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인터넷은 대학생들이 한강에 ‘과자 봉지 뗏목’을 띄운 사건으로 시끌시 끌했다. 봉지 과자 안에 들어있는 충전재 용 질소가 너무 많다는 것을 비꼬기 위 한 재치 있는 퍼포먼스였다. 어느 정도 성 과도 있었다. 생색내기든 아니든 ‘오리온’은 제과업계 최초로 포장재를 개선한다고 발표했으 며, 국회입법조사처도 제과업체들이 과 대 포장을 제품 가격 인상의 핑계로 삼는 다고 지적했다. ‘과자 회사들 보고 있냐 ㅋㅋㅋㅋ’라는 기사 베플을 보고 제과업 체들이 아니라, 난데없이 편집실에 있던 내가 뜨끔했다. 왜 그랬냐고?
패러디·놀이 문화의 이면
기자는 수사물에 나오는 탐정처럼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사건의 모든 면모를 살 펴야 한다는 것을느꼈다. 회의감이 들었 다. 나는 명색이 기자라고 하면서, 여전 히 ‘웃기고 자극적인 화제에만 귀를 기울 이는’ 23세 김한별 본연의 모습에 충실한 것이 아니었을까? 과자 봉지 대학생들은 나로 하여금 ‘기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건 아닌지 반성하게 했고, 나아가 ‘재미있 는’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사회 분위기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큰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인터넷 커뮤 니티에는 각종 패러디 사진과 영상들이 등장한다. 패러디 놀이 문화는 풍자를 통해 사회의 주의를 환기하고, 중요한 이 슈가 묻히지 않게 한다는 순기능을 갖고 있다.
통찰을 제시하기도 하고, 패러디의 원 목적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카타르시스 까지 제공하기도 한다. 실제로 패러디를 통해 여론이 조성되어, 드물지만 문제 해 결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는 범죄가 확정된 범인의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를 하지 않았는데, 이는 ‘모자이크 위치’에 대해 네티즌들이 끊임없이 분노 하고, 비꼬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놀이 문화를 통해 특정 이슈가 환기되고,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웃기지 않으면’ 묻힌다는 것이다. 정당한 수단을 통해 내 불편을 호소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아무리 질소가 많다고 소비자 게시판에 항의해도 과자 업계는 물론이고 감시 의무가 있는 정부 기관에서조차 특별한 행동에 나서지 않 았다. 국내 초콜릿에는 ‘카카오버터’가 아 니라 ‘식물성 유지’가 들어간다는 사실이 알려져 소비자 게시판을 통해 항의가 물 밀 듯 이어졌지만 과자업계는 ‘한국인의 입맛에는 식물성 유지가 맞다’는 해괴망 측한 변명을 내놓았다.
물론 모든 사람의 의견이 다 받아들여 지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이해관 계가 다 다르고 ‘합리적인’ 의견의 기준 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한 재미있고 웃기고, 참신한 것에 관심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지만 ‘진상 고 객’들의 행동을 생각해보라. 또는 불편했 던 점을 얌전히 올리면 형식적인 사과만 받지만, 고함을 지르며 세게 나가면 무료 이용권이라도 받는다.

는 각종 정치·사회적 사건들을 풍자하는 미국 TV프로그램 을 따온 것으로 패러디 문화 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 문화의 극단적인 형태는 조롱 문화
점잖게 원칙대로 행동한 사람들은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다. 이러한 삐뚤어진 서비스도 어쩌면 놀이문화가 변형된 것 이 아닐까? 원칙에 정해진 대로, 소비자 게시판에 내 목소리를 내면 관계자들이 들어주지 않으니 블로그에 올리고 유명 게시판에 올린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 고 기사화 될 정도로 여론이 들끓으면 그 제서야 대응해준다.
이렇게 재미있는 것, 시끄러운 것에만 귀를 기울이는 문화가 극단적으로 전개되어 나온 것이 조롱하는 문화 아닐까? 다른 사람의 진지한 목소리 를 무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무슨 상황이든 인증하면서 내 경험이 제 일 독특하고 내 목소리가 제일 크다 는 것을 과시하는 문화 말이다. ‘내 생 각, 내 경험이 더 대단하다’고 말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시덥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는 생각에서 나오 는 행동이다. 이런 문화의 극단적인 형태는 최근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단식투쟁을 벌인 유가족 앞에서 ‘폭식 투쟁’을 벌인 네티즌들의 모습 이다.
‘단식 투쟁’은 분신, 자살 등처럼 가 장 절박한 자리에 위치한 사람이 자신 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취하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역시 ‘폭식’이라는 간단하고, 또 그 자 체만 보면 재치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조롱 당했다. 놀이 문화의 극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비행기를 돌리게 된 계 기로 ‘땅콩’이 지적되자 ‘땅콩’이라는 이름을 쓰는 트위 터 계정이 꾸준히 분노의 트윗을 날려 네티즌들의 뜨 거운 호응을 얻었다. 조 전 부사장 당사자의 사진 역시 게임 시작 화면에 합성되는 것에 모자라 여러 TV예능 프로그램 패널들 입에도 오르내렸다.
중2병’, ‘선비질’도 비슷한 맥락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양심적으로 생 각해봐야 할 것은, 조롱을 일삼는 사 람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은 ‘다른 사람의 진지한 목소리에 귀 기울 이고 있는지’이다. 나 역시 이 비판에 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중교통을 이 용할 때나, 체험 기구를 이용할 때, 직 원이 안전 규정을 말할 때 진지하게 듣 고 기억하는가? 최근 여러 사건사고들 이 터지기 이전, 안전 규정을 제대로 살펴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치·사회를 풍자하는 도 재미있으니 보지만, 한 번 보고 는 금세 다시 잊지 않는가? 좀 더 생각 해보면, 인터넷 세상에서도 조금 진지 한 얘기를 하는 사람한테는 ‘선비질’한 다고 말하기도 하며, 감정적으로 조금 진지해질라치면 ‘중2병’딱지를 붙인다.
그런데 김소월, 황순원, 윤동주가 처녀작들을 내놓은 것은 그들 나이 각 각 18살, 16살, 15살이었을 때다. ‘중2’ 의 감성이 폭발해 작품의 탄생을 이끈 것이다. 이러한 경우도 있다. 한 행사 뒤풀이 자리에 온라인 언론사 대표와 학생들이 있었다. 이 때 누군가 대표에 게 ‘한 말씀’을 장난삼아 요청하자 대 표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안 돼. 요 즘 젊은이들한테 말 길어지고 그러면 ‘꼰대’라고 욕먹어.” 농담처럼 나온 얘 기였지만, ‘요즘 젊은이’ 입장에서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 말이었다. ‘갑질’, ‘꼰대질’이 이슈가 되면서, 혹시 진심으 로 하는 조언조차 일찌감치 ‘꼰대’라고 딱지 붙이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 건 아닐까?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다 들을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귀에 착착 감기고, 웃음이 터지는 재치 있는 목 소리가 아니더라도 절박하고 관심을 요하는 목소리 중에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한 번쯤 차분히 귀기울여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꼰대질’이 향하 는 제일 첫번째 대상은, <서울대저널> 김한별 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