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교실만큼의 아픔

세월호 희생학생 유가족, 생존학생, 교사 유가족과 만나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사회는 교실 10개만큼의 학생을 잃었고, 상실의 고통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당사자들에게 학교는 저마다 다른 추억과 다른 아픔을 상기시키는 공간이다. 2학년 6반 故신호성 학생의 어머니 정부자 씨, 생존학생인 장애진 양과 아버지 장동원 씨, 2학년 7반 故이지혜 선생님의 아버지 이종락 씨와 만나 그들의 근황과 교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신호성 학생의 어머니 정부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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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신호성 학생의 어머니 정부자 씨. ⓒ김대현 사진기자

 정부자 씨는 2학년 6반 신호성 학생의 어머니다. 정 씨는 매주 금요일 6시면 안산의 번화가에서 세월호 참사를 알리는 피켓을 든다. 안산 시민들에게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에 관심을 가질 것을 호소하기 위해서다. <서울대저널>은 피켓팅이 끝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을 잡고, 지난 10월 16일에 안산을 방문했다.

 호성 어머니 외에도 여러 명의 6반 유가족이 피켓을 들었다. 노란 티셔츠를 입은 유가족들은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다른 유가족들은 한편에서 조속한 인양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았는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특히 많이 다녀갔다. 끝난 시간이 늦은 관계로 인터뷰는 다음날 안산의 합동 분향소에서 진행했다.

Q. 요새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가끔 밤에 잠을 못자고 가슴이 아직까지도 좀 답답해요. 잇몸에 뭐가 많이 나고 시력이 나빠지고 머리에 열꽃같은 게 펴서 병원에 갔더니 화병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고 했어요. 이 정도면 견딜 만해요. 

Q. 세월호와 관련해서 요새는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주로 안산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금요일에 피켓팅을 해요. 우리 아이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기로 한 시간인 금요일 6시와 7시 사이에 하고 있어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인양과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 그 시간을 반드시 지키면서 피켓팅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Q. 다른 유가족 분들의 상황은 어떤가요?

 배·보상 신청기간이 끝나는 9월 마지막 날이 되니까 부모들이 무력감에 빠져서 집에만 계신 분들이 있었어요. 지금 활동하시는 분들이 80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광화문, 홍대, 청운동에서 반끼리 돌아가며 활동하고 있어요. 간담회를 다니고, 작년에 도와주셨던 분들을 찾아가기도 해요. 현재 안산 팀은 15명 정도예요. 우리가 작년에는 너무 밖으로 돌아서 안산을 등한시한 점이 있었어요. 그동안 안산 시민들이 많은 활동을 해주셔서 지금은 (안산 시민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다녀요.

Q. 배보상 신청이 얼마 전에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마음이 드셨는지요?

 이것은 처음부터 생각을 했던 거라 아무렇지 않았어요. 상품을 소개하듯이 ‘우리(정부)에게 와서 얘기를 들어봐라’, ‘인양을 했을 때 증거가 없으면 돈 한 푼 못 받을 수 있다’, ‘해수부에 와서 듣고 뭐가 좋은지 선택을 해라’ ‘임원들은 다 받았는데 왜 가족들은 못 받느냐’ 여러 가지로 했는데요, 국민들의 성금으로 충분합니다. 국가가 한푼 안줄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안산 시민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중고등학생들이 엄청나게 관심이 많아요. 피켓팅을 하고 있으면 힘내시라고 음료수 사다 주고, 눈물 흘려주고, 손잡아주고…. 오히려 그 나이 또래 친구들이 더 정이 많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내 나이 또래들은 일단 생활을 하고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해요. 세월호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 그만하면 안 되냐. 피켓팅을 하는 중에도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어르신들이 참 많거든요. 그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참 아득하고 답답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그리고 여기서 해결하지 못하고 어린 친구들에게 그대로 물려줘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요.

