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된다. 운동하는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목소리와 호흡이 들린다. 하지만 카메라는 하늘을 향해 있다. 짙은 에메랄드빛의 하늘과 낡은 가로등이 보인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마침내 나트륨 가로등의 노란 불빛만이 남는다. 영화는 다시 시작된다. 1999년 4월 20일,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열두 명의 학생과 교사 한 명이 죽었고, 스물세 명이 부상당했다. 사건을 일으킨 두 사람은 총구를 스스로에게 겨누어 자살했다. ‘엘리펀트’는 사건이 발생하고 4년이 지난 뒤 사건을 다시 그린다. 영화는 총기 난사 사건을 재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엘리펀트’의 러닝타임은 81분이지만 총기난사 사건은 영화가 끝나기 전 16분 동안에만 등장한다. 전체 러닝타임에서 16분을 제외한 65분 동안 영화가 조명하는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의 범인과 목격자와 희생자들이다.
인물들을 뒤따르는 카메라
카메라는 인물들을 따라간다. 존은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고민한다. 존의 아버지는 존을 학교까지 태워주려 하지만 술에 취한 존의 아버지는 주차된 차의 백미러를 깨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을 칠 뻔 한다. 결국 존은 아버지와 자리를 바꿔 직접 차를 운전해 등교한다. 아카디아는 아버지 때문에 슬퍼하는 존을 위로하고, 동성애와 이성애에 관한 토론에 참여한다. 일라이어스는 포트폴리오에 담을 인물 사진을 찍으러 다닌다. 한 커플과 존이 카메라에 담긴다. 일라이어스는 찍은 사진들을 암실에서 인화한다.

네이선은 캐리에게 각자 친구들을 불러 오후에 놀러 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캐리는 몇 주 전에 갔던 캠핑에서 네이선의 친구들이 자신의 친구들에게 한 짓궂은 장난 때문에 망설인다. 미셸은 모두가 반바지를 입는 체육 수업에서 몸매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반바지를 입지 않는다. 미셸은 체육 수업에서도 어울려 운동하기보다는 혼자 하늘을 쳐다보곤 하는 등의 독특한 행동을 해 따돌림 당한다. 미셸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운동장에서 네이선과 베니는 미식축구를 한다. 단짝친구 사이인 브리타니와 조던, 니콜은 미식축구를 하는 잘생긴 네이선에 대한 잡담을 나누고, 남자친구 때문에 서로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서운함을 토로한다. 그들은 학교 식당의 음식을 불평하면서 다이어트를 위해 먹은 음식을 토하기도 한다.
긴 복도나 운동장을 걸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담은 카메라는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는 지점을 향해간다. 인물을 뒤따르는 카메라는 그 인물의 소소한 일상을 담아내다가 사건이 발생하는 시점에 이른다. 이런 방식으로 카메라는 총기를 난사한 두 범인과 목격자와 희생자 열 명의 사건 발생 이전 모습을 담는다.

▲일라이어스는 존의 사진을 찍고, 그 옆으로 미셸이 지나간다. 이 모습은 일라이어스를 뒤따르는 카메라, 존을 뒤따르는 카메라, 미셸을 뒤따르는 카메라에 의해 각각의 시점에서 세 번 반복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열반경>에는 ‘맹인모상’(盲人摸象)의 이야기가 나온다. 왕의 명령으로 맹인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자신이 생각한 코끼리의 모습을 묘사한다. 맹인은 코끼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맹인 각각이 말한 코끼리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는 늘 부족하거나 실제와 어긋난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이야기는 일종의 우화다. 우화는 그것을 읽는 사람을 건드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어떤 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느냐 혹은 이해할 수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코끼리를 만지는 맹인이 된다. 한 인간이 어떤 것을 총체적이고 완벽하게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충격 속에서 전문가들은 사건의 원인을 분석하려 했다. 사건의 범인인 두 사람에 대해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가 제출됐다. 이 같은 사건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믿음 속에서 저마다 나름의 결론을 제시했다. 학교에서의 따돌림으로 인한 소외, 맞벌이하는 중산층 가정의 부모 부재, 과격한 헤비메탈 음악,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과 영화, 나치즘을 다룬 다큐멘터리, 범인들의 사이코패스 기질과 우울증, 허술한 총기규제, 언론을 통해 확산되는 타자에 대한 불안과 공포, 적대 등이 사건의 원인으로 지적됐다. 제각각의 결론에서 제시된 이 같은 사건의 원인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건의 원인이 복합적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코끼리를 만지고 난 뒤 맹인 개개인이 말하는 정보는 부분적이고 피상적이다. 하지만 이 불완전한 개개의 묘사들을 종합해 코끼리에 가까운 상을 그려낼 수 있다.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이해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다. 범인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여러 가지 원인들도 도출됐다. 이를 통해 각기 다른 원인이 제시됐다는 사실은 사건의 원인 파악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각각의 원인은 그것만으로는 놓치기 쉬운 부분을 보완하고 타당성이 떨어지는 원인을 배제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사건을 발생시킨 복합적인 실체에 다가간다. 이런 과정은 코끼리에 대한 맹인의 묘사가 다른 묘사와 보완되는 과정을 거쳐 코끼리에 가까운 상을 그리는 데에까지 나아가는 역설을 보여준다.
‘엘리펀트’가 시도하고 있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의 재구성은 어떤 의미에서 코끼리의 상을 그리는 시도일 수 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사건에 연루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들 각각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봄으로써 사건이 지닌 다양한 양상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엘리펀트’는 사건의 범인과 목격자와 희생자를 뒤따라감으로써 사건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영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건이 발생하기 전의 시간까지 담아냄으로써 사건의 의미를 포착한다.
카메라가 인물들을 담는 모습에서 존, 아카디아, 일라이어스, 네이선, 캐리, 미셸, 베니, 브리타니, 조던, 니콜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고민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게 된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 뒤 이들이 사건의 목격자 혹은 희생자가 됨으로써 그 고민과 기대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지점에서 사건의 끔찍함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체험된다. 그리고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은 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거실의 코끼리
‘엘리펀트’에서 사건의 범인인 에릭과 알렉스를 뒤따라가는 방식은 존, 아카디아, 일라이어스, 네이선, 캐리, 미셸, 베니, 브리타니, 조던, 니콜을 뒤따라가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카메라는 다른 인물들을 담는 것처럼 에릭과 알렉스를 따라가며 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알렉스는 교실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학교 식당에서 범행 계획을 구체화하던 중 이명으로 괴로워한다. 알렉스는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총기 판매 사이트에 들어가 총기를 구입한다. 그들의 부모님은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가족이 떠난 집에서 에릭과 알렉스는 나치 집권기의 독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중에 총기는 택배로 배달된다. 둘은 창고의 나무장작에 대고 사격 연습을 한다.

