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9일 대학로에서 ‘44주년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14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그 전날인 11월 8일 여의도문화마당에서는 ‘투쟁문화마당’이라는 이름의 전야제가 열렸다. 그보다 2주 앞선 10월 25일, 세종로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비정규직 철폐! 2014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수천에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올라와 한 곳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흔한 풍경은 아니다.
매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쯤 노동자들은 단결의 장을 마련해왔다. 중요한 노동 의제들을 꾸준히 다룸으로써 한국 노동자들의 권리 증진에 기여해온 대회들이지만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전태일 열사 정신을 계승하자, 전국노동자대회
지켜져야 할 것이 지켜지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달려오던 우리 사회에서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화려한 산업개발의 뒤편에는 그 주역인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한 역사가 있다. 분단 이후 체제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반공 이념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 사회에서는 혹여 ‘빨갱이’로 몰릴까봐 노동 운동 자체가 금기시됐기 때문이다. 한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박성식 대변인은 “이에 맞선 노동자의 인간 선언이자 권리 선언이 바로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라고 표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 운동이 다시 움트기 시작했으며 노동자들 스스로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매년 전태일 열사의 기일인 11월 13일 전후로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는 5월 1일 노동절 행사와 쌍벽을 이루는 연중행사다. 11월의 전국노동자대회는 전국 각지의노동자들이 서울로 모여 한 곳에서 개최된다. 한 해 중 가장 큰 노동자 행사인 노동절 행사가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것과 대비된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박성식 대변인은 “11월 전국노동자대회는 투쟁성이 보다 강조되는 시점이라 전국에서 서울로 모이는 방식으로 개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태일 열사의 희생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그가 지녔던 희생과 인간애,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계승하여 자본과 불의에 맞서 투쟁하자는 것”이 전국 노동자대회의 취지라고 말한다.

1988년 처음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의 모습이다. ⓒ노동자역사 한내
‘노동해방’을 외친 첫 전국노동자대회
올해로부터 26년 전인 1988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기일을 맞아 첫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이를 이끌어 낸 원동력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전국적 파업투쟁으로, 이후 노동조합 조직화가 급속히 증대되는 계기가됐다. 이에 힘을 입은 노동자들은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여왔다.
1988년 봄 임금인상투쟁에서 지역별 공동투쟁의 기틀을 다진 후, 각지에서 모인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서로의 의지를 확인하는 지리산 등반대회가 있었다. 지리산 정상에서 참가자들은 전태일 열사 기일인 11월 13일에 열사의 정신을 돌이켜보고 노동악법을 개정하기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갖기로 약속했다.
1988년 11월 12일 밤 연세대학교에서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가 열렸다. 전야제에서는 제1회 ‘전태일 노동상’ 시상이 있었고, 노동자 2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 노동자 웅변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전국노동자대회 본 대회는 11월 13일 오후 2시부터 노동자 3만 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 열렸다. 2시간에 걸친 집회를 마친 뒤, 노동자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시가행진을 했다.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끝장내자’, ‘악법 철폐 노동해방’ 등의 구호를 외쳤다. 문성현 전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은 <역사비평> 53호에 실은 ‘나의 노동운동과 ‘살아있는’ 전태일들’이라는 글에서 ‘노동자들의 혈서로 쓴 ‘노동해방’ 네 글자는 위대한 행진의 맨 앞에서 살아 펄떡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격렬했던 시작에서 안정기에 이르기까지
1988년 이후 계속돼온 전국노동자대회는 전태일 열사의 기일인 11월 13일 전후의 주말에 열리게 됐고, 그 명칭은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으로 시작했다. 명칭을 간단히 ‘전국노동자대회’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제조업이 아닌 일반 사무직 동지들에게는 전태일 열사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동안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이라는 명칭은 전야제와 ‘전태일 노동상’에만 남아있게 됐다. 그리고 2000년 전태일 열사 분신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전태일 정신 계승’의 노동자대회가 됐다.
1995년 민주노총 설립 전과 후의 전국노동자대회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처음 두 번의 전국노동자대회는 개별 노동 운동 단체나 지역 연대 조직으로부터 시작됐고 이후 1995년까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중심으로 개최됐다. 이 시기에는 민주노총 박성식 대변인에 따르면 “노조조직화, 즉 민주노총 설립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었으며 대회를 개최하는 것 자체가 봉쇄당하던 시기라 이에 맞서 대회를 여는 것 또한 그 자체로 목적”이었다. 이처럼 봉쇄를 돌파하고 개최하는 대회였기 때문에 전개 양상이 격렬했다. 노동운동이 본격화된 초기라 참여 연령도 젊었다. 민주노총 설립 후에는 노동운동이 투쟁을 통해 합법적 공간을 어느 정도 쟁취한 후라 대회 자체가 금지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노동자와 정부 간의 격렬한 대립도 약화됐다.
