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다시 올린 ‘관악극회’의 <유민가>

연출도 주연도 그때 그대로

해방기 희곡 <유민가>가 2015년 1월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랐다. 196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연극회에서 최초로 공연된 이후 50년 만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연출도, 주연도 그때와 같은 사람이 맡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학생 연극회가 아닌 동문 연극회가, 학생 관객이 아닌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공연했다는 점이다. <서울대저널>에서는 극단 ‘관악극회’에서 광복 70주년을 맞아 특별 기획한 연극 <유민가>를 관람하고, 졸업 후에도 연극에 대한 열정을 꾸준히 이어가는 동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거리… 유민가(流民街) 

 

무대 위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판잣집 한 채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지붕 위를 비추는 푸른빛의 은은한 조명과 이따금 들려오는 매미 울음소리는 연극의 배경이 여름임을 짐작케 한다. 이곳은 일제 강점 시절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조선 땅을 떠나온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도쿄 동부의 빈민굴이다. 만수는 먼저 일본으로 건너온 두 아들 일홍과 이홍을 따라 막내 삼홍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땅을 모조리 빼앗기고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찾아 도쿄로 왔지만 이곳의 삶도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공연은 빈민굴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이 만수네 판잣집에 모여 바둑을 두며 고달픈 삶에 대한 한풀이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함께 모인 운제, 김주사, 서만복, 만생은 조선을 떠난 이유도, 시기도 제각각이지만 현재는 모두 타지에서 일본인들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는 처지다.

이때 서기가 밀린 집세를 받으러 만수네 집에 들어온다. 하지만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하는 만수네 형편에 집세로 낼 돈이 있을 리 없다. 둘째 아들 이홍이 같은 조선인끼리 이래서야 되겠냐며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돌려보내지만 언제까지나 집세를 미룰 수 없어 고민이다.

한편 서만복의 딸 순희는 아버지가 자신을 서기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순희는 연인 관계에 있던 삼홍에게 서기와 결혼하기 싫다며 자신을 데리고 멀리 떠나달라고 애원하지만, 자신의 앞날에 대해 고민이 많은 삼홍은 이를 거절한다. 결국 순희는 서기에게 시집을 가게 되고, 삼홍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새로운 기회를 찾아 집을 나간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 현실의 암울한 벽에 부딪힌 이들에게 사랑은 언제나 뒷전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 장남 일홍이 절도죄로 수감됐다는 소식을 듣고 시름에 빠져있던 만수는 김주사의 권유로 아편에 손을 대고 만다. 이홍은 평생 동안 존경하던 아버지가 아편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

공연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고, 차갑게 얼어붙은 조명의 색은 무대 위에 겨울이 왔음을 알린다. 빈민굴에 호수에서 김주사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김주사가 자살을 한 것이다. 김주사가 남긴 유서에는 딸 분조에게 짐이 되기 싫어 먼저 간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홍에게 분조를 부탁한다는 유언이 담겨있었다. 이홍은 오열하는 분조에게 “죽기는 왜 죽어. 살어야 된다. 내일에 희망을 두고 이 세상과 싸워나가자!”라고 말하며 다시 다함께 조선 땅으로 돌아갈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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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 속 영롱히 빛나는 진주, <유민가>

<유민가>는 1949년 좌익계 잡지 <희곡문학>에 실린 사실주의 희곡으로, 일제 강점 시절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유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그 속에 보이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그리고 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10년대와 1920년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필두로 한 일제의 토지 침탈이 극에 달했던 때다. ‘토지 제도의 근대적 개편’이라는 명목 아래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많은 영세 농민들은 평생 일구어온 농토를 빼앗기고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발생한 유민들은 만주로, 일본 본토로 낮은 임금에 팔려나가 일제의 산업화를 위한 야욕의 희생양이 됐다.

<유민가>의 작가 김동식은 이러한 유민들의 삶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민가>가 일본으로 이주한 떠돌이 농민의 삶을 다룬 장막극이라면, 그가 1945년에 잡지 <인민예술>에 발표한 <황혼의 마을>은 만주로 떠나는 농민의 괴로움을 그린 단막극이다. 국문학계에서 김동식은 주로 좌익계 잡지에 투고한 월북 작가로 알려져 그에 관한 기록이나 연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6·25전쟁 전에 수감됐다가 9월 28일 서울 수복 시에 월북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에 연극 <유민가>의 연출을 맡은 정한룡(물리 64)씨는 “<유민가>는 잡지 <희곡문학>에 실린 다른 작품과는 달리 좌익적 색깔을 띠지 않는다”며 작가의 이념적 성향으로 인해 완성도 높은 작품이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연극회 활동을 하던 정한룡씨는 중앙도서관에서 <유민가>를 처음 발견하고 읽어본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조개를 잡아 무심코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 영롱한 진주가 빛나고 있다!” 좋은 희곡 대본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당시 <유민가>를 찾아낸 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대본 수정 작업에 들어갔고 연극회에서 공연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유민가>는 1968년 10월 제9회 문리과대학 연극회 정기공연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그리고 50여 년이 지난 2015년 1월 <유민가>가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랐다. 이번 공연은 여러 모로 의미가 깊다.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일반 대중 앞에서 공연됐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에 주연(만수 역)을 맡은 이수찬(심리 66)씨는 1968년 문리대 공연에서도 같은 역을 맡았었다. 정한룡씨는 “그때 이수찬이 20대 초반의 나이에 60대 노인 역할을 감당하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새롭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국립대학극장’에서 극단 ‘관악극회’까지