▲알렉스는 나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다. 에릭이 무얼 보냐고 묻자 알렉스는 자기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창밖에는 택배차가 도착한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총기가 배송된다.
에릭과 알렉스에 관한 장면들은 저마다 사건의 원인이 될 법한 모습들을 담고 있다. 카메라는 이런 모습을 담으면서도 사건의 원인이 될 법한 총기나 나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클로즈업하지 않는다. 영화는 거리를 유지하며 사건 이전의 모습들을 담아낼 뿐이다. ‘엘리펀트’에서 단 한 번, 카메라가 인물을 뒤따라가거나 고정된 채 인물을 바라보는 수동성에서 벗어나 직접 움직이는 때가 있다. 줄곧 알렉스를 뒤따르던 카메라는 알렉스의 방에 들어가서는 알렉스의 방 이곳저곳을 비춘다. 반지하에 위치한 방은 잡동사니로 가득하고 놀러온 에릭은 게임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반복해서 죽이고 있다. 벽에는 그림들이 여러 장 붙어있다. 그 그림 중의 하나가 코끼리 그림이다.
‘맹인모상’외에도 코끼리 우화가 하나 더 있다. 서양의 ‘거실의 코끼리 이야기’다. 어느 날 코끼리가 거실에 들어오는데, 집주인은 코끼리를 바깥으로 내보낼 마땅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코끼리를 내버려둔다. 코끼리는 한동안 가만히 있어서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갑자기 코끼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일이 벌어진 뒤에야 후회가 찾아온다.
이 ‘거실의 코끼리 이야기’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조치를 취하라는 교훈을 담은 우화다. 그러나 ‘엘리펀트’의 카메라가 지나치듯이 담는 학교에서의 따돌림,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총기류, 맞벌이로 인한 부모님의 부재, 폭력적인 게임, TV로 방영되는 나치에 관한 다큐멘터리 중 그 어느 것도 명확하게 사건의 원인으로 꼽을 수 없다.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이 느슨한 연관성 속에서 사건의 원인으로 취급될 수 있다. 영화는 어떤 것도 사건의 원인으로 지적하지 않는다. 거실의 코끼리 우화가 주는 교훈처럼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조치를 취했다면 이 같은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해 ‘엘리펀트’는 답을 주지 않는다. ‘엘리펀트’가 보여주는 것에 따르면 어떤 것도 원인이 아니며, 모든 것도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한 ‘엘리펀트’의 자세
‘엘리펀트’는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을 법한 모습들을 지나가듯 담으면서도 어떤 것을 특정해서 사건의 원인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는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또 다른 영화인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과 ‘엘리펀트’의 차이점이다. ‘볼링 포 콜럼바인’은 언론 의해 조장되는 타자에 대한 적대와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총기가 결합해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에서 사용된 총알은 K마트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마이클 무어는 사건의 피해학생들과 K마트에 항의 방문을 한다. K마트는 결국 총알 판매를 중지하겠다고 발표한다.
반면 ‘엘리펀트’는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일상을 담아내며 사건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인물들의 일상적인 고민과 기대 같은 것을 사라져버리게 하는 사건의 끔찍함이 드러나 사건이 주는 충격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충격은 사건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엘리펀트’는 사건을 재연할 뿐 ‘볼링 포 콜럼바인’처럼 사건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건이 주는 충격이 큼에도 사건에 대한 설명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판단과 분석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관객은 사건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