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6년 6월 21일 부산 송도 앞바다 바위틈에서 허리춤에 세 개의 시멘트 덩어리를 달고 있는 시체가 발견됐다. 상하의와 신발을 착용하고 깨진 안경을 쓰고 있는 시체였다. 이틀 후 시체의 신원은 서울대 지리학과에 재학 중인 18살 김성수 학생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그의 죽음이 ‘성적을 비관한 자살’이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과 학교 동기들은 발표 내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친구들과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며 1학기 성적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내성적일지라도 항상낙관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학년 1학기를 채 마치기 전에 맞이한 비극적 죽음이었다. 김성수 열사의 삶과 그의 죽음 이후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투쟁의 기록을 조명해봤다.
바닥에서 민주화를 외치다
김성수 열사는 강릉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연극과 영화에 관심이 많아 대학교 입학 후 총연극회에 가입했다. 당시 서울대 총연극회는 소위 ‘운동서클’이라 불리는 동아리였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정기 연극제는 집회와 다르지 않았고 총연극회 학생들은 동아리 외부의 크고 작은 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4월 28일 군 전방입소 훈련을 거부하고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에도 김성수 열사를 비롯한 총연극회 학생들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시위는 거리시위와 캠퍼스 내 도서관점거로 나뉘어 진행됐다. 그날 오전 신림 부근에서 진행된 거리시위에서는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분신자살했다. 김성수 열사가 참여한 도서관점거는 오후에 시작해 철야농성으로 이어졌다. 학교는 경찰에 완전히 포위돼있어 연행되지 않고서는 출입이 불가능했다.
중앙도서관의 밤이 깊어지자 김성수 열사는 초조해졌다.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와 누나와 자취를 하고 있던 터라 누나가 자신을 걱정할까봐 불안해졌던 것이다. 누나에게 연락할 길을 찾지 못하자 그는 연행되더라도 학교를 나가는 길을 택했다. 그가 처음 연행된 날이었다. 다음날 총연극회 동기들은 그를 학교 캠퍼스에서 만났다. 김성수 열사의 친한 친구였던 조민제(경영 86ㆍ졸업)씨는“괜찮냐고 물었더니, 성수가 씩 웃으며 ‘별로 안 맞았다’고 대답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보통 처음으로 연행을 당하고 나면 쉽게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김성수 열사는 처음 연행당한 사람 같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5·3 사태라고 알려진 인천 집회에 총연극회 사람들이 참여한 후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격한 집회의 분위기에 놀라 탈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김성수 열사는 남은 대여섯 명에 들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렇게 5월 중순 정기 연극제가 다가왔다.
정기 연극제 당일, 이른 오전부터 김성수 열사와 총연극회 사람들은 노천강당에서 리허설을 했다. 오후에는 아크로에서 문익환 목사의 강연이 계획돼있어 천여 명의 학생들이 집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전투경찰(전경)들이 문 목사의 강연을 막으러 학교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강연을 위해 모인 학생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경들과 싸우면서 분위기가 거세졌다. 학생회관 옥상에서 이동수 열사는 몸에 불을 지르고 4층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조민제씨는 “다른 어느 때보다 학생들은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 총연극회 학생들은 전경을 피해 노천강당까지 밀려올라온 학생들에게서 이동수 열사가 분신자살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김성수 열사와 총연극회 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리허설을 뒤로 한 채 시위에 목소리를 더했다.
해질녘, 전경들은 철수했다. 총연극회 학생들은 연극을 할 바닥을 치우기 위해 아크로로 내려왔다. 바닥에는 최루탄 가루가 날리고 있었다. 아무리 쓸어도 가루가 다 없어지지 않아 배우들은 실제 연극 중 바닥에 쓰러지는 장면에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어렵게 시작한 연극에서 김성수 열사는 폭력으로 억압하는 자본가와 독재정권, 그리고 외세에 대항해 투쟁하는 민주노동자를 훌륭하게 연기했다. 말수가 없고 내성적인 그였지만 무대에서는 거침없었다.
6월에 들어섰다. 월초의 시위에서 김성수 열사는 거리시위 대신, 강연을 들으러 가는 여학생들을 곁에서 보호하고 지키는 일을 했다. 이연희 씨의 강연 ‘한반도와 핵’은 명동성당에서 열리기로 예정돼 있었다. 김성수 열사는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명동성당은 이미 경찰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는 두 번째로 연행됐고 다음날 훈방조치로 풀려났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가 그는 실종됐다. 총연극회 동기들도, 걱정이 돼 학교를 찾아오신 김성수 열사의 아버지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의문사와 방황하는 진실
6월 18일 김성수 열사는 당일 11시에 있는 교련시험을 위해 오전부터 자취방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10시 경에 전화기가 울렸다. ‘서울대생’을 찾는 전화였다. 그는 집을 나섰다. 밤 9시쯤 그의 누나가 집에 돌아왔을 때도 그는 집에 없었다. 다음 날 학교 친구들은 그를 이틀째 보지 못했다며 가족들에게 연락했다. 20일에는 김성수 열사의 아버지 김종욱 씨가 상경해 가출신고를 했고, 김성수 열사를 찾기 위해 동아일보에 그를 찾는 광고를 냈다.
