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버린 세계와 야생의 사회학자들

이말년의 와 SERI/비완의 에 대한 단상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회학자들이란 “우리는 망했다.”를 다채롭게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베버의 “쇠우리”, 짐멜의 “문화의 비극”은 근대의 도래와 함께 인간들이 쌓아온 거대한 문화적 유산 앞에서 우리가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울리히 벡 같은 요즘(?) 사회학자들은 유럽인들이 이제는 합리성에 기초해 있던 기존의 제도들로 어찌해볼게 별로 없는 새로운 위험을 껴안고 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한국의 사회학자들은 종종 더 잔인하다, 힐링 말고 버틸 건덕지도 없을 때,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세상살이가 왜 힘들 수밖에 없는지 밉살스레 말한다. 

 그런데 나 같이 이러한 체계적으로 우울한 이야기를 10년째 붙들고 있지 않더라도, 사회학적 진리들을 몸으로 체득하여 N모 사이트에서 목요일을 틈타 대중들에게 설파하는 이들이 있다. 참으로 질투 나게 이들은 그림도 그럭저럭 그리고, 대중들의 사랑도 많이 받고, 돈도 제법 쏠쏠하게 버는 듯하다. 석사논문을 말아먹고, 이들을 보며 내가 얼마나 배가 아팠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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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년의 <이말년 서유기>

창조적 실패들과 구원의 희망, 소녀들

 중국 고전 소설인 서유기의 줄거리를 빌린 <이말년 서유기>는 1화부터 “과일이 비처럼 쏟아진다.”라는 무릉도원 묘사를 재난으로 바꿔 묘사하는 놀라운 상상력의 전복을 보여주고, 손오공의 등장으로 인한 화과산 지배세력의 교체를 약한 동물에 대한 더 가혹해진 수탈로 묘사하는 예리한 인식을 보여주더니, 작품의 진행과 함께 이말년의 장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말년이 기존 작품부터 보여주었던 놀라운 재능은 실패의 창조성을 누구보다도 창발적인 방식으로 포착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9-10화에 걸쳐 손오공이 다시 등장한 혼세마왕을 제압하는 장면에서 다시 한 번 빛을 발한다. 

 혼세마왕과 대결하는 과정은 손오공의 입장에서 보면 실패의 연속이다. 혼세마왕의 혼세퇴에 대처하기 위해 동원했던 선풍기는, 적의 힘을 이용해 적을 제압하는 효과적인 도구였지만, 적의 대응에 의해 오히려 적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전환된다. 이에 따라 손오공은 자신의 도구를 폐기하려 하지만, 도구는 결국 주체의 의지에 반해 자기 파괴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첫 번째 실패 이후 손오공은 혼세마왕이 혼란의 물화라는 것을 깨닫고, 목가적 풍경에 대한 상상으로  내적 평화를 모색한다. 그러나 조류독감과 농가 부채 문제로 대표되는 실제 농촌의 열악한 현실이 상상적 풍경에 절묘하게 결합되면서 손오공은 또 한 번 실패한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더 강력한 폭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이지만, 이는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체(손오공)의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더 커진 혼세마왕이 성층권에 닿자, 즉 더 없이 커진 혼란이 지구의 한계를 넘어서자 스스로 소멸해 버린다.

혼란에 대한 물리적 도구를 통한 합리적 대응의 부분적 성공과 실패, 내적 평화의 모색하는 심리적 해법 시도, 폭력의 극단화, 혼란의 일시적 소멸(이 작품에서 혼란한 순간마다 혼세마왕은 살아 돌아온다.)로 이어지는 전개 앞에서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떤 약을 먹으면 이런 걸 그릴 수 있을까? 이 작품이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리얼리즘적 묘사임을 깨닫게 되면 이 감탄은 서늘함으로 바뀐다. 우리는 매일 실패 속에서 산다. 

 이러한 반복되는 실패들 속에서 별 수 없이 살아야 하면 구원을 갈망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사회는 새로운 정치 주제들이 메시아로 재림하는 순간들을 기다려왔다. 어쩌면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 여성운동은 어지러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났고, 앞서 나타난 빛들이 그림자를 드리울 때, 그 어둠을 비추는 새로운 빛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 대한 문제제기로 촉발된 촛불집회와 함께 나타는 촛불소녀는 아직 발굴되지 못 했던, 한국사회가 주목했던 새로운 메시아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녀들에게 세계를 구해달라는 요구는 최소한 문화 공간에서 우리에게 낯선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나처럼 어렸을 적, <천사소녀 네티>, <세일러문>, <웨딩피치>를 보며, 세계를 구하는 것은 폼만 잡을 줄 알지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무능력한 남자 놈들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적들을 교화하는 마법소녀임을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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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비완의 <매지컬 고삼즈>

 SERI/비완의 <매지컬 고삼즈>는 이러한 마법소녀라는 환상과 이 환상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다. 마법소녀인 주인공은 교사지시 불이행 벌점 처리로 대입의 길을 막아버리겠다는 여장 남자 교사의 협박에 시달리고, 그 협박에 대한 분노를 마법의 힘으로 구현하는 것을 통해 마법소녀로 각성한다. 이 작품은 마법 소녀가 처한 입장, 즉 “댁들은 우리보고 세계를 구해보라 하는데 나는 대학부터 가야 해요.”를 절절히 대변한다. 소녀들은 자신의 마법 소녀임을 밝히고, 대학 입학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부모를 설득해 마법 소녀 일을 계속한다. 소녀들은 입시 스트레스, 사회적 관계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세계를 구하기 위해 변신을 거듭한다.

2015년 4월 16일 목요일

 우리가 잊을 수도 없고, 실상은 잊을 권리도 없는 2014년 4월 16일로부터 정확히 1년 후, 이 두 작품은 사이좋게 휴재 중이다. 현실은 늘 상상을 압도하는 것이라지만, 이 날에는 이말년이 그리는 실패의 창조성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인지, SERI/비완이 넌지시 말한 대로 소녀들에게 세계를 구해달라는 요구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를 아프게 상기하게 되었다. 세계가 이토록 비극적임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야생의 사회학자들이 밝혀준 불빛을 따라 괴로워해야겠다.

곽귀병(사회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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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과로 스스로를 소개하게 된지 10년이 넘었다. N모 사이트에서 웹툰을 본지도 10년이 넘어간다. 사회사/역사사회학, 문화사회학을 하며 밥을 벌어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말년과 그의 시대> 같은 책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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