서울대 내에 최초로 연극회가 생긴 것은 68년 전이다. 1947년 5월에 사범대학에서 학내 최초의 연극회가 탄생했고, 11월에는 단과대학 연극회의 연합체적 성격을 가진 ‘국립대학극장(총연극회의 전신)’이 결성돼 창립공연을 했다. 작품은 안톤 체홉 작, 김기영 연출의 <악로>였다. 1963년 이후에는 의과대학, 문리과대학, 치과대학, 농과대학 등 총 14개 단과대에서 차례로 연극회가 만들어졌다. 극단 ‘관악극회’의 윤완석(경제 73) 대표는 1960년대를 가리켜 ‘서울대 연극회의 최대 발전기’라 부른다. 문리대의 창작극, 법대의 사회참여극 등 각 단과대의 특성을 살린 단독 공연과 함께 총연극회 차원의 단과대 연합공연이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때 마당극이 국내 최초로 시도되기도 했다.

1975년에는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들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연극회 활동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에는 각 단과대가 서로 떨어져 있어 대부분의 활동이 단과대 연극회를 중심으로 진행됐다면, 이제는 모든 단과대들이 한 곳으로 모임에 따라 총연극회 차원의 연합공연이 더욱 활발히 진행될 수 있게 된 것이다. 1976년에는 총연극회 주최로 13개 단과대 연극회가 함께 ‘개교 30주년 기념 연극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학내 연극회 창립 이후 최대 규모의 공연이었다.

1980년대에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서고 학내에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자 서울대 연극회는 잠시 위기를 맞았다. 1986년 학생 조직의 모든 역량을 민주화 운동에 집중시키고자 총연극회만 남고 모든 단과대학 연극회가 해산하여 공연을 중단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88년 9월 사범대학과 공과대학 연극회의 공연을 시작으로 단과대 연극회의 재건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2015년 현재는 대부분의 단과대에 연극회가 있어 총연극회와 함께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1년에는 서울대 재학 시절 연극 활동을 하던 졸업생들이 모여 ‘서울대학교 연극동문회’를 결성했다. 1975년 캠퍼스 종합화의 전후를 모두 경험한 70년대 연극 동문들을 중심으로 18개의 연극동문회가 모두 모인 것이다. 이후 연극동문들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정기적인 연극 공연을 위해 서울대 연극동문회 부설로 극단 ‘관악극회’를 창단했다. ‘관악극회’는 ‘시대의 사회적 주제를 투영하는 작업을 통해 연극계에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고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관악극회’의 윤완석 대표는 “1990년대 이후 대학로를 중심으로 발전한 극단들이 지나치게 상업적 연극에만 몰두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관악극회’는 일반 극단에서 기획하기 어려운 국내외 우수 고전극 공연을 꾸준히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관악극회’는 세 차례에 걸친 정기공연을 통해 고전극들을 소개하며 사회적 메시지를 보내왔다. 창단공연인 <안도라-하얀중립국>에서는 현대인들의 가학성향을, 두 번째 공연인 <시련>에서는 집단의 폭력성을 꼬집었다. 이번 세 번째 공연에서는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의 해방기 희곡을 소개했다. 올해 가을에는 법관양성소 설립 120주년을 맞아 제1회 졸업생인 이준 열사를 소재로 한 연극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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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수 없는 고상한 아편, 연극

연극 <유민가>를 공연한 배우들의 구성은 14학번 재학생부터 54학번 졸업생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직 하나, 연극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운제 역을 맡기도 한 ‘관악극회’ 이순재(철학 54) 예술감독은 “연극은 평생 끊을 수 없는 아편과도 같다”고 말한다. 졸업을 하고 나서도 대학 시절 연극 활동의 향수를 버리지 못해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관악극회’에는 전문 배우뿐만 아니라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사회인 배우들도 많이 있다. 이들은 연극이 전문 배우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상업화된 대형 극단들 사이에서 꿋꿋이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앞으로도 대학 연극인들의 활발한 작품 활동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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