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0일 수리과학부 소속 K교수가 성추행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K교수는 ‘서울세계수학자대회’ 준비 중 타 대학 소속의 한 인턴 여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K교수는 혐의를 대부분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서는 K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또 다른 피해자들의 제보가 속출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스누라이프’에는 K교수가 아닌 다른 교수에게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했다는 제보, 학생들 사이의 성폭력에 대한 게시 글도 잇따라 올라왔다.

▲K교수가 피해자 중 한 명에게 보냈다는 카카오톡 메시지. ⓒ한겨레
학교의 대응 – 인권센터 조사, K교수 사표 수리
본부는 언론 보도 이전 수사 기관의 통보로 해당 사실을 미리 인지했으나 보도 전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본부는 원래 수사 결과에 따라 징계위원회 소집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언론 보도 이후 사태가 확대되자 자연대에 K교수의 강의 중단을 논의하도록 요청했다. 현재 K교수의 강의는 중단됐으며 다른 교수들이 해당 강의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인권센터는 11월 14일경 해당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사는 11월 11일 저녁 인권센터에 진정이 들어온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인권센터는 당사자들에 대한 비밀 유지를 철저히 해 조사심의위원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확한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비밀 유지를 위해 밝힐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K교수가 사표를 제출하면서 상황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학교는 26일 K교수가 사표를 제출했으며, 이를 수리해 면직 처리하기로 결정했다고 27일 오전에 발표했다. 정식 징계 절차를 거쳐 파면이나 해임의 중징계가 내려지면 각각 퇴직금과 연금의 반액 혹은 2/3만 받을 수 있으며 다른 학교 교원으로 지원할 시 5년 혹은 3년의 재임용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면직의 경우 퇴직금과 연금을 전액 지급받고, 재임용 제한도 받지 않아 다른 대학의 교원으로 임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다만 전직 교원이 교원으로 재직 중 저지른 일로 인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을 경우 퇴직금과 연금 감액, 재임용 제한이 적용된다는 규정이 있다. 따라서 검찰 수사와 법원 판단에 따라 K교수에 대한 처분이 갈릴 전망이다. 피해자 비상대책위원회 피해자X는 보도 자료를 통해 K교수에 대한 법적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피해자들 일부가 검찰에서 진술했다고 밝혔다.
이런 경우 공무원에 대해서는 수사 결과가 날 때까지 사표를 수리해주지 않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서울대가 법인화되면서 해당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고 사립학교법에 따르게 됐다. 따라서 교무처는 사표를 수리하지 않을 재량권이 없다고 한다. 교무처 관계자는 “사표가 수리되면 학교는 더 이상 진상 조사를 진행하지 않고 징계 또한 소관이 아니게 된다”고 밝혔다. 학교 측의 대처가 사실상 ‘교수 인권은 감싸고, 학생 인권은 외면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는 지점이다.

▲기자회견이 열린 본부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운집했다. ⓒ최영권 기자
피해자 비상대책위원회 조직 및 기자회견 열어
K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졸업생 및 재학생들은 ‘스누라이프’를 통해 ‘서울대 K교수 사건 피해자 비상대책위원회 피해자X(피해자X)’를 조직했다. 피해자X는 K교수가 학생들을 하나의 변수로 여겨 동일한 수법으로 수많은 학생에게 성범죄를 자행했다는 데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피해자X는 11월 26일 언론에 보도 자료를 배포하고 27일 본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피해자X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학교의 적극적인 진상 조사와 엄격한 처벌, 재발 방지 대책 등을 요구했다.
신상 공개 위협 때문에 피해자들은 직접 기자회견에 나설 수 없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사건을 맡은 한유미 변호사가 대리로 성명서를 낭독했다. 이들은 “1차적으로 무엇보다 원했던 것은 K교수의 반성과 진심어린 사과”라며 “그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뉘앙스로 억울한 것처럼 표현해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학교와 인권센터에 적극적인 수사를 이미 수차례 요청했으나 적절한 대응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실명 신고를 해야 강력한 조사를 할 수 있다는 인권센터의 방침에 따라 한 명의 학생이 실명 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인권센터는 다른 학생들의 실명 정보도 요구했고 피해자들은 이에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피해자X는 “실명 신고를 해야 강력한 조사를 할 수 있다는 인권센터의 절차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조사의 강도는 예측되는 피해의 규모나 2차 피해 가능성 등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권센터 규정에는 신고가 없어도 상담소장의 판단에 따라 직권 조사를 할 수 있다고 돼있다.
피해자X는 “학교 측의 적극적인 사건 처리 세부 계획과 방침에 대한 공식적인 공개를 요구한다”면서 “현 시점에서의 교수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도 요청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사건이) 다시는 이런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변화의 시작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학생대표 발언으로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 김해미루(경영 08) 의장이 “학생들은 이번 사태에 분노했고,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학교를 원한다”며 “학교의 철저한 진상 조사와 합당한 처벌, 그리고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교수와 학생의 갑을관계에 의한 성폭력 문제 수면 위로 드러나
피해자X는 그동안 자체적으로 피해 사례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피해자X는 보도 자료를 통해 K교수가 10년여 동안 성추행을 상습적으로 저질러 왔으며 파악된 피해자만 22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학부, 대학원, 동아리 등 K교수의 영향력이 닿는 곳에서는 수년 동안 어김없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K교수는 개인적인 연락으로 시작해 저녁 식사를 하자며 불러내서는 학생이 아니라 이성처럼 대했다. 식사를 하며 술을 마시게 하거나 2차로 자리를 옮기도록 해 신체 접촉을 시도했으며, 연구실로 불러 추행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피해자X는 “그동안 이 문제가 공론화되지 않은 이유는 대학교수와 학생은 철저한 갑을 관계이기 때문”이라며 “일부는 불쾌감을 표시하거나 거부 의사를 밝혔으나 K교수는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며 화를 내거나 회유했다”고 말했다. “취업에 반영되는 학점은 교수의 권한이고, 대학원이라도 진학하면 교수의 손에 평생 운명이 맡겨지게 되므로 교수에 대항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걸어야 하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K교수는 보복할 가능성이 큰 인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K교수가 성추행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 이후 피해자 측근들에게 온라인 커뮤니티를 언급하는 문자를 보냈다고도 폭로했다.
