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예술로 세상의 변화를 꿈꾸다

▲노동예술단 선언 박현욱 씨 ⓒ최서현 촬영기자 지난 달 22일 새누리당사 근처인 용산빌딩 앞에서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의 집회가 열렸다.노동자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근무조건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올해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7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가 근무 도중 사망했다.“더 이상 노동자들의 죽음을 외면하지 말라!”.연단에 선 노조원이 외쳤다.5월의 아스팔트는 위는 더웠다.경찰들은 그 옆에 서 집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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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예술단 선언 박현욱 씨 

ⓒ최서현 촬영기자

  지난 달 22일 새누리당사 근처인 용산빌딩 앞에서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의 집회가 열렸다. 노동자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근무조건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올해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7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가 근무 도중 사망했다. “더 이상 노동자들의 죽음을 외면하지 말라!”. 연단에 선 노조원이 외쳤다. 5월의 아스팔트는 위는 더웠다. 경찰들은 그 옆에 서 집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더위와 감시에 점차 지쳐갔다. 그때 씩씩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졌다. “우리의 힘을 보여줍시다”라는 외침엔 힘이 실려 있었다. 강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노동음악에 맞춰 다른 두 명의 활동가와 강렬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집회의 분위기가 변했다. 노동자들은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박수를 쳤다. 꺾였던 사기가 되살아났다. 시원한 목소리와 강렬한 춤의 주인공은 ‘노동예술단선언’의 활동가, 박현욱 씨였다.

철거 현장에서 시작된 노동운동가의 길

박현욱 씨는 ‘노동예술단선언’에서 활동 중인 노동운동가다. 노동예술단선언은 현 자본주의 체제에 문제를 제기하는 활동가의 모임으로, 노래를 담당하는 ‘노래선언’과 춤을 담당하는 ‘몸짓선언’이 결합된 단체다. 그는 이 단체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예술을 만들고 있다. 강연하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박현욱 씨가 어릴 적부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그는 ‘노동’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학교 1학년 때 겪은 경험은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92년도에 대학에 입학한 그는 학보사에서 수습기자로 활동했다. 선배 기자들은 그에게 학내에 붙은 대자보를 베끼는 일을 시켰다. 그는 손으로 자보를 베껴 선배 기자들에게 그 내용을 보고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내에 ‘긴급’이라 쓰인 대자보가 붙었다. 한 무허가 판자촌이 철거지역으로 지정돼 용역이 밀려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대자보는 용역에 맞서 마을 사람들을 도울 학생들을 다급하게 구하고 있었다. 그는 대자보를 붙인 총학생회에 찾아가 자신도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생회는 그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았다. ‘현장을 겪어보지 않아 위험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위험한 현장’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호기심과 오기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끈질긴 요청에 선배들은 결국 참여를 허락했다. ‘2학년 선배를 놓치지 않고 따라다녀야 하고 돌발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철거 현장은 폐허에 가까웠다. 그는 마을에 대한 첫인상을 ‘전쟁터’로 기억하고 있었다. 집들은 모두 허물어져 구멍이 난 벽들만 남아있었다. 아이들은 부서진 건물들 사이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남성 어른들은 보이지 않았다. 용역과 대치하던 과정에서 경찰서에 연행되거나 상처를 입어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할머니에 가까운 아주머니들이 자신보다 무거운 쇠파이프를 들고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도우러 온 학생들을 반겼다. 박현욱 씨는 그곳에서 그들과 밤을 새웠다. 밤새 그가 들었던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한 아주머니는 자신이 경찰서에서 당했던 물고문을 농담처럼 전했다. 경찰은 철거에 반대하다가 연행된 아주머니를 “철거에 응하라”며 윽박질렀고, 순순히 따르지 않자 물이 담긴 세숫대야에 그의 얼굴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박현욱 씨는 농으로 오가는 얘기에 “가슴이 아팠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돌아가기 위해 출발한 학생들은 한 무리의 용역들이 마을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구인 그들의 얼굴엔 취기가 가득했다. 걱정된 학생들은 다시 마을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학생들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학생들이 다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얼른 돌아가라”는 주민들의 초조한 외침에 학생들은 학교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돌아온 박현욱 씨는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렸다. 마을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 “억울하고 마음이 아팠다”는 그는 그들을 두고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그 일을 겪기 전 2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정의롭고 올바르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생각은 일거에 무너져버렸다. 이 경험은 박현욱 씨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됐다. 그는 판자촌에 다녀온 뒤 “세상을 알기 위해 공부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그는 당시 유행하던 맑시즘을 학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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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5월 27일 박현욱 씨는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에게 몸짓을 강연했다. ⓒ최서현 촬영기자