Q. 교실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저는 단원고 6반 교실을 들어가면…. 눈물이 나요. 우리 아이가 아침 7시 반에 가서 밤 10시 반에 왔거든요. ‘이 딱딱한 의자에서 우리 아이가 무슨 교육을 받았을까’라는 생각에. ‘왜 “공부, 공부” 했지?’하는 미안함…. 정말 아파요, 여기서 정말 공부가 재밌었을까? 그런 생각에.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고 여기에 앉아 있었을까? 그 교실이, 아이의 그 자리가 제일 아픈 곳이에요.

 우리 아이들의 고향이고, 여기서 묻혀야 되기 때문에. 안산 시민들과 같이 살아야하기 때문에. 그래서 안산에 들어와서 알리기로 한 거예요. 처음에는 교실의 중요성을 몰랐어요. 그런데 ‘기억과 약속의 길’을 걸은 여러 분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정말 교실이 산 교육장이구나. 진짜 존재해야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또 1,2학년 후배들이 여기 들어와서 입시공부가 과연 될까. 내 자식이 살아 돌아왔으면 내가 여기서 공부를 계속 하라고 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선생님이 그 동료들이 간 자리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교실은 누구를 위한 걸까 하고 생각을 해봤어요. 떠나간 자식을 생각하면 제 마음이 아파요. 그리고 후배(신입생)들이 교실을 사용하면 그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요. 그렇다면 교실을 산 교육장으로 남겨서, 대한민국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앞장서서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Q. 서울대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저 19살, 20살 때는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다 해결할 줄 알았어요. 국가가 대학생들로 인해서 바뀌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힘들어요. 서울대 가기 위해서 고등학생부터 웬만한 자기 생활을 버리고 공부하고…. 그런데 대학교 가서 또 많은 학생들과 경쟁 상태에서 살고, 그런 걸 보니까, 이 대한민국이, 오히려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 더 걱정이 되는 거예요. 이 나라를 알고 나서부터.

 우리 세대의 부모들이 앞장서서 바꿔줘야지 지금의 대학생, 고등학생, 초등학생들이 조금 나은 세상에 살 텐데, 이걸 우리가 하지 못하고 힘들다고 포기해버리고, 또 물려준다는 거에 대해서 부끄럽고 창피해요.

 이 부모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이, 엄마들이, 끝까지 한번 힘닿는 데까지 싸워볼게요. 그러면 대학생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그 서울대에서 좀 앞장서서, 대한민국 국민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따뜻한, 그런 국가가 되도록 (이 싸움을) 알려주면 좋지 않을까…. 다른 학생들보다 서울대 학생들이 해주면 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조금 앞장서서, 국가에게 할 말을 다하고, 옳지 않은 일을 옳지 않다고 큰소리 낼 수 있는 그런 서울대 학생들이 돼주면 좋겠어요.

생존자 장애진 학생과 아버지 장동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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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장애진 학생과 아버지 장동원 씨. ⓒ김대현 사진기자

 장애진 양은 참사 생존학생 중의 한 명이다. 애진 양의 아버지 장동원 씨는 참사 이후 생존학생 학부모 대표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4·16 가족협의회에서 진상규명 분과 팀장을 맡고 있다. 지난 10월 17일에 분향소에서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다.

Q. 애진 학생은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애진학생 요새 대학 때문에, 대학 수시 넣고 면접해야 하는 애들은 면접 준비하고, 최저가 들어가는 애들은 수능공부를 하고 있어요. (최저등급이) 안 들어가는 애들은 면접 준비를 하고. 제가 가고 싶은 과는 응급구조학과예요. 원래 장래희망은 아니지만 바뀌었어요.

아버지 얘들은 한동안 교복도 안 입었어요. 살아남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잘 살아나왔으면 살아남으면 되는데, 곱지 않은 시선으로 악플 달고 (생존 학생들이) 조금만 웃으면 “쟤들이 웃어?” 이런 비난이나 어묵사건…, 이런 게 아이들에게는 굉장한 상처가 돼요.

 지금 애진이 같은 경우는 그런 게 있어요. 애가 배에서 탈출할 때, 마지막에 나왔는데, 애가 캐비닛 위에 올라가 있었어요. 그런데 애가 나오는 과정을 몰라요. 어떻게 나왔는지를. 바깥에 보트에 올라탈 때 거기는 기억나지?

