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리스탄의 승천(2005)>, <불의 여인(2005)> ⓒ국립현대미술관
얼마 전 막을 내린 국립현대미술관 1주년 기념전 『정원』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은, 깊은 어둠 속에서 빌 비올라(1951~)의 <트리스탄의 승천(2005)>과 <불의 여인(2005)>이 연이어 상영되는 순간이 아닌가 한다. 이 소장품들이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음악과 분리되고(위 작품들은 바그너의 오페라를 위해 만들어진 ‘트리스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정원』이 엮어내는 관조적 고요함에 녹아든 이 작품들은, 이전에 이 작품을 보았던 관객에게도 사뭇 새로운 관점을 열어 보인다. 상영되는 공간은 깊고, 높고, 길고, 어둡다. 각 영상은 빌 비올라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고속촬영기법을 통한 슬로우 모션으로, 현실과는 격리된 독자적인 시간의 흐름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흰 옷을 입고 석관 위에 누운 남자를 둘러싸고, 정지영상 같은 화면에서 물소리가 섞인 백색소음이 들려온다. 점차 바람소리가 섞여 오며 화면 속 공간을 채운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점차 많아지면, 이 물과 바람이 ‘위’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은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이 종교적인 분위기의 남자는, 이윽고 하늘로 폭포처럼 치솟는 물줄기와 함께 가슴께부터 천천히 끌어올려지듯 승천한다. 남자가 화면 위로 사라진 이후에도 굉음을 내며 한참이나 치솟던 물줄기는 느리게 잦아들어, 빈 대리석 석관과, 정지화면과, 다시 백색소음과 함께 막을 내린다. 이어, 불의 여인은 세차게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강물 앞에 그림자처럼 서 있다. 그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지,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마치 조로아스터교의 신자처럼,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길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인물은 돌연 걷기 시작한다. 불길을 향해 걸어가는가 싶더니, 그는 돌연 관람객을 덮쳐 오듯 쓰러지며-그는 관람객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던가?- 큰 물소리를 내며 물 속으로 잠겨든다. 불꽃을 비추는 액체가 물인지, 기름인지, 피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이 핏빛 강에 형체가 삼켜지고 나면, 현실처럼 타오르던 불길은 점차 부분적으로 왜곡되며 관념적인 불길로 변해간다. 이 불과 물은 마치 상하가 반전된 듯한 화면으로 잦아들며 융화되어 가고, 최후에는 깊은 남빛의 어둡고 농도 짙은 액체가 되어 일렁인다. 의미가 쉽게 감지되지 않는 모호한 먹먹함 속에서, 관객은 영성(靈性)이라고 해도 좋을 숭고함을 어렴풋이 느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사랑의 묘약으로 인해 백부의 아내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고 만 기사의 정사(情死) 이야기, 속된 말로 불륜담이다. 그런데 사랑의 기쁨과 고통에 몸을 불태우던 그들이 한 침대에서 발견되는 순간에조차, 둘 사이에는 트리스탄의 검이 가로놓여 있다. 이들의 인내와 억제, 고통과 희열, 체념과 욕망 사이에는 오늘날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낯선 사랑이 있다. 영상 속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강렬히 대비되는 원초적인 원소들이 빚어내는 연극적인 순간들 속에서, 관객에게 낯선 전율을 선사한다. 두 작품을 감상한 나는, 장엄하기까지 한 이 작업이 기계적인 방법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거의 잊을 뻔 했다. 구도(求道)의 길이란, 비디오카메라를 들고서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송윤서(미술경영협동과정 박사과정, 변호사)

못다 한 그림 공부가 못내 아쉬워, 적어도 미술 하는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자는 마음으로 관악에 돌아왔다. syslawy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