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않음에 맞서는 힘, 연대

여름 연대활동을 다녀와서

  혼자서는 절대 살아갈 수 없겠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온종일 혼자 있는 날에도, 어느새 하루를 둘러보면 어느 순간도 혼자서 살았던 적이 없다. 날 한달음에 달려가게 하는 택배상자도, 늘 계단을 올라가자며 결심하지만 이내 포기하게 만드는 엘레베이터도, 술 마실 때마다 꼬박꼬박 찾아가는 ATM기계도, 지각할까 허겁지겁 올라타는 버스도, 늦은 밤 몰래 끓여 먹는 컵라면도- 나에겐 물건만이 보이지만 결국 그 뒤엔 사람이 있다. 나는 먹고, 입고, 자는 순간부터 살아가는 매 순간 누군가가 없이는, 누군가의 노동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타자는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지탱해주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나의 노동 또한 다른 이에게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그리하여 서로의 삶은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냥 서로에게 감사하고, 네가 있어 내가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기에는, 그리고 나의 노동으로 네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하며 살아가기에는, 우리는 얼음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하루종일 열심히 일을 하면 방값 내기도 빠듯한 돈이 돌아오고, 노동력의 판매자로서 우리는 구매자인 사장에게 휘둘리고, 순식간에 필요없다는 말 한마디로 내쳐지기도 하며,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며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이 착취의 굴레를 끊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모두의 불행은 ‘개인적인 불행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행복과 질서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계속될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입학한 이후로 나의 여름에는 노동자 – 학생 연대활동이 함께하고 있다. 5박 6일 정도의 일정 동안 곳곳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또 우리의 이야기를 한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 그러나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벼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만났다. 서울, 부산, 울산, 밀양, 삼척. 정말 어딜가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게 서글펐고,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고, 우리는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벅찬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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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끝에 서도 반응이 없는 세상

  들렀던 고공농성장이 두 곳이었다. 높은 곳의, 바람이 조금만 불면 흔들리고 둘이 누우면 꽉 맞을 것 같은 좁다란 전광판 위. 하나는 서울 시청광장 인권위원회 위의 기아차, 두번째는 부산의 생탁-택시. 구미의 스타케미컬에도 가기로 되어있었으나 다행히 400일이 넘는 최장기 고공농성이 끝을 맺었기에 들르지는 않았다. 기아자동차는 파견업체에서 비정규직을 채용했지만 정규직과 똑같이 일을 시키고 지시를 내려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다. 싸게 싸게 부려먹으려는 꼼수가 들켰고, 그동안 비정규직이었던 이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기아차 자본은 또 하나의 꼼수로서, 그들 중 일부인 400여명만을 신규채용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고 이 합의는 이루어졌다. 일부만 신규채용이 되고, 정규직이 되는 현실에 반발하여, 두 명의 노동자가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상태다. 

  부산의 생탁-택시 같은 경우는 두 사업장의 노동자가 같이 올라간 경우이다. 생탁은 부산의 대표적인 막걸리 브랜드로, 이 회사의 사장은 한 명이 아니라 50명이다. 이들은 일년에 몇 억씩 챙겨가면서 노동자들에게는 200만원이 안 되는 월급을 주고, 연차휴가와 수당을 주지 않음은 물론이며 특근을 할 때 식사로 고구마를 던져주기도 했다. 택시 같은 경우는 회사에 매일 일정 금액의 사납금을 내기 위해 과속을 강요당하고, 벌지 못하면 자비로 채워넣어야 하는 현실에, 10시간 노동을 해도 4시간 밖에 인정되지 않는 것에 분노하며 싸우고 있다. 이 두 사업장의 공통요구는 이러한 싸움을 지속해나가는 노조를 인정하고, 파괴행위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고공농성은 늘 아찔하다. 그렇지만 그 아찔한 고공농성마저도, 주목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 수록, 조금씩 덜해지고 있다.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함께 뭉쳐 벽을 뚫어내는 것이고 하나는 무뎌지는 거라고. 모두가 힘들게 하는 세상에서, 너만 힘든 줄 아냐며, 왜 유난이냐며 둔감해지는 거. 힘든 게 당연한 거라고, 말하게 되는 것. 벼랑 끝에 사는 걸, 그래서 죽고 다치고 아픈 걸,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고, 그래도 되는 삶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모든 걸 걸고 하늘벼랑의 끝에 떠밀린 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칼날같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걸 의미한다. 하늘 끝에 서도 반응이 없는 세상은 너무 두렵다. 인권위 앞의 기아차 고공농성을, 부산시청 앞의 생탁 택시 고공농성을 응원하고 지지한다. 내려오는 그날까지 무탈하시기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연대

  연대활동을 다녀오고 나서, 부모님은 나에게 ‘노동자도 아닌 네가 ’거길 가서 무엇하느냐는 이야기를 했다. 노동자와 학생의 연대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내가 해고를 당한 것도, 지금 당장 비정규직인 것도, 전혀 아니면서 왜. 내가 어떤 입장을 지지하고 함께하는 것에 딱히 나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노학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생각해봤다. 대학생인 나는 이제 노동력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고, 어떤 직업이든 간에 노동자가 되어 이 수많은 착취들과 모순들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 뿐인가, 상황은 점점 더 나쁘게 흘러가고 있다. 최저임금은 매년 아주 조금씩밖에 오르지 않고, 열정을 쏟을 기회를 준 것만으로 감사하라는 열정페이가 횡행한다. 청년 실업을 해결할 아주 좋은 방침으로 임금피크제라는 것을 도입해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결국 그 일자리는 싼 값에 나를 부려먹겠다는 비정규직 일자리다. 심지어 임금피크제로 인해 깎인 부모님의 노후대책비는 나의 돈에서 나가지 않겠는가. 또 일반해고가 가능해지면 나는 잘못 밉보여서 잘려도 할 소리가 없게 된다. 

  노동자와 학생의 연대라는 것은 결국, 다른 이에게 필요한 노동을 하고, 다른 이들의 노동으로 나의 필요를 채우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연대다. 그래서 다른 세상을 꿈꾸고, 지금이 잘못되었다고 외치기 위해 함께한다. “이렇게 사는 것은 죄가 아니고, 우리는 벌을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에.” 아마 다음 해에도 나는 여름연대활동에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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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선(윤리교육 14)사랑할 만한 곳에서, 사랑할 만한 사람들과 사랑할 만한 삶을 살고 싶다. 2학년이지만 이번 학기에 다시 돌아온 복학생이어서 설렘 반 걱정 반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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