애진학생 응, 그 안에서 내가 왜 혼자 있었는지는 모르겠어.

아버지 의사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기억들이 안 좋은 거면, 다시 떠올리면 힘들 거다. 그렇지 않은 기억이라면 애진이 성격상 잘 이겨낼 것이다.” 나중에 내 나이 돼서 힘들 때, 그런 생각이 나면 굉장히 힘들거든요. 그래서 걱정이 돼요.

Q. 참사 이후 일상에 변화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아버지 아이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안도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희생됐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안산에 오니까 실감이 안나더라고요. 아이들이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이도 상처입어서 오니까 옆에서 지켜보고 병간호 하는데, 아이가 한 말이 딱 있었어요. “아빠는 진상규명할거지?” 아니 얘가 뭘 알고, 배에서 나왔는데 첫마디가 그럴까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2학년 아이가 배가 허무하게 침몰할거라고는 생각도 안한거고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거죠. “그렇게 할게” 라고 답했어요. 

 참사 이후에 회사에 복귀하긴 했었는데, 복귀하고서 ‘이런 게 우리가 소위 이야기하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회사에 가도 사람들이 말을 안 걸어요. 나를 보고 불안해하고… 뭔가 왕따 당하는 기분이 드는 거에요. 일하기가 상당히 힘들더라고요. 또 아이도 계속 부모가 곁에 있어줘야 하고 유가족 분들도 도와야하니까. 회사를 그만뒀죠. 처음에는 가족협의회에서 생존학생 학부모 대표를 맡았다가, 지금은 진상규명 분과 팀장을 맡고 있어요.

Q. 거주하는 동네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아버지 원래는 여기 분향소 옆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어요. 대부분의 단원고 학생들이 다  이 근처에서 살잖아요. 선부동, 와동, 고잔동. 우리가 거기 몇 년 살았지? 너 태어날때도 있었지? 

애진학생 응 

아버지 17,18년 살았죠. 그러다가 이 참사가 나고 이사를 가게 됐어요. 참사가 나고서 동네 가게에 나가면 다들 자꾸 물어봐요. 심지어 안 좋은 소리도 들렸어요. 아이한테 참사에 대해서 물어볼까봐 걱정이 됐어요. 주변의 아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도 달라요. 그러다보니 살기가 좀 그렇더라구요. 또 아이가 학교에 같이 가던 친구들이 이제 없으니 등교할 때 힘들 것 같아서 월피동으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그런데 월피동으로 이사를 가도, 참 그것도 신기하더라구요. 맨처음에 이사가서 세탁소를 갔는데 이사오셨나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몇호에요? 105동 205호에요 하니까 세탁소 아주머니가 깜짝놀라더라구요. (세월호 생존학생 가족인 것을) 알고 있는 거에요. 

Q. 생존학생에 대한 지원프로그램은 어땠나요?

애진학생 (그동안) 공부는 솔직히 잘 못 했고요. 치유 프로그램이 저랑은 잘 안 맞았던 거 같아요. 상담은 저는 안하고 있고, (상담 프로그램과) 맞는 애들은 하고 있어요.

아버지 아이들이 정신적인 충격이 있으니 심리적 안정도 취하면서 공부해야 해요. 그리고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할 때도 지원이 돼야 하는데, 이런 지원이 전혀 없어요. (지원 기간이) 결국 5년으로 정해졌고. 지금도 약물치료를 받고 심지어 자살을 시도한 아이들도 있지만 언론에 내보내지 못해요. 아이들이 상처를 입을까봐. 또 아이들 이야기 때문에 유가족 분들이 더 힘들어지고, 흔히 이야기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까봐…. 

 그래서 생존학생들에 대한 부분도 (정부에) 소송을 거는 이유는 참사에 있어서 모든 피해자에 대한 책임을 정부가 직시하고, 생존자의 피해도 정부가 알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국가에 의한 대형 참사에서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서 소송을 걸었어요.

