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30일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 대통령궁을 점령했고, 남베트남 대통령은 항복문서에 사인했다. 이로서 1956년부터 20여년 간 계속되어 온 베트남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베트남 전쟁은 세계사를 바꾸어 놓은 전쟁 중 하나였다. 1950년의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냉전 속에 있었던 열전이었고,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진행된 전쟁이었지만, 그 의미는 자못 달랐다.
한국전쟁이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전쟁이었다면, 베트남 전쟁은 냉전의 종식을 앞당기는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이 어느 일방의 승리로 끝나지 않고‘ 정전협정’을 통해 잠시 중단된 상태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면, 베트남 전쟁은 일방의 승리로 끝났다.
한국전쟁이 남한과 북한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대결이면서 동시에 강대국 냉전의 대리전적 성격을 갖고 있었던 반면, 베트남 전쟁은 시민전쟁이었다. 북베트남이 개입하였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공산주의와 반공주의 간의 대결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남베트남 정부와 그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게릴라, 즉 베트콩 사이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전쟁이었다면,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 대항하는 베트콩과 북베트남 사이의 전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의 정전협정에 중국이 직접 서명했던 반면, 베트남의 1973년 평화협정에는 중국이 서명하지 않았고, 베트콩이 서명했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는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첫째로 미국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자 했다. 그런데 차이도 있다. 한국전쟁에서는 38선 이북으로 북진을 시도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분단선이었던 17도선 이북 지역에 폭격은 했지만, 지상군이 북진을 시도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북진을 감행했다가 중국군이 참전함으로써 입었던 치명적인 피해로 인한 트라우마가 작동하고 있었다.
둘째로 중국이 중요한 변수로 작동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을 괴롭힌 주적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미국이 서로 맞붙지 않았다면, 어쩌면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을 결정한 1964년은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한 해였다.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될 경우 그 이웃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공산화될 것이라는 도미노 현상을 우려하면서 베트남에 개입을 결정했지만, 실상 가장 두려운 것은 중국의 영향력이 동남아시아 전체로 확대되는 것이었다. 1949년 중국 혁명을 통해 아시아에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잃은 것도 모자라 이제 동남아시아라는 또 다른 시장을 잃게 생겼던 것이다.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 일본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1950년 인천상륙 작전 이후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은 미국에게는 하나의 재앙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중국군의 참전으로 인해 미국 역사상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을 맞이했다. 이로 인해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할 때까지 미국은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소련뿐만 아니라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해야 했다. 중국과 소련이 미국의 눈 앞에서 국경분쟁과 이데올로기 갈등을 겪고 있는데도 미국은 그것을 이용하지 못했다. 베트남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뿌리 깊은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베트남에서 전쟁이 끝난 지 4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중국은 베트남을 침공했다.(1979년 2월) 한국과 베트남은 모두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17도선을 넘어 미군이 북진했을 경우 중국이 참전할 가능성이 컸지만, 미국의 개입이 없는 상황에서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중국의 영향력이 베트남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없었다. 베트남에서 통일왕조가 생긴 이래로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국과 베트남은 끊임없이 대립해 왔던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와는 달랐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상쇄할 수 있는 두 전쟁의 공통점이 있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파괴했다. 군인뿐만 아니라 죄없는 민간인들이 죽었다.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게릴라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에서 민간인의 피해는 더 컸다. 매년 5만 여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던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의 피해자는 공식적으로 5,000여명이 넘었다.

▲ (좌) 1964년 9월23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열린 1차 파병단의 환영식. (우) 2003년 4월15일 전남 장성 상무대에서 열린 이라크 파병 공병‘서희부대’창설식.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른 기억은 모두 지운 채 돈을 벌었다는 기억만 있다면, 한국은 이제 어떠한 전쟁터라도 갈 것이다. ⓒ한겨레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자체도 피해자였다. 정부는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이들을 파병했다. 미국이 주는 전투수당을 통해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지만, 이들에게 이미 고엽제 후유증이라는 치명상을 입힌 이후였다.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던 군인들은 또한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아야 했다. 정부는 이들에 대해 적절한 피해보상과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20여년 후인 1993년, 참전군인 중 일부가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미국의 가장 친한 친구인 영국도, 프랑스도, 독일도, 일본도 가지 않았던 베트남에 갔다. 그것도 미국의 돈을 받고 갔다. 한국군은 미국의 용병이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 제3세계 국가들은 한국을 배척했다. 유엔에서 한반도에 대한 결의안에 북한에 대한 찬성이 더 많은 표가 나올 가능성을 염려해야 했다.
정부는 이 모든 것들을‘ 전쟁특수’라는 지우개로 지웠다. 미국이 엄청난 돈을 쓴만큼 우리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돈은 제2차, 제3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을 약속하는 돈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돈을 번 것을 비난하면서도 스스로가 베트남 전쟁에서 돈을 번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다.
한국이 돈을 번 만큼 미국 경제는 어려워졌다. 한국이 기대야 할 강대국의 경제가 흔들리면서 미국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고, 주한미군의 일부를 철수했으며, 한국의 수출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기 시작했다. 미국의 요구에 의해 파병을 했기 때문에 좋아져야 할 한미관계는 미국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지금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우리의 머릿속에는 오직 돈만 들어있는 건 아닌가? 2003년 한국은 왜 이라크에 갔는가? 미국의 친구니까? 맞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라크에 있는 석유와 돈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른 기억은 모두 지운 채 돈을 벌었다는 기억만 있다면, 한국은 이제 어떠한 전쟁터라도 갈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다른 나라 전쟁터에 가서 번 돈으로 호의호식한 자랑스러운 선조들로 볼까? 정의가 아니더라도 친구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는 깡패같은 의리를 갖고 있는 자랑스러운 선조들로 볼까? 이제 명예를 생각할 때다. 한국이라는 국가브랜드가 전 세계에,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어떻게 비출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이것이 이제 해방 후 70살이 된 한국이 고민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다.
박태균 교수(국제대학원)

2000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한국경제개발계획의 형성과정’으로 박사논문을 받았고, 2000년부터 현재까지 서울대 국제대학원에 한국학 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한국학 전공주임교수로 국내외 학생들에게 한국현대사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다. 최근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를 출간하였고, 주로 한미관계, 남북관계,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