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생대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는 비석이 하나 있다. 올해로 40주기를 맞는 김상진 열사의 추모비다. ‘사랑하는 조국의 민주를 위해’ 할복자결을 했던 김상진 열사의 뜻을 기리며, 그의 행적과 그가 불러일으킨 반향을 조명해보았다.
‘인간 김상진’에 대한 기억
할복자결을 단행한 ‘열사’라고 하면 투쟁의지로 가득 찬, 다소 과격하고 딱딱한 사람이었을 거라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김상진 열사를 고등학생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본 안종건씨는 친구에 대해 “비교적 온순한 편이었다”고 평했다. 그는 김상진 열사를 “해야 할 말이나 지적할 것이 있으면 반드시 하고 넘어가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백안시하진 않았던 친구”라고 회상했다. 또한 김상진 열사는 운동을 골고루 즐기고, 술도 적당히 할 줄 알았으며, 학교 공부는 ‘B’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고 자취생활에서는 게으른 면모도 보이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1975년 4월의 재구성
탄압과 긴장이 사회를 억누르던 1975년 봄, 대학가는 잇따른 시위로 술렁거렸다.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점점 국민들의 목을 조이는 유신정국 속에서, 당시의 대학생들은 사태를 그저 관망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농대 학생들 역시 ‘학원 자유화’, ‘언론 탄압 반대’, ‘유신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해 4월 4일 농대 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나 가두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시위의 맥을 끊고자 학생회장과 학생회 체육부장을 즉시 구속했다. 이후 농대 학생들은 구속학생의 석방을 촉구하는 서명 및 단식농성에 나섰다. 그 와중에 4월 9일에는 ‘인혁당 재건사건’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이 선고 하루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축산학과 68학번으로 당시 졸업을 앞두고 있던 김상진 열사는 이 부당한 세상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과 동기 및 후배, 그가 속한 서클 ‘한얼’ 회원들과 함께 4월 11일에 집회를 열 것을 모의했다. 그는 집회에서 낭독할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준비했다. 그의 친구들은 이 두 편의 글이 김상진 열사의 유서가 되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4월 11일, 수원캠퍼스 잔디밭 백양나무 아래서 자유성토대회 형식의 집회가 열렸다. 세 번째 연사로 나선 김상진 열사는 거듭 다듬어 완성한 ‘양심선언문’을 차분히 읽어나갔다. 선언문의 뒷부분에 이르러 그는 품 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칼을 복부에 꽂은 채 비스듬히 그어 올렸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병원으로 실려 가는 혼비백산의 순간에 그는 친구들에게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수원 도립병원으로 옮겨진 김상진 열사는 수술을 받아 잠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다시 출혈이 심해져 그는 재차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은 실패적이었고 의사는 다음날이 밝아오자 서울대의대 부속병원으로 김상진 열사를 옮기도록 조치했다. 구급차로 이송 도중, 그는 26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김상진 열사의 시신은 반강제적으로 하루 만에 화장됐다. 화장터에는 사복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가족들은 화장 후 남은 유골마저 경찰의 눈치를 보며 몰래 항아리에 담아야 했다. 유골은 한동안 절에 보관되다가 일 년이 지난 후에야 벽제 국제공원묘지에 안장됐다.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는 김상진 열사에 대한 추모가 잇따랐다. 경찰과 관계기관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은 언론을 통해 퍼져나갔다.
열사의 뜻을 이어가는 사람들
1988년에는 김상진 열사의 뜻을 기리는 ‘김상진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처음 기념사업회가 꾸려진 이후로 지금까지 실무를 맡고 있는 82학번 정철훈 운영위원은 “(본인이)학교 다닐 때는 김상진 묘소에 참배만 해도 정학당할 정도라 몰래 다녀오거나 징계를 각오해야했다”고 한다. 그러다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다들 ‘이제는 해도 될 것 같다’고 판단해 기념사업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기념사업회의 초대 회장은 김상진 열사의 고등학교 및 대학교 동기인 안종건씨다. 그는 기념사업회를 처음 만들 때 “김상진이란 사람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합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너무 과대포장해서도 안 되고, 있었던 사실을 잊어버리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런 맥락에서 당시에는 김상진 열사에 대한 호칭에 관해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김상진 열사’로 불러주면 고맙게 수용하지만, 기념사업회 스스로 ‘열사’를 붙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결국 이름 뒤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고 ‘김상진’이라고 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합의가 돼 지금의 ‘김상진기념사업회’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안씨는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없고 앞으로도 형편은 다르지만 개선해야할 점들이 계속 생길 것”이라 봤다. 그래서 기념사업회는 “늘 깨어 있어서 민주주의와 관련해 개선해나가야 할 부분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사회에 기여하자”는 취지도 품게 됐다.
