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액트 오브 킬링>이 개봉한 후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특이하게도 영화를 보지 않은 구성원에게 영화를 소개할 때 그 양상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영화의 제작배경에 대해 설명하거나, 영화의 장면에 대해 ‘묘사’하거나, 침묵하는 것. 누구도 한 장면을 묘사하고 난 뒤 이 장면이 무엇을 뜻한다는 ‘설명’을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누군가 인물이나 결론에 대한 질문을 할 때도, 대답은 언제나 (각기 다른) 특정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는 영화의 난해함에서 비롯된 것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단지 영화를 보고난 후 ‘말할 수 없는’ 상태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오로지 그 ‘말할 수 없음’에 대해 말하는 글이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은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대규모 학살을 다루고 있으며,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데뷔작인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단번에 국제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신예감독의 자리에 오른다.
역사적 사실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경우 일반적으로 ‘추적’의 형태를 띠기 마련이다. 즉, 가해자들은 인터뷰를 기피하고, 제작진들은 피해자들을 인터뷰함으로써 가해자들이 은폐하고 있는 사건의 진실을 탐색해 나가는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은 우선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집단학살을 다루는 기존의 역사 다큐멘터리와 결정적으로 구별된다. 피해자(진실) 대 가해자(은폐) 구도가 완전히 뒤집어질 수 있는 까닭은 인도네시아에서 여전히 군부세력이 득세하고 있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피해자들이 증언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액트 오브 킬링>에서 이 전도된 구성 원리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채택되었다는 메이킹 필름용 정보로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 원리는 곧바로 <액트 오브 킬링>을 유례없이 경악할 만한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다음의 연출방식으로 이어진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피해자들 대신 가해자들을 인터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신들의 학살 현장을 ‘재연’해달라는 제안을 한다.
학살, 재연, 그리고 찬양
영화는 준군사조직과 민간조직폭력배들이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자신들이 벌인 학살을 자랑스럽게 들려주었으며, 그들이 “왜 그랬는지” 알기 위해 가해 당사자들에게 사건의 재연을 부탁했다는 기획의도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질문은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문제들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끝내 무의미한 것으로 남게 되는데, 왜냐하면 영화가 끝난 시점에서도 관객은 도무지 그들이 (학살이든 혹은 자랑스러운 스토리텔링이든) “왜 그랬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을 기존의 다큐멘터리와 구별짓는 추가 질문들을 연쇄적으로 생산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 질문은 이를테면, ‘재연’이라는 형식 속에서 가해자들을 인터뷰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효과가 발생하고 있는가? ‘왜 그랬는지’가 설명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라면 우리가 이 다큐멘터리에서 보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등등이다.
영화에서는 여러 종류의 영화가 등장한다. 가해자들이 직접 창작하고 있는 영화, 과거 그들이 탐닉했던 헐리우드 서부극, 학살을 합리화하기 위해 제작되었던 반공선전영화, 그리고 최종적인 심급에서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액트 오브 킬링>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관객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접할 때 각기 다른 독해방식을 적용한다(로제 오댕). 이에 따르면 독해의 지침으로서 전자의 세 작품에는 허구성을, 이를 기록하는 <액트 오브 킬링>에는 현실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가 전개되면서 관객은 여러 차례 이 다큐멘터리의 현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장면들이 가해자들의 재연을 바탕으로 한 창작영화에서가 아니라 최종심급인 기록물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영화촬영소식이 들리자 정부고위관리는 그들을 고무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주택을 불태우는 장면을 촬영하는 곳에 직접 방문하기도 하고, TV토크쇼에서는 안와르 콩고와 헤르만 코토를 초대하여 그들이 발명해낸 철사교살을 창의적인 살해 방식이라고 찬양한다. 이러한 ‘현실의 기록’에 비하면 차라리 그들이 창작한 조야한 형태의 허구들이 더 큰 현실감을 주는 셈이다. 즉, 영화에서는 과거의 학살과 현재의 재연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의미의 ‘Act’로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원래 있었어야 할 구분막은 윤리이다.
이러한 ‘허구성’은 실존인물로서 가해자들, 특히 그 중심인물인 안와르 콩고의 존재방식 자체를 보여주기도 한다. 가해자들의 심리는 여러 층위로 분열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애국자로 자처하거나, 영화에서 여러 번 언급되듯 자유인(free man)으로서의 갱스터라는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이따금은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피해자의 입장에 자신을 두고 이런저런 논평을 하기도 한다.(물론 영화의 흐름을 바꿀 정도는 아니다.) 안와르 콩고는 자신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것을 잊기 위해 춤과 노래, 술, 마약에 의존했다고 말하지만 살해현장 바로 그곳에서 산뜻한 흰 바지를 입고 사뿐사뿐 차차차를 추는 안와르 콩고의 천진한 모습을 보는 관객은 그의 행위나 말 어떤 것에서도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의 감정이나 내적 원리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그의 눈물도, ‘죄책감’ 내지 ‘후회’라는 이름으로 편리하게 처리될 수 없는 구역질도, 젊은 시절부터 영화에 심취했던 안와르 콩고가 해당 상황에 적절하게 ‘재현’해낸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죄책감’을 연기하기 위해 치밀하게 의도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것이 연출된 행동인지 아닌지, 진위 여부에 대한 판단 자체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진다.
끔찍한 것의 자명함이 주는 충격
영화의 최초기획의도가 어떠했든지 간에 <액트 오브 킬링>이 남기는 것은 가해자들이 처한 상황이나 맥락을 탐색하고 이해하여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식의 화해요청도 아니고, 자신의 행위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함으로써 가해자들의 죄책감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성찰도 아니다.(감독은 일정부분 후자의 효과를 의도한 것 같다. 그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살해현장을 다시 방문한 안와르 콩고가 격렬하게 구역질 하는 장면을 두고 그가 재연을 통해 진실을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반응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가해자들이 승리한 세상에서 그들은 정당화에 대한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악에 대한 이 순진무구하기까지 한 감각을 수식할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이 실제로 남긴 것은 괄호 칠 수 없는 간극이자 심연이다. 허구로까지 느껴지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 그 잔혹한 현실의 자명함. 아도르노의 표현을 따르면 끔찍한 것이 아니라 끔찍한 것의 자명함이 주는 충격. 이 공포 앞에서 언어로 된 모든 다른 표현들은 불가능해진다. 완곡하게 말해 관객은 ‘언어화’의 과정 역시 가장 인위적인 의미에서의 Act 이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셈이다.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 국가 덴마크, 노르웨이, 영국
연도 2013 런타임 159min 각본 조슈아 오펜하이머 Joshua Oppenheimer 출연 Sakhyan Asmara 외
송혜민(독어독문학과 박사과정)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비교문학 석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동 대학원에서 독어독문학과 박사과정에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으로 만족할 걸 왜 공부하겠다고 설쳤나 후회하면서 살아가는 대학원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