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도서관 뒷길에 벚꽃이 흐드러지고 여름에는 자하연의 시원한 분수가 더위를 식혀준다. 가을에는 관악산에 예쁜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별빛이 가득한 ‘걷고 싶은 길’을 거닌다. 학부생의 내가 기억하는 관악은 시험과 과제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여유를 주는 낭만 가득한 공간이었다. 2010년 꼬꼬마 신입생 때부터의 추억이 서려있는 이 공간에 나는 다른 신분의 학생이 되어 새로운 봄을 맞았다. 지난 겨울 학부를 졸업한 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 랩돌이가 되었다.
‘랩돌이’. 이공계 연구실에 다니는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을 이르는 말이다. 혹자에게 ‘나는 랩돌이다’라고 얘기하면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발견하기 십상이다. 바쁜 생활과 여유 없는 삶, 결과에 대한 압박 등의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험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집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훨씬 긴 것은 물론이고 바쁠 때는 주말이나 공휴일에 출근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일이 많다. 아침에 출근해 잡일들을 처리하고 난 뒤 바로 실험을 시작해도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저녁 때가 다 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물론 이렇게 고생해서 진행한 실험이 한번에 잘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논문 읽기, 아이디어 짜기, 발표 준비하기 등 실험 외적인 일까지 합하면 일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저널미팅, 랩미팅, 그룹미팅 등 회의는 또 뭐 그리 많은지, 실험을 위한 회의인지 회의를 위한 실험인지,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생물학자에게는 파이펫이 무기이다. 뒤로 보이는 실험대와 실험실은 랩돌이와 랩순이들의 희로애락이 얽혀있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을 알고서도 대학원에 진학해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너무 식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사실인 것을…. 바쁜 일상 속에서 가끔 잊고 살지만 실험 결과가 내가 세운 가설과 들어맞을 때의 쾌감은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쉽사리 느껴보지 못할 만한 것이다. 교수님이나 동료들과 토의를 하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때나 학회에 가서 발표를 하고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종종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월급날을 하루하루 기다리거나 점심을 먹고 난 뒤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 떠는 것과 같은 일상 속 소소한 즐거움은 힘든 대학원 생활에 주어지는 보너스랄까.
관악에서 보낸 시간이 벌써 6년이 다 되어간다. 추억이 쌓여있는 그 공간을 뒤로한 채 한 랩돌이는 매일매일 꿈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여유와 낭만이 있었던 지난 6년의 날들보다 앞으로의 6년이 더 기대되는 것은 랩돌이로서만 느끼고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진리에 대한 바람 때문이 아닐까. 앞으로는 랩돌이라는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기 보다는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쳐주는 사람이 늘어나길 바라본다.
박인국(생명과학부 석박사통합과정)

이것저것 벌여놓고 망중한을 즐기기 좋아하는 대학원생. 학사 학위를 3개 따고 꿈을 좇아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여전히 뭘 하는 게 좋은지 몰라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며 바빠한다.
언제든 지금 생활보다 재미있는 일이 나타나면 튀어나갈 준비는 되어있다.
인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데 일조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