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 시대의 로맨틱

자본주의 시대의 사랑 타령을 위하여

 “내일, 너, 로맨틱, 성공적”이라는 다 쉬어빠진 일련의 문구가 누구에게서 나왔으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와서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설 따위 믿지 않는 그분께서는 단 한 번의 카톡으로 “이□□도 섹스하려고 저토록 노력하는데… 못난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나 새끼 같으니라고”라는 주옥같은 트위터 반응을 이끌어냈다. 아, 폭발적인 루저 감수성이 터뜨린 이 깨알 같은 자학 개그의 웃픔이라니. (일단 로맨틱과 섹스 사이의 경계 혹은 교집합을 확정하는 작업은 인류 멸망의 날까지만 미루어두도록 하자.)

 

 흥미롭게도 카톡 원문과 해당 트윗은 정서의 동류항을 공유하고 있다. 카톡에서 ‘로맨틱’은 직관적으로 ‘성공적’의 여부로 연결된다. 한편 트윗에서는 ‘로맨틱’하거나 ‘성공적’이지 못한 자신의 상황을 ‘노력’은커녕 ‘못난데다 게으르기까지’한 개인의 능력 문제로 환원하고 있다. 그들의 동류항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로맨틱은 성공 혹은 실패의 문제이다. 로맨틱에 있어 성공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못나고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 경쟁에서 밀려난 개인의 능력 없음을 뜻한다. 물론 이는 과잉 해석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독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내가 솔로레타리아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애인 유무, 그리고 그 애인의 ‘급’을 그 사람이 지닌 능력의 척도로 생각하고 등수를 매기는 일에 익숙해 있다. 예를 들어, 나에게는 페이스북에서 “네 다음 커플주아지”라는 댓글을 꾸준히 달아주는 친구가 있다. 커플주아지는 일종의 연애 계급을 가리키는 말로, 어원을 고려하건대 아마 솔로레타리아라는 또 하나의 계급과 대립 관계에 놓여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그의 언어는 사회를 양분하고 있다. 그것은 애인이 있는 자가 상층을 차지하고 없는 자가 하층을 차지하는 사뭇 수직적인 위계질서다. 친구가 말도 안 되게 화려한 스펙의 애인을 데려오면 왠지 졌다는 기분이 들기 십상인 것이라고 할까.

 

 커플주아지, 혹은 솔로레타리아 내부에서도 다 똑같은 커플이나 솔로가 아니다. 솔로레타리아는 과거의 연애 경험을 통해 입증되는, 연애 능력의 양적, 질적, 시간적 차이(예를 들어 “몇 명이나 사귀어 봤어? 예뻤냐? 키 커? 마지막 연애는 언제?”)에 따라 줄 세워진다. 지금 연애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점에서 솔로에 비해 출발선이 앞서 있는 커플주아지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계층이 분화된다.

 

 위의 구도에서 상층으로의 이동 가능성은 오로지 개인의 외모, 패션, 학력, 재력, 센스, 유머… 등의 총체로서 존재한다고 상상되는, 이른바 연애 능력의 함양에 달려 있다. 설사 지금 솔로라 하더라도 능력이 생기면 금방 애인이 생길 것이다. 원샷을 못 하면 연애도 못 한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그게 원샷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능력을 키워 더 큰 로맨틱과 성공적을 향해 저 위로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앞으로 되돌아가 처음의 전제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과연 ‘로맨틱’이 ‘성공적’이라는 기준으로 재단되는 일이 합당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성공적’이라는 유령이 떠도는 시대의 문제는, 이미 주어진 기준에 순응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제치고 올라가는지를 능력이자 ‘성공적’의 척도로 삼는, 경쟁을 위한 경쟁을 종용하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있다. 만사를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문제로 돌리는 사고방식과 경쟁에 대한 강박은, 그러한 경쟁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세력을 위해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린다. 도태의 두려움에 무작정 달리기만 해서는, 달려야 하는 방향이 누구를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결정되는지가 은폐되어 버리고 만다.

 연애는 트로피 쟁취전이 아닐진대, 왜 우리는 어화둥둥 사랑놀음에서마저 주어진 코스를 주파하느라 바빠야 하는가. 실상 연애에 있어서의 ‘능력’이란, 등수에 목매며 내 의지와 무관히 정해져 있는 코스를 그대로 수행하는 일에 불과하다. 그 어떤 관계가 되었든, 연애는 두 사람의 당사자가 (실은 세 사람 이상의 관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연애라 부르기로 합의한 행위일 따름이지, 경쟁적으로 따내야할 성취 지위가 아닌 것이다.

오피니언_자유1_로맨틱_이미지_이 사진을 일러스트 형식으로 바꿔주실 수 있으신가요.jpg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의 펜 끝에서 흘러나온 텍스트의 카리브해는 그야말로 로맨틱하다. ⓒPhotograph : Isabel Steva Hernandez(Colita)/Copyright Corbis

자본주의적 연애로 뭐 하겠노, 대공황 터지겠지

 20세기 문학사에 길이 빛날 순정남이 두 명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플로렌티노다. 대호황기의 욕망이 들끓는 뉴욕을 배경으로, 개츠비는 아득바득 자신의 스펙을 쌓아올리며 데이지를 쟁취하려고 한다. 자본주의적 경쟁 질서를 충실히 내면화하며 사랑을 쟁취하고자 했던 개츠비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개인적으로는 한 발의 총탄이었고, 사회적으로는 대공황의 도래로 인한 재즈 시대의 종말이었다.

 플로렌티노는 다르다. 그는 애써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페르미나를 뺏으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51년 9개월하고도 4일 동안이나 그녀만을 기다린다. 페르미나는 다 늙은 그녀와 플로렌티노의 사랑이 성공적일 수 없다는 걸 알지만, 플로렌티노는 그런 그녀에게 그들의 생이 다할 때까지 강물을 오르내리는 여행을 할 것을 제안한다.

 미리 찍어낸 연애를 능력에 따라 소비하는 듯 한 세태 속에서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생각한다. 플로렌티노의 사랑 방식을, 성공적 시대의 로맨틱이라 이름 붙일까 싶다. 그 놈의 ‘성공적’이란 것이 사람들을 징그럽게 괴롭히고 닦달하는 세상 속에서, 플로렌티노만큼의 로맨틱을 희망할 수는 없을까.

김현우(언어학과 13)

로맨틱_필자.png

 

한량 워너비라고 말하면 겉멋이라도 챙길 수 있을 줄 아는 룸펜이자 부모님 등골브레이커. 대학에 입학한 이래 별로 생산적인 일은 손대보지 못했으며, 이렇게 살다가 학사는 될 수 있을는지 딴에는 심각하게 고민이라지만 정작 진지하게 진로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박살난 학점과 함께, 언어학-노어노문학 복수전공이라는 인문대 감금 루트를 선택, 청년 실업률 수직 상승에 기여하고자 대책 없이 고군분투중이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주택시장과 청년 세대

Next Post

총학 등, 5516 저상버스 재운행 촉구 기자회견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