Q. 특례입학이 최근에 논란이 된 바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버지 아시다시피 정원 외 입학이에요. 그리고 이 아이들이 여태껏 이야기한 것은 특례로 인해서 혜택을 보고 싶지는 않다는 거였어요. 저희(부모)도 마찬가지예요. 언론에서는 저희가 (정부) 관계자들과 모여서 (특례입학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희생자 부모님 앞에서 ‘우리 아이들 특례 입학 좀 해주세요’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어요. 그리고 희생자 부모님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가만히 있겠냐구요. 생존학생 학부모들도 유가족들 보면 죄송스러운 마음이 큰데, 이분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학 특례를 이야기해요. 

 서울대 게시판에서는 어마어마한 특혜를 받는 거라고 이야기하는데, 생존한 75명 중에서 상위권이 상당히 있어요. 그리고 정원 외 입학이기는 하지만, 아이들도 알기 때문에 자기들 분에 넘치는 학교를 지원 안 해요. 실제로 확인해보니, 서울대 지원한 학생들은 거의 1등급이지? 

애진학생 아마 한 명은 미술, 그런데 또 한 명은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걔는 거의 1등급이야. 원래 중학생 때부터 서울대를 가려 했어요. 혹시 제 친구가 서울대학교에 가게 되면, 그렇게 (나쁘게) 안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Q. 보존돼있는 교실은 어떤 의미인가요?

애진학생 애들 생각날 때마다 왔다갔다하고, 편지도 쓰고 그래요. 교무실도 들어가고요. (교실에 가면) 잊지 말자는 느낌을 많이 주는 것 같아요.

Q. 친구들끼리 세월호 이야기를 하나요?

애진학생 애들이 마음속으로 슬퍼하고 있는데, 내색은 안 해요. 친구들끼리 있을 때도 그래요.

이지혜 교사의 아버지 이종락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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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가 끝나고 서울정부청사 앞에 서있는 이종락 씨.(가운데)

 이종락 씨는 세월호 참사로 사망한 7반 이지혜 선생님의 아버지다. 세월호에서 사망한 다른 교사와는 다르게 이지혜 선생님과 3반 김초원 선생님의 죽음은 순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들이 기간제 교사였다는 이유 때문이다. 유가족들은 두 교사의 순직 인정을 위해서 다섯 번의 오체투지를 했다. 

 이종락 씨와 만난 것은 다섯 번째 오체투지가 진행된 11월 4일이었다. 이날 오체투지는 종로5가 기독교 회관에서 인사혁신처가 있는 서울 정부종합청사까지 진행됐다. 2시간의 엄숙한 행렬 이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Q. 다섯 번째 오체투지라고 들었는데, 신체적으로 힘들지는 않으신가요?

 몸도 힘들지만, 마음이 더 힘듭니다. 몸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지만,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다 보니 더 힘이 드네요. (오체투지를) 많이 해서 순직 인정을 해준다면 더 많이 해보고 싶지만, 우리가 서명을 하고 인사혁신처 앞에서 기자회견도 하고, 의견서 전달도 해보고, 여러 노력을 많이 해봤지만, 인사혁신처는 확고하게 현행법으로는 안 된다고 말하니…. 다른 방식으로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Q. 다른 방식은 무엇인가요?

 청와대 앞에서 혈서를 써서 심정을 전달해보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청와대 앞에서 상복을 입고 대통령에게 사연을 호소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Q. 인사혁신처가 기간제 교사의 순직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인사혁신처에서는 (기간제 교사가) 상시 근무자가 아니다, 공무원이 아니기 때문에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국회입법조사처나 대한변호사협회, 법원의 판결을 보면 기간제 교사도 교육공무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의 관행 때문인데, 그 관행을 바꾸기가 굉장히 힘들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번은 인사혁신처의 담당 사무관에게 문자를 보냈어요. ‘왜 안 해주려고 하시냐. 지금까지의 관행 때문에 그렇다면 사무관님이 그걸 한 번 바꿔봐서 순직 인정이 되게끔 하면 국민들에게 칭송받을 것이다. 관행을 한번 바꿔보라…’ 그랬더니 담당사무관이 전화로 하는 말이 현행법으로는 안 되니까 소송을 걸고, 국회에 찾아가서 특별법을 만들어달라고 이야기하라는 거였어요.