춤과 노래를 전하는 노동운동가

소위 ‘운동권’이 돼 노동운동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박현욱 씨에게도 망설임의 순간이 찾아왔다. 가정 형편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집에 보탬이 되기 위해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을 그만뒀다. “현 체제의 모순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직장 생활에 동의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의 신념대로 노동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춤과 노래에 소질이 있었다. 선배들은 노동운동에 필요한 예술을 심도 있게 고민하는 활동가가 필요하다며 그에게 노동예술을 권했다. 그렇게 그는 노동예술단선언에서 노동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노동예술단선언은 춤과 노래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비판한다. 집회 현장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공연은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된다. 이들은 또한 노동조합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노래패와 문화패 조직을 돕고 노동예술을 가르친다. 박현욱 씨는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자 계급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좋지만 노동자에겐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기에 노동예술단선언을 통해 노동문화를 전적으로 지원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까지도 전국의 집회현장을 방문해 강렬한 몸짓을 전한다. 또한 노동예술을 통해 노동자의 각성을 도우며 활동가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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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정말로 각성하길 바래?’는 박현욱 씨의 저서다. 노동예술가로서 겪은 그의 경험이 응축돼있다. ⓒ노사과연

노동운동 탄압에서 오는 고통의 순간

박현욱 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공권력과 사측의 무력은 일상적인 일”이라며 “자주 경험하기에 어려움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의 순간이 있었다. 구로디지털단지 노동자들의 투쟁 때였다. 부당한 해고에 대항해 단식투쟁을 결심한 구로디지털단지 노동자들은 공장 앞 경사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사측은 물을 흘려보내며 노동자들의 수면을 방해했고 설치한 천막을 매번 뜯어갔다. 단식을 40일 가까이 한 노동자들에게 불면에서 오는 피로와 뜨거운 볕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는 현장의 노동자들 옆에서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박현욱 씨는 “약자가 물리적으로 고통 받는 것이 현 사회구조의 당연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이를 바라보는 것은 감정적으로 매우 힘들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춤과 노래를 통한 노동예술에 회의를 느낀 적도 있었다. 2003년 현대자동차 하청 소속의 비정규직 노동자 송 씨는 사측에 월차휴가를 청구했다. 월차휴가는 법적으로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임에도 관리자는 “건방지게 비정규직 노동자가 월차휴가를 사용하려 한다”며 그를 폭행했다. 관리자는 폭행에서 그치지 않았다. 구타로 병원에 입원한 송 씨를 쫓아와 그의 아킬레스건을 식칼로 절단한 것이다. 박현욱 씨는 당일 저녁 전화기 너머로 그 소식을 들었다. 온 몸이 열로 달아올랐다. 그의 머릿속엔 노동자 사회에서 노래패와 몸짓패를 조직하는 것보다 차라리 결사대를 조직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비록 이 생각은 순간에 그쳤지만 그는 활동가로 활동하는 내내 고통받는 노동자들 지켜보며 감정적인 고통을 견뎌야 했다.

강렬한 춤 뒤에 숨겨진 어려움

자본가를 향한 노동자의 분노와 투쟁의 정신을 목소리와 몸으로 전하는 노동예술은 강렬하고 극단적인 몸짓을 요구한다. 따라서 노동예술단의 활동가에게 근골격계 질환은 피할 수 없는 병이다. 춤을 출 때 이를 악물고 온몸의 힘을 쏟아내는 박현욱 씨의 치아 상태는 좋지 않다. 노동자가 집회나 시위에서 노동예술단선언을 필요로 하는 경우 그는 계절과 장소, 시간에 상관없이 따라나선다. 여름날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격하고 극적인 춤을 출 땐 뜨거운 공기가 폐 속으로 급격하게 들어온다. 겨울엔 차가운 공기가 온몸 곳곳을 비집고 들어온다.

하지만 그에게 육체적인 어려움보다 힘든 것은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다. 노동예술단선언은 무대에서 춤과 노래를 통해 현장의 분위기를 살리고 노동자의 사기를 드높이는 역할을 한다. 몇 백일의 고공농성, 장기간의 투쟁으로 지친 파업, 여름 뙤약볕 속의 집회 모두 그가 문화선전대(문선대)로서 방문하는 곳이다. 심리적, 육체적으로 노동자 모두가 지친 상황에선 이들과 연대하는 노동예술단선언의 활동가들도 노동자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활동가가 그 감정에 젖어 힘든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문선대는 투쟁의 사기와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박현욱 씨는 “노동예술단선언이 뻗는 손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보이는 힘을 상징한다”며 “우리 활동가들은 어떤 순간에도 힘을 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는 투쟁 현장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노동자들에게 힘 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분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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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욱 씨 트위터

지옥 같은 세월도 이겨내는 그의 신념

박현욱 씨는 자신이 겪는 고통을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노동운동의 길은 버텨내기엔 너무나 지옥같다”며 “매 순간마다 ‘포기할 것인가 갈 것인가, 버틸 수 있는가 없는가’와 같은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엄동설한에 경찰과 사측에 천막을 빼앗기고, 길거리에서 비닐 한 장 덮고 자는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견디는 것도 하루 이틀”이라는 박현욱 씨의 얼굴엔 씁쓸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그의 길과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노동운동가로서 살아가는 삶은 ‘지옥’같지만 그에게서 힘을 얻는 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투쟁하는 동지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까지 활동할 것”이라는 그는 오늘도 공연을 위해 거리낌 없이 거리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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