K교수는 평소 면바지에 운동화, 축구를 좋아하고 힙합 춤을 추는 신세대 교수로 알려져 있었다. 피해자X는 K교수가 학생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대외 이미지를 구축한 것 역시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해 사적으로 연락하거나 따로 불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다면서, 원만한 대외 이미지도 범행의 공론화를 어렵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K교수 사건 비상대책위원회 피해자X를 대리해 한유미 변호사가 성명서를 낭독했다. 피해자들은 신상 노출을 우려해 직접 기자회견장에 서지는 않았다. ⓒ최영권 기자
학생사회의 대응
김해미루(경영 08) 의장은 연석회의 역시 사건을 외부 보도를 통해서 처음 파악했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타대생이다 보니 연석회의가 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스누라이프’에서 본교 학생들의 피해 제보가 잇따르자 어떤 대응을 해야 할 지 내부적인 논의를 거쳤다. 결론적으로 성폭력 사건의 특성상 피해자가 신상 공개를 꺼리는 만큼 제보를 취합해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를 대신해 학교나 인권센터에 의견을 전달하는 등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피해자 모임을 주도하며 사건 처리에 앞장서고 있는 학우가 이미 있어서 이에 동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해자 모임 측에 전달했고, 최근 ‘피해자X’측에서 도움을 요청해 와서 기자회견을 열게 됐다.
김 의장은 “학내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응은 학생의 권익을 대변하는 최고 기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의지를 보였다. 이미 피해자들이 모여 제보를 받고 있는 만큼 따로 제보를 받으면서 채널을 이원화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해, 따로 조사를 하고 있지는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신상 공개에 대한 위협을 받는 만큼 대변인 역할을 하거나 학교에 철저한 사후처리를 압박하는 등의 방법으로 돕겠다고 말했다.
학내 대응체계에 대한 개선 요구 있어
K교수 사건을 계기로 학내 성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다시 환기되고 있다. 90년대부터 학생사회에서는 학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학칙 제정 운동, 여성운동이 활발히 이뤄졌다. 그 성과로 2000년 학칙 제정이 마무리됐고 성희롱·성폭력상담소가 개소됐다. 2012년에는 해당 상담소가 인권센터로 확대됐다. 그러나 ‘스누라이프’ 여론을 살펴보면 많은 학생들이 인권센터에 제보하자는 의견에 반대 입장을 표하는 등 학내 성폭력 대응 체계에 대한 불신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불신은 지난 사건의 기억에서 기인하는 면이 있다.
2011년 본교 대학원생이 후배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성기 기형 주장이 인정돼 무죄 판결을 받았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피해자는 성희롱·성폭력상담소에서 대리인을 동반할 권리를 침해받았고, 남성 교수가 절반 이상인 자리에서 성폭력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이번 사건에서도 피해자X는 인권센터가 실명 신고를 요구해 피해자들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학교는 2012년 인권센터를 설치하고 인권 교육과 사후처리를 강화하는 등 ‘인권대학’으로 도약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교수와 직원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 및 조사심의위원회, 약한 강제력, 실명 신고 제도는 여전히 한계로 지적받고 있다. 김보미(소비자아동 12) 생활대 학생회장은 “적어도 학생이 피해자인 사건의 경우 조사심의위원회에 학생 위원을 두고 총학생회와 공조해야 2차 가해를 잘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카이스트 대학원의 경우 인권센터가 총학생회 산하에서 운영되고 있다.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비슷한 피해를 당했다는 제보들이 잇따랐다. ⓒ스누라이프
학내 성폭력 문제 해결 위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 필요해
사건 이후 ‘스누라이프’ 서울대광장 게시판에 논평을 내기도 했던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달)’은 “대체로 성폭력 사건은 권위나 위계, 그리고 ‘공동체의 단합’을 지켜야 한다는 압력이 끼어 있을 때 해결이 훨씬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며 “학내에서도 교수와 학생 사이의 성폭력, 반 내 성폭력 등이 쉽게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달’은 갑의 위치에 있는 가해자에 맞설 수 있도록 피해자에게 힘을 실어주고 관계당국이 2차 피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압박하고 감시하는 것이 학생 사회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의 권익을 대변하는 학생회가 구심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달’은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성폭력의 경우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규칙과 역량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찰이나 상담소에 신고하지 말고 우리끼리 처리하자는 뜻이 아니다. ‘달’은 “학생들이 2차 가해자가 되기 쉽기 때문에 피해자가 고립되지 않도록 주위에서 피해자를 존중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평소에 해야 한다”며 “반성폭력 학생회칙이나 내규 제정이 그런 노력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학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생사회의 지속적 관심과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