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플래쉬(Whiplash)
감독 다미엔 차젤레 국가 미국 연도 2014 런타임 106분 출연 마일즈 텔러 외
어쩌면 길은 여러 갈래가 아니라 여러 겹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좋은 1인칭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새삼 이런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는 ‘나’에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돌아오되, 그 돌아온 ‘나’가 출발했던 ‘나’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멀어지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가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단지 이것과 저것으로 한없이 갈라지는 길의 정복기가 아닌, 갈라짐 바로 밑의 들끓음에 대한 체험기. 이 들끓음의 정체에 대해서라면 프로이트를 참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에서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충동을 말했다. 좋고 필요한 것을 채워 삶을 유지하려는 것이 쾌락원칙이라면, 죽음 충동은 이런 삶의 와중에 도사리고 있는, 이 모든 난리들의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힘이다. 쾌와 불쾌 사이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나를 향해 돌진하는 반복적인 움직임. 이 움직임에는 분명히 그런 나의 죽음을 거듭해서 요청하는 악마적인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단지 살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들끓고 있는 여러 겹의 나들을 향한 것이다. 그 모든 나들이 잦아든 나의 삶.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향하는 과정에서 삶의 겹들이, 그 겹에 관한 이야기들이 생겨난다.
말이 길어졌다. 사실 <위플래쉬>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려 했다: 드럼을 치던 소년은 드럼을 치는 청년이 되었다. 이 사소하고 뻔한 이야기에 무엇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세 번의 죽음, 그리고 탄생
드럼을 치던 소년은 어떻게 드럼을 치는 청년이 되었는가. 핵심은 ‘어떻게’에 있다. 이 과정 전체를 보여주기에 영화에서의 시간은 매우 짧다. 겨우 한 음악학교에서 일어난 봄, 여름, 가을 동안의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이 영화를 단지 성장 영화로 보거나, 예술가 영화로 보는 것은 어딘가 미심쩍다. 성장했다고 하기엔 통과해 온 시간이 너무 짧고, 지독한 고난을 거친 예술가의 대탄생이라 추어올리기엔 그저 단 한 번의 연주가 있었을 뿐이다.
그럼 이 영화에서 무엇을 더 읽을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세 번에 걸쳐 ‘피의 장면’이 선명하게 클로즈업 된다. 위대한 드러머가 되고자 했던 어리숙한 한 소년(앤드류 네이먼 역, 마일즈 텔러)은 큰 피를 흘렸다. 이 피의 장면은 낭자하게 뿜어 나와 철철 흘러넘치는 그런 피와는 달랐다. 하얀 얼음이 담긴 물통 안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붉은 액체였고, 이미 온 몸을 뒤덮고 있는 피딱지였고, 큰 공연장에서 드럼을 치던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어딘가에서 솟아오른 핏방울이었다. 고요하게 몸 안을 돌다 그 몸을 뚫고 나온 피는, 위대한 드러머를 향한 네이먼의 야망이 밖으로 튀어나온, 살아있음의 증거이자 상처의 흔적이었다. 요컨대 세 번의 피의 장면은 네이먼 안에서 일어난 세 번의 죽음을 보여주는 장치인 셈이다.
