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서울 성동구의 어느 공장. 선반 위에 놓여 있던 무거운 추가 날아와 드릴 작업을 하던 노동자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사고였다. 누가 어떻게 손을 볼 틈도 없이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숨졌다. 어렵고 힘든 노동 현장에서 평생을 살아가겠다며 영세 공장으로 들어간 조정식 열사는 그렇게 산업재해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치열했던 80년대 학생노동운동의 표상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우리나라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서울대저널>에서는 올해 5월 24일로 26주기를 맞는 조정식 열사의 발자취를 따라 당시 학생운동의 모습을 조명해보았다.
학생운동에 눈을 뜨다
1982년에 경북대사대부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조정식 열사는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어릴 때부터 그의 꿈은 과학자였다. 주변에서 의대를 가라 해도 물리를 공부하겠다며 꿋꿋이 자연대 제2계열에 들어가 물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가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전두환 정권의 거센 탄압으로 인해 학생운동이 많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학교 곳곳에는 사복 경찰들이 배치돼 있었고,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학생들은 체포영장도 없이 바로 연행됐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1980년 ‘서울의 봄’을 경험한 학생들은 민주화의 꿈을 품고 학내에 많은 비밀 서클을 조직하여 학생운동 세력을 결집해 나갔다.
조정식 열사가 우리나라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뜨고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 출발점도 바로 그가 1학년 때 가입했던 서클이었다. 그가 가입했던 서클 중에는 ‘휴먼사이언스’와 같이 공개적인 서클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이름도 없는 비공개 모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학생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공부하는 것에 대한 감시가 특히 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복경찰의 감시를 피해 비좁은 자취방에 모여 우리 사회의 현실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했으며 앞으로의 학생운동을 계획했다.
동생 조태식씨는 그가 1학년 때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고 나서 더욱 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고 기억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기 2년 전인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은 정부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그 전모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조정식 열사와 함께 입학했던 대부분의 학생들 역시 그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와 같이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여영학(식물 82)씨는 “광주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 알았지, 그 일의 실체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광주를 비롯한 여러 호남 지역 출신 학생들을 통해 곧 광주항쟁의 실태가 알려졌고, 이를 들은 학생들은 분노했다. 조정식 열사도 유인물을 통해 그 일에 대해 알게 되었고, 정부에 사건의 전모를 밝힐 것을 요구하며 강하게 투쟁해 나갔다.
조정식 열사는 1984년에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당시에는 많은 학생들이 제적되었는데, 대부분이 학생운동에 전념하느라 학사 관리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보일러병으로 자원해서 기술을 익혔다. 제대 후에 있을 공장 생활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80년대의 학생운동가 중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공장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노동운동을 통해 계급투쟁에 앞장서겠다는 등의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빠르게 산업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고통스럽고 눈물겨운 삶을 살아가는 민중 곁에서 같이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3년여 간의 옥살이, 그리고 다시 돌아간 공장
제대 후 인천의 한 영세 공장에서 근무를 시작한 조정식 열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86년 11월 ‘반제동맹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서울의 구로공단, 인천의 주안공단 등 수도권 근처의 여러 공단에서 일을 하며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끼리 모여 대학 서클에서 하듯이 사회 문제를 논의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들은 함께 러시아혁명이나 항일운동 등에 대한 책을 읽으며 앞으로의 사회변혁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토론하곤 했었다. 이러한 소모임들은 전두환 정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각 공장에 흩어져 있는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기도 했다. 이적 단체나 반국가 단체의 혐의를 씌워 그들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조정식 열사를 비롯한 20여 명의 노동운동가들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반제동맹당’을 결성하려 했다며 이들을 출근길에 연행했다. 