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대학 J씨가 겪은 당황스러운 일 …
‘넌 사랑과 권력 중에 사랑을 선택할 것 같아’
2013년 2학기에 J씨가 들은 대형 교양 강의의 강사는 앞줄에 앉던 J씨에게 ‘수업이 끝나고 차 한 잔 할 수 있냐’고 제안했다.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 한 명도 함께였다. 그러더니 그 강사가 다음에는 ‘밥을 같이 먹겠냐’고 제안했다. 이번엔 둘이서만 만났다. 학교에서 꽤나 떨어진 강사의 연구실에서 먼저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밥을 먹으러 나가려고 가방을 챙기니까 ‘그냥 두고 가라’고 했다. 앞으로도 자주 연구실에 와서 공부하고 가라고 했다. 약간 불편한 마음에 결국 가방은 챙겨 나왔다. 밥을 먹으면서 그 강사는 J씨에게 ‘넌 사랑과 권력 중에 사랑을 선택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남자친구랑 뭐하고 노는지’ ‘자취하는지’ 등의 질문을 계속했다. 어딘가 오묘하게 불편한 이야기들이었다. 밤이 늦어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아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해서야 겨우 빠져나왔다. 이런 상황들이 당황스러웠던 J씨는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힘내, 교수님이잖아. 좋은 인맥이 될 거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종강을 하고 겨울방학에는 유럽여행을 갔는데, 강사로부터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카톡이 왔다. 또 만나자고 할까봐 미리 여지를 차단할 겸, 유럽여행 중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하지만 강사는 자신도 유럽에 갈 테니까 만나서 같이 다니자고 했다.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랬더니 강사는 J씨의 일정을 꼬치꼬치 캐물었고, 기어이 일정을 파악하게 되자 ‘내가 언제 어디로 갈 테니 만나자’고 치밀하게 제안했다. J씨는 ‘이건 정말 아니다’싶어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완강히 거절했고, 그러고 나서야 연락이 끊겼다.
* 위의 내용은 <서울대저널>이 실제 제보 받은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핵심은 비대칭적인 위계를 이용하는 것
앞서 제시된 사례에서 강사는 J씨에게 폭행이나 협박을 동반한 신체접촉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평등한 위계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사적인 만남을 요구하고 시도했다. 강사가 J씨에게 취한 태도나 대화의 내용은 정상적인 사제관계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라 보기 어렵다. 강사는 J씨를 마치 연인관계로 발전 가능한 이성으로 대하는 모습을 보이며 J씨에게 집착했다. 이와 같이 계속되는 집착과 사적인 질문, 만남 요구는 ‘이 사람이 나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게 한다. 따라서 J씨는 불쾌한 감정을 느꼈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다.
특히 고려해야할 점은, J씨는 강사의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교수나 강사로부터 성적 불쾌감이 느껴지는 불편한 요구를 받아도 그가 학점부여 권한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다. 학점이 학생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야한다. 만약 대학원생이 지도교수로부터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피해자는 논문지도 및 졸업, 이후 진로에서의 불이익이 걱정돼 반발하거나 문제를 고발하기 힘들다.
최근 언론에서 보도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수리과학부 K교수, 경영대 P교수 관련 성추행 및 성희롱 사건은 앞의 사례보다 훨씬 정도가 심각한 경우들이다. 다행히 J씨의 경우에는 강사의 횡포가 합의되지 않은 신체접촉이나 노골적인 음담패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강사의 행동이 비대칭적인 권력을 이용해 성적 불쾌감을 유발했다는 점에서 K교수, P교수 사례와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수성을 키워야 … 상황에 따라 굉장한 ‘폭력’이 될 수도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같은 언행이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성폭력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밝혔다. 당시의 상황과 맥락,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빈도, 행위의 결과가 어떤 불이익으로 연결됐는지 등을 고려해 성폭력 여부를 판단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외모에 대한 신체적 평가’, ‘뚫어지게 쳐다보기’와 같은 경우 법에 저촉되는 행위는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굉장한 폭력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어떤 행위에 대해 ‘누군가는 성폭력이라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을 때, 듣는 이는 무엇보다 피해자를 감정적으로 지지해 줄 필요가 있다. 듣는 이의 대처방식에 따라 피해자는 또다시 고립감, 우울 등의 부정적 정서를 느낄 수도, 마음이 치유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 간의 결집도 중요해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공동체 내에서 지지집단을 구성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사전에 사건을 예방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또한 “(교수-학생 간 성폭력 문제에 대해) 오히려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식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는데 그런 분위기를 학생들 스스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나 집단적인 움직임이 없는 이상, 어쨌든 우위를 차지하는 건 항상 교수일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의 유수진(사회 09)씨는 “무엇보다도 학생들 스스로 성폭력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며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가장 주요한 기구인 학생회가 중심이 돼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유씨는 “결국 교수-학생 성폭력은 권력 관계의 문제이고, 이 권력 관계를 바꾸는 데는 학생들의 임파워링(empowering)이 핵심”임을 역설했다.
학생들이 교수로부터 ‘성폭력이라 하기엔 애매하지만 찜찜한’ 일을 겪은 경우가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사례들 외에도 훨씬 더 많이 존재하리라 짐작가능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어떻게 보면 (K교수, P교수사건 등이 터진) 지금이 서울대 학생사회에 중요한 타이밍”이라고 지적했다. 학생들끼리 모여 문제를 나눔으로써 조직적인 힘을 얻어 잘 해결된 사례가 많아진다면, 앞으로도 힘을 모아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