현재까지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다룬 투쟁의제는 큰 범주로 분류하면 민주노조 사수(노조민주화 또는 노조활동 인정) 노동시간 단축(주5일제) 노동기본권 보장(노동3권 보장, 특히 단체행동권) 노동악법 철폐(근로기준법 상의 독소조항이나 개악 입법 저지) 사회공공성 쟁취(사회복지 등 사회안전망 확충 요구) 비정규직 및 정리해고 철폐(고용안정 요구) 등이 있다. 특히 1988년의 노동악법 개정을 민주노총 박성식 대변인은 “현재 각종 민영화 정책으로 위기를 맞고 있으며 여전히 턱 없이 부족한 상태지만 사회공공성 또한 노동자들의 끈질긴 요구 덕에 우리 사회의 중요 의제로 설정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2014년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의 모습이다. 무대에서 노래 공연을 하고 있다. ⓒ최서현 촬영기자
은근한 묘미, 전야제
전국노동자대회 전날에 열리는 전야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과거 극단적으로 노동운동을 금기시하던 시기에는 노동자들이 집회를 여는 것 자체가 큰 투쟁이었다. 따라서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기 위해서는 하루 전 밤에 집결해 다음날 대회 장소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현재의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는 노동자들의 여러 투쟁문화를 함께 경험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다음 날 본 대회에서 시간의 제약상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의제들을 다루고 노조 활동가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자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몸짓과 민중가요 공연을 보고 투쟁단위별 일일주점에 들러 담소를 나누는 형식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의 외침,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는 IMF 외환위기 이후 다양한 직종에서 끊임없이 늘어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설움이 분출하면서 시작됐다. 2000년대 들어 비정규직노동자의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2002년 대선 시기 사회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후, 이듬해 11월에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 이전에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특별히 제기하기 위해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가 열렸다. 2003년 10월 26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공동주최로 ‘비정규직 차별철폐, 노동기본권 쟁취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참석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노조 간부 이용석 열사는 대회 중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했다. 민주노총 박성식 대변인은 이용석 열사의 분신 사건이 “비정규직 문제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고 있으며 그에 맞선 투쟁이 본격화 됐음을 알리는 상징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죽음으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실태가 여론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후 매년 10월 26일을 전후로 비정규직 철폐 전국노동자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대회 시작에 앞서서는 ‘이용석 열사상’이 시상된다.

2003년 처음 열린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의 모습이다. 대회 참가자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민중의 소리
2004년 9월 노동부는 비정규악법 입법예고를 했고, 이에 항의하며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이 전개됐다. 비정규악법은 기간제노동자 사용기간을 늘리고 파견대상 업무를 확대함으로써 비정규직 양산을 유도한다는 비판을 받은 법안을 지칭한다. 열린우리당 점거농성과 비정규악법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모아 민주노총은 총파업투쟁을 결의했다. 그해 10월 10일 열린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비정규악법에 대한 분노를 대중적으로 표출했다. ‘비정규 개악안 저지! 권리입법 쟁취!’라는 문구가 적힌 플랜카드가 대회장을 뒤덮었다. 전국적으로 약 3,900여명의 비정규 노동자들이 집결해 전체 집회 대오의 절반을 차지했다.
2003년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 이후 준비기간을 거쳐 2005년에는 비정규노동자들의 자발적 연대체인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전비연)가 공식출범했다. 이후 전비연은 비정규직철폐투쟁에 앞장서왔으며 매년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의 주축을 이뤄왔다.
근래에 들어서는 11월의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와 연계해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그 해의 정세나 투쟁 여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비정규직 관련 큰 투쟁의제의 여부에 따라 대회의 규모나 양상에 변화가 있다.
‘비정규’노동자대회의 특별한 의미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심각하다.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월평균 임금은 143만원으로, OECD 국가 중 임금이 가장 낮다. 정규직 전환 비율 역시 가장 낮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만의 애환을 분출할 구멍이 절실하다.
비정규노동자대회를 노동자대회와 분리해 개최하는 데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전국노동자대회는 노동문제 일반에 대해 다루고 참가 조직 다수가 정규직 노조다. 전국노동자대회에서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핵심 과제로 설정하기도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보다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있다. 이런 맥락에서 비정규직 문제만을 중심으로 한다는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의 의미가 있다. 민주노총 박성식 대변인은 “장기적으로 보면 가급적 11월 전국노동자대회의 중심에 비정규직 문제가 제시되고 참가 주체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수가 되도록 조직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물론 그 전까지 의제의 집중과 강조를 위해 별도의 비정규노동자대회를 더 성장시켜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내 이야기라 생각하고 바라봤으면
전국노동자대회와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는 각각 20년, 10년 넘게 매년 개최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낯설게 다가온다. 대회에선 노동 일반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노동조합 조합원이 아니면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간다. 시민들에겐 그저 도심을 시끄럽고 복잡하게 만드는 행사로 비춰질 수도 있다.
우리는 ‘시대가 좋아졌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당한 노동 문제들이 연달아 발생하는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다. 지켜져야 할 것이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국 각지에서 올라와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그들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다. ‘노동’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고 ‘노동자’는 현재 또는 미래의 우리들이다. 그들의 관심과 목소리가 합쳐져 주5일제, 노동악법 개정 등의 성과를 만들어냈다. 44년 전의 전태일, 11년 전의 이용석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조금 더 어둡지 않을까.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함께 어깨를 맞대고 앉아 응원을 보태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