그들은 경기도 경찰국 대공과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 학익동 구치소에서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구속영장도 없이 20일씩 구금한 채로 수사를 했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재판 결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함께 붙잡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조정식 열사는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88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그는 다시 노동자들의 곁으로 돌아가고자 이듬해 5월 서울 화양동에 있는 ‘영전기계’의 공원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5월 24일 오후 2시 30분쯤 산업재해로 참변을 당했다. 선반에 헐겁게 물려있던 중심추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다가 튀어나와 그의 머리를 친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후 줄곧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해 온 조정식 열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동료, 아들, 형 조정식’을 기억하다
동료들은 항상 대담하고 용감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여영학(식물 82)씨는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에게 시위란 게 참 두려운 일이었을 법한데도, 정식이는 시위마다 항상 앞장을 섰다”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구금과 고문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열망이 더 컸던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노량진역 부근에서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던 조정식 열사를 경찰이 갑자기 연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도망가거나 숨지 않고 오히려 시민들에게 더 큰 소리로 연설을 했다. 끌려가면서까지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를 보이던 그의 모습에 감동 받은 주변의 시민들까지 합류해 “아무 잘못도 없는 청년을 왜 끌고 가느냐”며 경찰에 거세게 항의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토록 강건했던 그도 자신의 행적으로 인해 가족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볼 때에는 가슴이 미어졌다. 경찰이 의도적으로 가족들에게 접근해서 귀찮게 하고 ‘당신 아들 때문에 그렇다’며 협박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삼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조정식 열사는 부모님을 부양하고 동생들을 잘 돌봐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투철했다. 하지만 조국의 어려운 현실을 눈앞에 두고 가족들만을 챙길 수 없었기에 언제나 마음 아파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미국에서 일하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저는 아직 아버님께 못난 아들입니다. 집안의 장남이면서도 아버님을 그 머나먼 땅에서 고생하시도록 만들고 가족들에게 본의 아니지만 온갖 슬픔과 고통을 주었던 점에서 저는 못난 아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가 걷고자 하는 길을 훌륭하게 걷고 있지도 못하다는 점에서 저는 더욱 못난 아들입니다. (중략) 그렇지만 저는 불의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 어떤 시련과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 굽히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만일 언젠가 제가 나라를 위해 조그마한 업적이라도 남긴다면 그것은 오직 아버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의 결과라는 것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겁니다.”
조정식 열사는 언제나 자신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성실한 노동자로서 한평생 몸으로 벌어 가족들을 먹여 살린 아버지는 그의 우상이었으며 존경의 대상이었다.
또한 그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언제나 동생들을 챙겼다. 운동을 하기 위해 안경을 낄 수 없었던 남동생에게 자신의 생활비를 쪼개서 콘택트렌즈를 사주기도 했다. 당시 콘택트렌즈는 그의 가정 형편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동생 조태식씨는 “자기는 괜찮다며 선뜻 돈을 내어주었지만, 막상 형님의 자취방에 가보니 방 곳곳에 곰팡이가 잔뜩 피어있을 정도로 어렵게 살고 있었다”며 열사의 모습을 회상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약한 자들 곁에서 함께 싸워온 그의 열정은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열사는 떠나고
조정식 열사는 작업장에서 바로 숨졌지만 가족과 동료들은 그를 쉽사리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우연적 사고가 아니었다. 빠른 성장만을 중시하고, 노동자의 인권은 가볍게 생각하던 당시 우리나라의 기업 환경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수도권 근처에 수많은 공업 단지가 조성되고 매일매일 새로운 공장이 설립되었지만 아무도 노동자의 안전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비슷한 산업재해는 계속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족과 동료들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노동 환경이 더 나아지길 바랐다. 더욱 많은 사람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장례 기간은 계속 길어졌다. 그가 숨졌단 소식을 듣고 그의 학교 친구들, 함께 투쟁했던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애도했다.
매년 그의 기일이 돌아오면 추모 행사가 그의 주검이 묻힌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렸다. 작년에는 이천민주공원으로 이장을 하여 올해는 5월 23일에 새로운 곳에서 추모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열사가 그토록 증오해마지않던 군사독재시절은 끝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2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그저 사람답게 살게만 해달라며 호소하는 사람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지금, 과연 열사가 꿈꾸던 그 세상이 오긴 했는지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