는 게 걱정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임 씨는 “걱정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차츰 나아지고 있다”며 “기술면에서 많이 부족할지는 몰라도 반도체 산업과 그 근로자들이 처한 상황, 건강문제는 우리 활동가들이 제일 잘 알지 않겠나”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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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3일에 있었던 ‘전자산업 여성노동자 건강권 모임’ 5차 회의.

 8월 13일 오후 6시 사당동 반올림 사무실에서 ‘전자산업 여성노동자 건강권 모임’이 열렸다. 반도체 산업 생산직은 대다수가 여성이기도 하고 생리불순이나 유산 등 생식독성을 일으키는 화학물질들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밝히기 꺼려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피해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전자산업 여성노동자 건강권 모임’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했다. 반올림과 여성주의 운동 단체, 학생, 직업환경의학과 의사 등으로 구성된 모임은 이날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실태에 대해 토론하고 직업병 피해 여성들의 인터뷰를 모으기 위한 준비 회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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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0일 울산지역 선전전 모습. 많은 시민들이 호응해주었다

 8월 20일은 반올림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단체들과 연대하고 반도체 관련 산업이 있는 도시에 가서 선전전을 하는 ‘지역선전의 날’이었다. 이미 전날 부산에서 선전전을 마치고 온 반올림 활동가들을 울산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날 선전전은 울산 젊음의 거리에서 이뤄졌다. 지역 활동가들도 함께 반올림 활동을 홍보하는 안내문을 나눠주고, 탄원서를 받았다. 행서는 4시부터 한 시간 정도 진행됐는데 짧은 시간 동안 130여 장이 넘는 탄원서를 모을 수 있었다. 반올림 활동가들은 “울산은 노동권에 대한 의식이 남다른 것 같다”며 울산시민들을 치켜세웠다. 짧은 선전전을 끝마치고 서울에 도착하니 시간은 자정을 막 넘기고 있었다.

 

 8월 23일 서울행정법원에서 이윤성 씨의 재판이 있었다. 이날 재판은 반올림이 다루고 있던 사건들 중 절반의 승소로 끝난 황유미 씨, 이숙영 씨 선고 이후 두 번째로 있었던 선고였다. 선고가 한 차례 연기된바 있어 반올림 활동가들은 더 긴장돼보였다. 시간이 되자 재판장은 그날 있는 선고들을 읽어 내려갔다. 결과는 기각이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임자운 변호사는 재판장 에게 재차 결과를 물었다. 재판장을 나온 반올림 활동가들과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법원 구내식당에 둘러앉아있을 때 이종란 노무사는 뒤로 돌아 눈물을 훔쳤다. 이윤성 씨는 루게릭병에 걸려 현재 눈동자 밖에 못 움직이는 상황이라 재판에 올 수 없었다. 선고 전 이 씨는 반올림 활동가들에게 눈동자를 인식하는 자판을 통해 “혹시 지더라도 끝까지 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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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선전을 떠나기 전 지역선전 예산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임자운 변호사, 이종란 노무사, 권영은 활동가.

반도체·전자산업 노동자들이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반올림이 결성된 지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법정 투쟁에서 이긴 적도 있고, 소송까지 가지 않고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를 인정받은 결과도 있었다. 관련한 규정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고 개선하려는 움직임들도 포착되고 있다. 하지만 신청자 대비 산재 승인율이 여전히 낮다는 점과 산재 입증책임 전환의 문제, 더 나아가 전자산업 전반의 노동권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반올림 활동 6년의 소감에 대해 이종란 노무사는 “사람 이 죽는 문제인데 어쩜 이렇게 세상이 단단한 벽 같을까. 절망까지는 아닌데 때로는 자괴감도 느꼈다”며 “그래도 항상 힘든 건 아니고, 힘들더라도 감동도 있고 보람도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반올림의 활동은 피해자와 피해자가족들에겐 큰 도움이 됐다. 황상기 씨는 “반올림 사람들과 피해자 가족들이 같이 했기 때문에 그만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나 혼자 싸워서는 그만한 성과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으로 지난해 사망한 이윤정 씨의 남편 정희수 씨는 “피해자들이 모이고 모여서 또 하나의 힘이 됐고, 시민단체가 모이고 모여서 더 큰 힘이 됐다”며 “반올림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개개인이 나설 수 있었겠나”고 얘기했다.

 반올림을 취재하는 동안 기자가 반올림과 함께 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말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활동가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말이었다. 권영은 활동가는 “상임활동가로 일하러 오기 전 반올림에 인사드리러 왔다가 뒤풀이에 갔었는데 끝나고 집에 오니까 너무 좋았다. 그래서 빨리 만나고 싶고, 빨리 일하고 싶었다”라며 반올림 사람들의 첫인상을 회상했다.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도 그렇고 우리 활동가들이 특별히 좋은 사람들이 뭉친 것 같다”며 반올림 자랑을 늘어놓던 이종란 노무사. 이 노무사의 말처럼 반올림에는 ‘어디’에선 나지 않는 ‘사람 냄새’가 있어 길고긴 싸움을 계속해나갈 수 있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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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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