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남다른 의지와 포부를 가지고 <서울대저널>의 수습기자로 들어왔다. 정기자로 두 학기 째 활동하며 다섯 호의 발간을 도왔다. 활동한 기간이 길어질수록 취재와 기사 작성 과정에서 겪은 일들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과거의 경험을 더듬어보면 첫 취재를 갔을 때가 떠오른다. 난 수습기자로서 받은 첫 과제를 위해 학내에서 교통정리를 담당하시는 분을 찾아갔다. 큰 버스들이 지나다니는 사차선 도로의 중앙선에서 홀로 교통을 정리하는 모습이 위험해보였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기사를 작성하고 싶었다. 인터뷰를 요청하면 좋아하실 것이라며 멋대로 상상했다. 하지만 필자가 ‘학내자치언론’을 언급하는 순간 그분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시더니 아무 말씀 없이 자리를 피하셨다. 문득 이전에 <서울대저널>과 인터뷰를 했던 차단기 노동자 한 분이 위로부터 호된 말을 들었다는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대학의 청소노동자에게 들었던 말은 지금까지도 속상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서울대 청소노동자에게 근무환경과 관련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본부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서울대 청소노동자와 비슷한 환경에서 근무하시는 타대의 청소노동자를 찾아갔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올 무렵, 다른 노동자 한 분이 나에게 어느 대학에 다니는지 물어보셨다. 다른 대학교에서 나와 인터뷰를 한다고 말씀드리자 “남의 집 일에 끼어드는 것은 범법 행위”라는 말을 들었다. 소수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작성하는 기사였지만 소수로부터 비난을 받은 것이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훔쳤다.
이번 호의 인터뷰는 유난히 힘든 기억으로 남았다. 기사를 통해 관악사의 입사절차를 알려달라는 학내의 요청에 따라 관악사 행정실과 단과대학, 중앙전산원을 돌아다녔다. 민감한 주제일 수 있기에 인터뷰를 요청하는 필자도, 답을 주시는 분들도 조심스러웠다. 서로의 질문과 답변을 오해해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왜 여기저기에 기숙사에 관련된 내용을 물어보고 다니느냐’는 느낌의 질문 아닌 질문도 받았다.
<서울대저널> 기자들은 때로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하나”라는 농담을 던지곤 한다. 기자들은 어떠한 물질적 대가를 받지 않고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 기사를 작성한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모두 상호검토의 과정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서울대저널>의 매 호는 각 기자의 학점과 공강시간, 수면과 건강을 먹고 자란 결실이다. 따라서 취재 과정에서 겪은 좋지 못한 기억은 하나의 상처로 남는다. 특히 인터뷰이가 인터뷰로 인해 부당한 일을 겪거나, 인터뷰이와 마찰을 겪을 때 내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속상함은 이내 더 좋은 기사를 작성하기 위한 원동력이 된다. 어떻게든 좋은 기사를 작성하겠다는 오기이기도 하다. 기사를 통해 인터뷰이를 억압하는 구조를 비판하기도 하고, 나를 비난한 인터뷰이를 도움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싶기 때문이다. 훌륭한 기사는 인터뷰 과정에서 빚었던 마찰에 대한 일종의 사과이기도 하다. 앞으로 <서울대저널>이 지속되는 한 많은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독자분들이 <서울대저널>을 구독해주실 것이라 믿는다. <서울대저널>의 기자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듯이 좋은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자신들의 밤낮을 할애할 것이다. 독자분들도, 그리고 인터뷰에 응해주시는 분들도 이러한 점을 알아주신다면 마감으로 밤을 지새우는 기자들에게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