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킬미,힐미>(MBC)와 <하이드 지킬,나>(SBS)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조건들이 필요할까? 한국의 로맨스 드라마들은 입을 모아 단 하나의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어떤 역경에도 당신을 향하고야마는 지고지순한 마음.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 로맨스 드라마가 제시하는 사랑의 철칙이다. 최근의 드라마들이 점점 더 많은 CG를 동반한 판타지 요소를 투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철칙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만 상대가 귀신을 보거나(<주군의 태양>), 반인반수이거나(<구가의 서>), 외계인이더라도(<별에서 온 그대>), 드라마 속 사랑은 온전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2015년을 연 두 개의 로맨스 드라마, <킬미, 힐미>와 <하이드 지킬, 나>는 작년 <괜찮아, 사랑이야>의 탄력을 이어받아 심각한 정신 질환도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낭만적 사랑의 이면
<킬미, 힐미>와 <하이드 지킬, 나>는 해리성 인격 장애, 즉 다중인격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두 드라마 모두 다중인격을 지닌 남자가 한 여자와 운명적으로 얽히게 되는데 서로 다른 인격끼리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삼각관계인 듯 삼각관계 아닌 삼각관계가 이야기의 주축이 된다. 이 두 드라마를 빌어 사랑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 짚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미 수많은 철학서들부터 여성잡지들까지 이 주제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으니까. 두 드라마도 남자 주인공의 인격이 갈라지거나 통합되게 하는 열쇠를 여자 주인공이 쥐고 있다는 설정을 통해 사랑이란 자아를 무너뜨리거나 정립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경험임을 은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왜 드라마 속 사랑의 고난이 점점 커지는가?’이다. 더 자극적인 스토리를 향한 경쟁이라는 제작 차원의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답은 현실 속 우리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사랑은 힘들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처럼 계급과 같은 강제적 조건이 없고 ‘쿨’한 만남이 지천인 이 시대에 왜 사랑이 힘드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이 힘들다. 전통적 가치와 강력한 도덕적 지표가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연애는 철저하게 사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었고 사랑의 모든 과정은 (그 정체가 모호한) ‘마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앤서니 기든스와 울리히 벡은 위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겪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통적 지표가 부재한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거대한 자유를 떠안으면서 삶의 수많은 선택지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 자유로운 선택의 한가운데에 사랑의 문제가 놓여있다. 내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 상대를 고르는 것은 나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선택되는 문제다. 이렇게 사랑이 개인의 선택과 책임의 영역이 되면서 자신만의 오롯한 선택과 책임이 두려운 이들이 본의든 아니든 썸도 타고 어장도 관리한다. 그런데 그럴수록 한편에서는 ‘낭만적 사랑’의 가치가 더욱더 높아지는 역설이 생겨난다. 끊임없이 존재론적 불안에 휩싸이면서도 <미생>과 같은 사회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현대인들은 결국 내 자아를 굳건히 세워줄 수 있는 타인의 존재를 갈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를 위안케 하고 치유하는 누군가의 무조건적 사랑에 힘입어 또 하루를 버텨낼 수 있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을 구속하는 물적 조건이 느슨해질수록 정신적 조건은 강조된다. 그래서 드라마 속 사랑은 점점 더 무조건적인 낭만성을 띠게 되고 이 낭만을 증명하기 위해 주인공들 앞에는 점점 더 가혹한 장애물이 세워진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에서 모든 악조건을 감내하는 사랑과 자신의 쩨쩨한 연애를 비교해보며 ‘나는 사랑이 아닌 걸까’하고 의심해보곤 한다.
사랑을 ‘신흥종교’라고 한 울리히 벡의 말처럼 사랑은 독실한 믿음과 수행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를 죽일 수도(킬미), 살릴 수도(힐미) 있는 사랑의 위대함을 감히 가늠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낭만적 사랑의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속성이 과연 미덕이기만 한 것일까? 혹시 우리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불안을 속이기 위해 낭만적 사랑의 광신도로 마취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드라마처럼 극화된 낭만적 사랑만이 사랑이라 여기고 내 곁의 소중한 기회나 사람들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소정(언론정보학과 석사과정)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과정에서 영상 커뮤니케이션과 문화연구를 전공 중이다. 한국 미디어의 재현, 관습, 규범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텔레비전 그렇게 많이 봐서 어디 쓸 거냐고 했는데, 이제는 그걸로 학위를 받을 계획까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