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관정도서관 준공식
‘성적 맞춰 들어온 서울대생’에서 ‘과학 대중화에 앞장서는 학자’가 되기까지
철학이 만나서 새롭게 그린 과학

‘성적 맞춰 들어온 서울대생’에서 ‘과학 대중화에 앞장서는 학자’가 되기까지

동강댐 건설 전면 백지화와 호주제 폐지를 이끌어낸 최재천 국립생태원장

 신입생 입학으로 한창 북적거리던 서울대학교의 3월, 자연대학의 한 건물에서는 신입생 환영회가 한창이었다. 한창 들떠있는 신입생들 사이로 무심한 표정의 한 소년이 들어왔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빈자리를 슥 둘러보는 그를 선배들이 좋게 볼 리 없었다. 자기소개 시간이 무르익어가고, 아까 들어왔던 그 소년의 차례가 돌아왔다. 뭔가 못마땅해 보이는 선배들의 시선과 반짝이는 신입생들의 시선을 당당히 마주보고, 그는 얘기했다. “저한테는 신경 꺼주십시오. 원래 이 과 지망한 것도 아니고, 학교 계속 다닐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한 직후 건물 뒤편으로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며 당시를 회상하는 그는, 바로 국립생태원을 이끌고 있는 최재천 원장이다.

학부 시절 학과에 흥미 못 붙여

 최재천 원장은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동물행동학자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번역해 학문 간 교류와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국내·외 학계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최 원장은 1995년 이래로 시민단체와 학교 등에서 강연을 하거나 방송출연을 하는 등 일반인에게 과학을 알리기 위해 활발한 노력을 펼쳐왔다. 그의 저서 <개미제국의 발견>은 그 일부가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또한 그는 동강댐 건설 백지화에도,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위헌 판결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하지만 최재천 원장도 처음부터 학문에 흥미를 붙였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학부 졸업 후 유학을 나와서야 점차 학문의 매력에 빠졌다고 전했다.

  1954년에태어난 최재천 원장은 서울에서 학교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방학이면강릉에 내려가 산천을 돌아다녔다. 그는 당시를 기억하며 “그 때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놀던 게훗날 직업이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운 좋게 노는 게 직업이 됐다”며 웃음을 지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이과를 선택했으나 문학에 흥미를 느껴 문과로 전환할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최재천 원장은“‘문과로 갔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을 늘 마음 한 편에 갖고 살았던 것이 결과적으로 내 삶에 좋았다”며 학문간 ‘통섭’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뚜렷한 진로를 정하지 못했다. 서울대학교 동물학과에 입학했지만, 그것도 별다른 의지가 있어서 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는 “재수할 당시 서울대학교 의예과를 1지망으로 써서 냈다”며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의예과에서도 해부하고 동물학과에서도 해부하니 비슷한 거 아니겠냐고해서 2지망으로 동물학과를 썼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최재천 원장이 동물학을 만나게 된 아주 멋없는 계기였다. 결국 1지망에서떨어지고 2지망으로 쓴 동물학과에 합격한 그가, 자기 과에 흥미를 붙이지 못한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는 “원하는 학과가 아니라 흥미를 못 붙였고, 그래서인지 재미없게 학교를 다녔다”고 학부 시절을 기억했다.

 졸업을 불과 1년 남겨둔 시점. 최 원장은 절박한 마음으로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결코 이른 시기는 아니었다. 진로에 대해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그는 한 교수님과 우연한 기회로 친분을 쌓게 되면서 생태학을 좀 더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최재천 원장은“학점이 3.0은 돼야 어디든 써보기라도 할 텐데 학점이 너무 낮았다”며 “어쩔 수 없이 4학년 때 한 학기에 28학점씩 들으면서 학점을 3.06까지 올렸다”고 밝혔다. 치열하게 준비한 끝에 결국 원서를 넣은 28개의 대학 중에서 3곳에 합격했다. 그리고 최 원장은 그 중의 하나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로 향했다.

 학부 졸업식을 앞둔 시점, 학교 근처에서 졸업기념 과 동기모임이 있었고, 그도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그 날의 모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가 택한 생태학이라는 분야는 당시 한국에서 생소한 분야였다. 생소한 학문을 전공하러 미국까지 가는 그의 모습이 동기들에게는 어리석게 비춰졌을 지도 모른다. 친구들의 우려 섞인 말들이 그에게 따뜻하게 들리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뭐 때문에 유학까지 가서 그런 것을 하느냐’는 한 친구의 말에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벌떡 일어났다. “두고 봐라. 나중에 서울대학교 교수 되려면 너희들은 너희들끼리 경쟁해야 되는데 나는 걸어서 들어올 거다.” 결과적으로 그 때의 선택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며 웃음 짓는 그의 모습에서 인간미가 물씬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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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원장은 호주제 폐지의 공로를 인정받아 남성 최초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여받았다.ⓒ김대현 사진기자

