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차별할 필요가 있나요?

  초등학교에서 새 학년 초가 되면 선생님들은 각 반에서 학생들이 1년 동안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해 알려줬다. 수업 시간에 떠들지 않기, 잔반 남기지 않기, 수업 종치면 자리에 앉아 있기 등 매년 크게 변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학생이 지켜야 할 규칙을 선생님이 혼자 정했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규칙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싫어했던 규칙이 있다. 학생은 교실 앞문으로 출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앞문은 오로지 선생님만의 출입구였다. 어쩌다가 학생이 쉬는 시간에 앞문으로 들어오다 걸리면 벌점을 받았다. 멀쩡한 문 하나를 놔두고 다른 문 하나만 사용해야 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선생님께 이유를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선생님이니까’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학생은 앞문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등의 이상한 규칙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학생과 선생님 사이에 불필요한 구분이 있었다. 교직원 식당과 학생 식당이 따로 있었고, 교직원 화장실과 학생 화장실이 달랐다. 초등학교의 경우 학생과 교직원의 키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변기의 크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교직원 화장실과 학생 화장실의 소변기의 높이는 같았지만, 교직원 화장실에 들어가면 항상 향긋한 방향제 냄새가 났고 변기에는 따뜻한 비데가 설치돼 있었다. 이것도 역시 선생님이라면 당연히 학생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을까.

  서울대의 학내 비정규직 문제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면 그 차별은 단지 ‘신분’의 차이에 기인할 뿐이다. 마치 다른 아무런 근거 없이 ‘선생님이니까’ 앞문으로 출입할 수 있었고, 구별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도서대출권수 및 기간, S-카드의 색상 등 비금전적인 부분에서 발생하는 차별은 비정규직 직원들에게 인격적인 모멸감을 준다. 예산이 부족해서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다면서 굳이 비금전적인 부분에서까지 차별을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조선시대에 양반만 도포를 입고 큰 갓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정규직도 뭔가 겉으로 드러나는 특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금전적인 부분에서 발생하는 차별도 정당화될 수 없다. 서울대는 2013년과 2014년에 걸쳐 274억 원의 인건비를 전용했다. 본부와의 인터뷰에서 남은 인건비를 왜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사용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 돈은 비정규직의 인건비는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정작 그 돈을 시설비로 사용해놓고서는 원래 비정규직을 위한 돈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꼴이 우스웠다. 정말 학교 사정이 어려워 다 같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시점이면 모르겠다. 하지만 간접 고용을 하면서까지 용역 회사에 이익금을 퍼주는 등 필요 없는 부분에서 돈이 줄줄 새고 있는 상황에서 예산을 핑계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하는 것은 정말 말 그대로 ‘차별을 위한 차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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