어떤, 혹은 무엇의 죽음이었는가. 드럼을 치던 소년은 어떻게 드럼을 치는 청년으로 거듭 태어났는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것이 관건이다. 첫 번째 죽음이 오직 ‘링컨센터에서 연주하는 최고의 드러머’를 향해 얼음통에 피투성이 손을 담그면서 자신에게 욕설을 날리면서까지 메인 드러머가 되고자 연습했던 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어린 시절’과의 단절이라면, 두 번째 죽음은 뛰어난 교수(테렌스 플렛처 역, J.K. 시몬스)의 인정에 사로잡힌 광기어린 괴물이 트럭에 부딪쳐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그런 채로는 더 이상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였을 때 벌어진 모든 ‘자의식’의 붕괴였다. 그리고 세 번째의 죽음은 카네기홀의 무대에서 도망쳤다가 되돌아온 네이먼이 무작정 시작해버린 연주 동안 일어난,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네이먼과 교수와 관객의 인정을 갈구했던 네이먼은 모두 죽고 오직 템포에 맞춰 드럼을 연주하는 자로서의 네이먼만 남은, 모든 ‘자신’의 사라짐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죽음이 네이먼 내부의 단절과 자의식의 붕괴로서의 죽음이었다면, 세 번째의 죽음은 이 모든 것을 이끌어왔던 삶에의 충동도 모두 가라앉은 죽음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는 다만 스틱을 잡았고, 그의 몸 안을 흐르는 템포를 따라 연주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죽음은 아버지와 교수라는 두 명의 아버지에 투사된 아이 네이먼의 자아 본능이 죽은 것이지만, 세 번째의 죽음은 위대한 드러머를 향한 열망마저 사그라진 채 오직 그 순간 드럼을 치는 손과 연주된 드럼 소리만이 존재하는, 모든 네이먼이 죽고 네이먼이라 불리는 드러머가 되살아나는 죽음이자 탄생이었다. 드럼을 치는 행위 속으로 모든 것이 잦아들어버린, 에로스(삶에의 충동)와 타나토스(죽음을 향한 충동)가 하나를 이룬 순간. 마지막 10분의 연주는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연주가 끝나면, 네이먼은 다시 네이먼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네이먼은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 플렛처의 제자, 위대한 드러머를 꿈꾸는 네이먼이겠지만, 모든 네이먼을 죽여보았던, 죽음으로써 살아있었던 그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미 네이먼은 네이먼 안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나의 템포에 맞춰
프로이트는 손자의 장난감 던지기 놀이를 보면서 죽음 충동의 실마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놀이의 핵심은 역전의 순간에 있다. 장난감을 던져 엄마를 사라지게도 돌아올 수 있게도 만들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알아차렸을 때, 그것은 아이에게 놀이(play)가 되었다. “서둘렀니 아니면 질질 끌었니?(were you a rusher or a dragger?)”로 시작된 플렛처 교수의 이 악독한 템포 훈련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네이먼의 모든 피나는 훈련과 죽음에 이르는 고통은 모두 이 ‘템포’에 맞추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러나 과연 네이먼의 발버둥이 단지 교수의 템포에 맞추기 위한 것만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영화는 폭군 교수의 폭력적인 훈육에 대한 영화일 뿐이며, 이러한 훈육의 아이러니함으로 초점이 흐려지고 만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네이먼이 연주해냈던 것은 안으로부터 분출되어 나온 네이먼 자신의 템포였다.
물론 그 연주는 네이먼의 피나는 연습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 연습을 반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서두름과 질질 끄는 사이를 오가며 바로 그 템포에 닿기 위해 피를 흘리는 동안, 그 연습이 네이먼의 놀이(play)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놀이치고는 무척 잔혹한 놀이였지만!). 오히려 교수의 무자비함은 이 놀이를 지속하기 위한 자극제였을 뿐이다. 그토록 고통스러운 연습 놀이를 반복하는 동안, 네이먼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껍질을 한 겹씩 벗겨내었기에 마침내 자신의 템포로 드럼을 두드려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단지 드럼과 재즈에 관한 음악 영화만으로 보이지 않았던 이유 또한, 영화 내내 흐르는 드럼 소리는 차라리 네이먼이 자신의 껍질을 벗겨내는 진통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격렬하게 들끓는 진통을 뚫고 그가 이른 곳은 물론 마지막 한 번의 연주였다. 영화는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진통이 남아있다. 지금 앓고 있다면, 우리 안에 살고 있는 겹겹의 우리가 들끓으며 벗겨지는 중일 것이다. 그 벗겨짐 속에서, 이 삶을 연주할 우리의 템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연습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모르는 사이에 벌써 몇 곡은 연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민주 (비교문학 석사과정 수료)

문학과 영화 사이, 철학과 문학 사이, 사람과 이야기 사이 등 주로 ‘사이’를 좋아한다. 그래서 여전히 많이 헤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