유학 갔을 때의 나는 물 만난 물고기

 당당하게 ‘두고 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도 내심 불안하기는 했다. 실제로 최 원장은“생태학이 한국에서 전혀 대접받지 못하고 있었기에, 생태학 전공자를교수로 뽑아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며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에 못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에괴로워했다”고 당시의 심경을 고백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일단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최 원장은같이 공부하던 한국인들이 ‘미쳤다’고할정도로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 그는 “한국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국인들 앞에서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을 정도”라며 “아마 모두가 나를 ‘완벽한 숙맥이자 촌놈’으로 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영어회화를 자연스럽게하기 위해 술집에 많이 찾아갔다고 얘기했다. 술집에서는 음악이 크게 울리기 때문에 시끄럽게 소리를 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그는 “유학 온 지 10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파티에서 외국인과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억양을 듣고 ‘혹시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왔냐’고물어봤다”며 빙긋 웃었다. 그 이후로 그의 유학 생활은 순탄했다.

 그의 수학 실력도 석사과정 공부에 큰 도움이 됐다. 최재천 원장은 “미국에 발을 들인지 1년도 안됐을 시점에 학교 점심 세미나에서 윌리엄 해밀턴의 혈연 선택 논문을 주제로 토론을 했다”며 “그 논문에 미적분학 등 수학적인내용이 많이 들어가서같은 과 학생들 중 나밖에 이해를 못했다”고 밝혔다. 그 이후로 소속 학과 뿐 아니라 인류학과 등에서도 세미나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소위승승장구했다”며 “한국에서 고생하던것과 달리 미국의 공부는 나에게 잘 맞았다”고 전했다. 유학시절의 모습을 ‘물 만난 물고기’에 비유할 정도로 그는 즐겁게 유학생활을 보냈다.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생태학 석사를,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석·박사를 수료한 뒤에는 미시간대학교로 향했다. 최재천 원장은 그곳에서 주니어펠로우(Junior fellow) 과정을 거쳤다. 1년에 4명만 뽑는 주니어펠로우에게 부과되는 의무는 단순했다.한 달에 한 번 시니어펠로우(Senior fellow)들과 저녁을 먹으며 학문에 대한 토론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시기를“학문을 하는 학자의 입장으로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또한 최 원장은 “그 외에도 우리끼리 수요일 점심에 모여 각 분야에 대해 한 사람씩 발제를 했다”며 “3년 동안 약 200여개의 주제에 대해 귀동냥을 하며 통섭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실제로 주니어펠로우 과정에서는 생물학, 물리학을 비롯한 영문학, 철학 등을 전공한 다양한 학생들이 모여 ‘철학자들은 왜 글을 어렵게 쓰는가’와같은 참신한 주제로 토론을 벌인다.그는 “주니어펠로우 제도를 한국에도 꼭 도입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남성 최초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상하다

그의 활동은 학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최재천 원장은 ‘사회참여형 학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행보를 해왔다.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호소글을 보내 동강댐 건설 전면 백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각종 발언과 헌법재판소 자문을 통해호주제 위헌 판결을 이끌어낸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에 남성 최초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5년호주제가 폐기되기 전까지 한국의 가족관계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연결되는 남계혈통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최재천 원장은 호주제의 위헌여부를 심사하는 헌법재판소의 공개변론에 출석해 이에 대한 과학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는 “세포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미토콘드리아는 온전히 암컷으로부터 비롯된다”며 “한국의 호주제는 생물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는 말을 했다. 순수한 과학적 사실로만 호주제 위헌 판결의 결정적인근거를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제도의 폐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성주의 운동이 더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최재천 원장의 의견에 대해‘자연주의적 해석의 오류’라는 비판도 있다. 쉽게 말해 ‘과학적인 사실로부터 당위성을 끌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최재천 원장은 “과학적인 사실을 통해 남녀 간의 관계가 여자에게 유리하게 가야한다는 당위성을 제시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에 덧붙여 그는 “물론 자연주의적 오류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으나 내가 이끌어낸 당위성 자체가 오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그는 동성애 또한 과학적으로 접근할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최 원장은“가치 판단은 과학자가 하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보편타당한 관찰 결과만을 제시한다”고 전하며 “자연계의 거의 모든 동물에게 상당히 일정한 비율로 동성애가 나타난다”고 말했다.종교적인 이유로, 윤리적인 기준에 의해 무작정 동성애를 잘못됐다고 낙인찍는 것에 의문을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윤리라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 ‘인간’이라는 동물이 일종의합의를 본 기준”이라며 “윤리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기준이라면 그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자연계의 다른 모든종에 존재하는 속성을 무시하는것은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정리했다. 또한 그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해소도 어쩌면 자연의 섭리에 대한 과학적 이해로부터 재출발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밝히며 활발한 논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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