 우리 같은 사람이 뭔 힘이 있습니까. 담당사무관이, 인사혁신처가 직접 움직여서 교육부나 국회에 건의해야 하는데…. 힘없는 국민, 가슴이 아프고 미어지는 유가족들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진짜 공무원으로서 할 도리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Q. 이지혜 선생님은 언제부터 단원고에서 일했나요?

 대학 나와서, 임용고시에 합격이 안 됐어요. 그래서 안산 성안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6개월을 일하고, 단원고에서 일하게 됐어요. 단원고에서는 5년하고도 1개월 16일, 4월 16일이니까, 5년 1개월 16일 동안 일했어요.

Q. 5년 동안 계속 계약갱신을 한 건가요?

 그렇죠. 1년마다 한 번씩 계약갱신을 했는데, 3년차 끝나고 안산 원곡고등학교로 서류를 냈어요. 서류를 내고 면접에 합격해서 원곡에 가려했는데, 단원고 부장 선생님들이 (이지혜 선생님이) 일을 열심히 하고 학생들도 잘 가르치니까 추천을 해서 더 있게 됐어요. 

 당시에 우리 큰딸이 저한테 묻더라고요. “아빠, 원곡으로 갈까 단원에 있을까?” 그래서 제가 원곡고등학교는 공단 근처라 차도 많이 밀리니까 출근하기에 단원고등학교가 더 나을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원곡고로 갔으면 이런 참사는 안 당했을 텐데…. 아빠로서 인도를 잘 했으면 희생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게 참 안타깝습니다. 

Q. 이지혜 선생님의 7반 담임 활동은 어땠나요?

 그 전에는 여학생들만 맡다가 남학생을 맡는다고 해서, 남학생들이 말을 잘 들을지 걱정을 많 이 했어요. 막상 담임을 맡고 같이 지내다 보니까 학생들이 말도 잘 듣고, 뭐든지 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이지혜 선생님이) 7반 학생들을 많이 예뻐했어요. 

 학생들과 같이 학교에 남아서 야자도 하고. 학생들을 많이 예뻐했어요. 우리 딸도 그전에는 임용고시 보는 것도 꺼려해서 몇 번 시험을 안 봤는데, 이번만큼은 열심히 해서 붙겠다고 학생들하고 같이 공부도 하고, 열심히 했거든요. 그렇게 했었는데 가버렸습니다…. 

Q. 아버님께 단원고에 보존된 교실과 교무실은 어떤 의미인가요? 

 우리 딸의 담임 교실이었던 2학년 7반 교실만큼은 자주 가고 있습니다. 가보면 졸업생들이 와서 이지혜 선생님 보고 싶다고, 추억도 많이 적어놨습니다. 또 뒤에 보면 ‘님의 침묵’이라고, 시도 적혀있는데…. ‘아, 님은 갔습니다…’(침묵) 그 ‘님의 침묵’을 보고 많이 울었습니다. 나의 딸은 갔지마는, 영원히 잊을 수 없고…, 내 가슴에 묻고, 내 가슴에 담고, 항상 내 목숨 다할 때까지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 생각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교실도 존치하고, 교무실도 존치해서 다시는 이런 사고가 안 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참사를 겪고 이렇게 돼있다는 것을 후손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후손들도 경각심을 갖고 안전사고에 주의하지 않을까…. 

Q. 교실 존치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맨 처음에 사고 나고, 장례 치르고 발인 끝나고 학교를 한번 가니까, 학교에서 교무실 책상을 다 비우려고 하더라고요. 그때가 아마 작년 5월 중순경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때는 ‘ 아 그래야 되나보다’했지만 선생님들 입장에서도 교실을 함부로 치운다는 것은 안 좋아서 지금은 우리도 교무실을 이전처럼 다시 만들어 놓고 가꾸고 있습니다. 우리 선생님 입장에서는 교실도 존치를 하고 교무실도 존치를 해서 다시는 이런 사고가 안 나게 경각심을 갖게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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