실종된 지 3일 후인 21일, 부산 송도 앞바다 방파제 앞 수심 17m 지점에서 김성수 열사의 시체가 발견됐다. 그의 죽음은 그의 가족과 동기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죽음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단순한 ‘자살’이라는 경찰의 발표를 믿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았다. 그의 생활에서 자살의 동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 그와 연고가 전혀 없는 지역인 부산 송도에서 그의 시체가 발견된 점, 그리고 부검을 했더니 두부에서 ‘정교한 타격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상처가 발견된 점이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가족들은 당시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성적 비관’ 또는 ‘자살’을 염두에 둔 질문을 받았었다고 기억했다.
사건 직후 그의 사진들은 모두 동아리방 한 구석으로 치워졌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의 죽음이나 그의 이름을 꺼내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기시 됐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몹시 취해 갈 때서야 그의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1987년까지만 해도 동기들 사이에서 진상규명을 촉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의견은 그의 죽음을 쉬쉬하는 분위기에서, 그리고 NL계열과 PD계열의 학생운동노선 논쟁 사이에서 덜 중요한 것으로 치부되며 묵살되고 말았다.
1986년은 학생운동이 절정에 달한 해였다. 대의는 목을 젖혀 우러러 볼만했고 투쟁은 가슴을 뜨겁게 했다. 또 앳된 가슴들이 연이어 불에 타 죽음에 가장 둔감해진 해이기도 했다. 김성수 열사의 동기 조민제 씨는 “죽음이 일상화돼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조민제 씨에게 그리고 김성수 열사의 부모님에게 김성수 열사의 죽음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조민제 씨는 학생운동을 하며 거처를 옮기고 몸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도 어렵게 동아리방 한 구석으로 치워져있던 친구의 사진들을 상자에 보관해 왔다. 하지만 1991년 위장취업을 위해 신분을 숨겨야 하자 더 이상 사진을 보관할 수 없었다.
그동안 김성수열사의 부모님은 생업을 포기하고 김성수 열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1987년 김성수 열사의 아버지인 김종욱 씨는 서류를 모으고 자료를 만들어 상경했다. 20년 넘게 계속될 투쟁의 서막이었다.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위원회를 찾아 자료를 제출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이는 의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움직임의 발단이 됐다.
박찬종 당시 국회의원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김성수 열사를 비롯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학생들과 노동자들에 대해 정권의 책임을 물었다. 언론에서도 이를 다뤘지만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들뜬 분위기에서 크게 이슈화되지 못했다. 1988년에는 김성수 열사의 어머니 전영희 씨가 상경해 동병상련의 처지였던 우종원 열사의 어머니를 만났고 유가협을 찾았다. 의문사를 당한 열사들의 부모들은 유가협을 통해 서로를 만나며 진상규명 촉구 집회를 꾸리자는 목소리를 모았다.
1988년 8월 전영희 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시작해 135일을 싸웠다. 나이 든 어머니들은 몸싸움에서 전경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개년들”이란 욕을 듣고 머리채를 잡히거나 구둣발로 밟히기 일쑤였다. 닭장차에 끌려가면 전경들은 밤이 어둑어둑해져서야 서울 외곽 인가가 없는 지역에 그녀들을 한 명씩 풀어주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 지리가 익숙하지 않은 이에게는 더욱이 잔인한 처치였다. 그런 시위와 농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요구했던 진실은 동아리방의 김성수 열사 사진들처럼 방황할 뿐이었다.
오명을 벗은 민주 열사

1998년 11월 김성수 열사의 양친을 비롯한 의문사 유가족들은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이 농성은 2000년 1월까지 422일간 지속됐고 이를 계기로 1월 15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 통과됐다. 10월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고 김성수 열사의 의문사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2006년 7월 31일, 김성수 열사가 의문사를 당한지 20년 만에 오명을 벗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그의 죽음이 타살에 의한 것이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그가 민주 열사임을 인정했다. 김성수 열사를 비롯해 의문사를 당한 많은 이들이 명예를 회복했다. 민주화의 길에 밝은 가로등이 걸렸다. 2년 후에는 서울대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김 열사의 양친은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고 당시의 심정을 회상했다.
2002년 강릉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온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강이 범람해 김성수 열사의 사진들과 서류가 모두 소실됐다. 90년대 초반, 조민제 씨가 보관을 포기하고 김 열사의 어머니께 전달한 사진들도 같이 소실됐다. 5월 연극제에서 열연을 펼치던 김성수 열사의 모습, 유가협에서 활동하던 김 열사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거센 물길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태풍에도 역사와 기억은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2001년 지역청년운동을 위해 결성된 강릉청년회는 매년 김성수 열사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세배를 올린다. 같은 해에 발족한 김성수열사기념사업회는 매년 김성수 열사의 기일이 돌아오면 마석모란공원에서 추모 행사를 연다. 2014년 김성수 열사의 모교인 강릉고등학교 교정에 ‘민주열사김성수추모비’가 세워졌다. 그의 추모비에 적힌 문구처럼 김성수 열사는“민주의 이름으로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