기념사업회는 어린 세대들과도 계속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정철훈 운영위원에 따르면 “김상진이라는 이름으로만 접근하기보다 다른 형태로, 가능하면 농업이라는 틀을 갖고 젊은 세대들을 만나고자 농식품산업 탐방 행사를 매년 한두 차례 운영해왔다”고 한다.
40주기를 맞는 올해에는
김상진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흐른 올해에는 매년 기일에 해왔던 묘소 참배 외에도 특별한 추모행사가 있을 예정이다. 김상진기념사업회는 4월 11일 저녁, 서울시내에서 야외집회를 계획 중이다.
김상진 열사는 마지막 순간에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남기고 할복했다. 김상진기념사업회 정근우 운영위원장은 “지금은 그 대통령(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을 하고 있는데, 그에 맞춰 제2의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채택하고 널리 알리는 차원에서 야외집회를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집회에서 참여자들과 ‘양심선언문’을 함께 읽는 퍼포먼스도 구상중이다. 정씨는 “40주년에 걸맞게 고인의 뜻을 널리 알리고 오늘날에 훼손되어가는 민주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고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처음으로 김상진 열사의 묘지에 정부의 화환이 놓였다. 2001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됐고 2002년에는 서울대학교 명예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김상진기념사업회 정철훈 운영위원에 따르면 “당시는 유신에 대한 평가가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정리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김상진 열사도 명확하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편 ‘유신의 딸’이 최고 권력자로 올라선 지금,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비판이 도처에서 들린다. 김상진 열사를 비롯해 수많은 열사들이 지켜온 민주주의를 위해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 오둘둘사건

김상진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난 5월 22일이었다. 관악캠퍼스에서는 김상진 열사가 장례식도 없이 화장된 것에 분개한 학생들이 유신철폐를 외치며 대규모 장례집회 및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이른바 ‘오둘둘사건’이라 불리며, 학생운동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여기에 참여했던 유영표씨는 “유신에 항거해 목숨을 희생한 분도 있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는 분위기 속에서 집회가 계획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 다른 참여자 박성규씨는 “모든 악법을 ‘종합선물세트’로 만들어 놓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한 지 일주일 만에 일어나서 반기를 든 것이 오둘둘사건”이라고 평했다. 결과적으로 오둘둘사건은 대통령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으며 학교는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을 대규모로 제명했다.
오둘둘사건 이전까지는 사회과학서클이 대부분의 시위를 주동했다. 하지만 유영표씨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사회과학서클에 속해있던 사람들이 다른 시위전력으로 인해 거의 징역을 살거나 강제로 군에 징집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범대의 야학문제연구회, 문리대의 문학회, 가면극연구회가 중심을 이뤄 장례집회를 준비했다. 그 전의 시위주동자들은 이미 정보기관에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 주동자들은 소위 ‘리스트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다행히도 정보가 유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미 한 차례 제적을 당했다가 군복무 후 복학한 유영표씨는 사건 당일 다른 복학생들과 함께 학생들을 몰래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 유씨는 “이미 제적당했다가 돌아온 복학생들이라 얼굴이 알려져 있어 직접 현장에 가면 오히려 방해가 되니 쪽지를 돌리고 비상벨 누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복학생들의 활약에 더불어 경찰 기동대도 정보를 미리 입수하지 못하고 늦게 출동해 천여 명이라는 많은 수의 학생들이 모일 수 있었다.
당시 불문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병문씨는 사건 당일 아침에야 ‘학교에 와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학생들은 아크로폴리스에 모인 후 교문 앞으로 진출했고 뒤늦게 출동한 기동대와 대치하게 됐다. 그는 “대치하던 중에 투석전을 벌이다가 농성으로 바꿔서 앉아있었는데 경찰이 갑자기 습격해 끌려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씨는 유치장에서 형사들이 ‘너 임마, 학교에서 잘렸어’라고 얘기해주는 것을 듣고 제명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1학년이던 박원순 서울시장도 현장에 있다 체포되고 제명된 사람 중 한 명이다.
오둘둘사건에 가담했던 이들 중 200여명은 학교로부터 제명처분을 피하지 못했고 그 중에서도 상당수는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수감생활을 마치자마자 대부분은 강제로 군에 징집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기간이 더욱 길어졌다. 그들은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나서야 사면·복권되어 비로소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둘둘사건에 가담해 제명되고 징역을 살았던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사회에 진출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취재를 위해 만났던 유영표·박성규·정병문씨는 “80년대까지 대학원 진학, 취업, 공직 진출의 길이 거의 막혀있었다”고 증언했다. 90년대부터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이미 사회 진출의 첫 발을 내딛어야 할 시기에 많은 기회를 박탈당한 후였다. 김상진 열사의 동기 안종건씨는 “농대에서 일을 일으켰지만 관악에서 많이들 징역을 살았다”면서 “그 일(오둘둘사건)이 없었다면 훨씬 성공했을 분들이 많다”며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