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의 길해찬 부후보가 구름판 선본(오른쪽) 측이 제시하는 정책의 근본적 필요성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우: 생명과학부 학생공간에 붙은 두 선본의 대자보. 구름판 선본은 정통 자보 형식을 표방하며 유려한 문체를 자랑한 반면 New Run 선본은 카카오톡 메시지 형식으로 시각적 효과와 재미를 극대화했다.
권영길, 그게 누구야? 에이 허경영은 알지
지난 여름, 15학번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하던 중에 생긴 일이다. 여덟 명의 학생들 중 단 한 명도 권영길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려 세 번이나 대선후보로 출마한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그 지역구 출신자의 기억에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 허경영은 누군지 다들 아느냐고 물었더니 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 눈을 바라봐,” 축지법, 아이큐 400, 등 허경영이 남긴 모든 기행과 유행어를 쏟아내며 배를 잡고 웃었다. 공중부양 흉내를 내는 학생 때문에 잠시 수업이 중단될 지경이었다. 적어도 15학번 학생들에게 권영길은 인지도 면에서 허경영에게 게임이 안 됐다.
과거 열혈 민노당원의 한 사람으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20대 초반 학생들이 정치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식견이 있지 않고서는 확실히 권영길 전 대표를 알기가 어려울 것이다. 도포자락과 수염을 휘날리던 왕년의 강달프, 강기갑 전 대표조차도 이제 기억에서 희미해지는데 하물며 일말의 재미요소도 찾아볼 수 없는 권영길이라니. 한국사 교과서에는 그렇게 핏대를 세우면서 정작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대해 어찌 이리 관심이 없느냐며 20대를 탓하기에는 사실 정치가 너무나 ‘노오오오잼’이다. 71년 4월 장충단 유세에 100만 인파가 오직 김대중의 연설을 보기 위해 모인 일은 결코 정치적 지지자들의 충성심만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박정희가 하룻동안 무료화한 전국의 영화, 콘서트 관람보다도 김대중의 연설이 훨씬 더 ‘예스잼’이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발길이 장충단공원으로 향한 것이다. 만약 오늘의 정치판에도 <인터스텔라>보다 재미있는 이슈, EXO 오빠보다‘ 간지 터지는’ 인물이 있다면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현대 민주주의의 원형을 아테네에서 찾으려는 성급한 시도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이 회의적이었듯이, 대학 내 자치활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고스란히 정치적 감각이나 식견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통 20대의 4할 이상을 대학에서 보내는 학생들에게 총학생회에서부터 각 학부·반 단위 기층에 이르는 학생회 활동에 대한 관심과 경험은 분명히 유의미하다. 50%의 투표율을 못 넘겨 무산이 되기 일쑤인 총학생회장 선거, 서로 사양하여 등 떠밀다시피 하여 간신히 단일후보를 세우고 마는 기층 학생회의 회장선거는 서울대의 11월을 대표하는 풍경이다. 그나마 총학생회는 이따금씩 회장이 성인오락게임 연루 의혹을 받는다거나 투표함에 손을 대서 자극적인 이슈라도 만들어내지만 학부·반 학생회는 학생들에게 흔한 안주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아무런 재미도 감동도 없는 단일후보 찬반투표, 누가 당선되든 똑같이 신입생들 모아 술집 데려가고 MT 데려가는 역사의 반복, 서울대의 학생자치는 ‘핵노잼’의 온상이다.
역대 급 학부 학생회장 선거
이렇게 ‘노잼’이 만연한 풍토 속에서 지난 11월 3일에 치러진 자연대학 생명과학부의 제12대 학생회장 선거는 오늘날 다른 어느 단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성숙한, 그리고 무엇보다 ‘예스잼’인 학생정치의 귀감이었다. 구름판(정후보 노진현·부후보 홍성현)과 New Run (정후보 강현식·부후보 길해찬) 두 개의 선본이 강력한 집권 의지를 유감없이 선보이며 겨룬 이 선거에는 여당과 야당이 있었고, 정책대결이 있었으며, 기층 학생회에서 전무하던 유세와 선전이 있었다. 당청간의 밀월이나 흑색선전, 금권선거 의혹 및 선관위의 절차적 정당성 문제, 심지어는 당내 계파 간 갈등까지도 생겼지만, 이에 학생들 스스로가 이의제기를 하고 상호 합의하는 과정 역시 비교적 상식적이고 신사적인 과정 하에 이루어졌다.
투표 하루 전인 11월 2일에는 급기야 정책간담회까지 열렸는데, 여기에는 생명과학부 학부생 50여명이 자리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날카로운 질문이 후보자의 심기를 건드릴 때마다 좌중의 공기는 팝콘을 팔아도 될 정도로 흥미진진해졌다. 일각에서는 코딱지만한 학부의 분열을 조장한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러나 정책의 실현가능성과 후보의 지난 행적, 학생사회 기여도까지 거론하며 청문회장을 방불케 한 이날의 정책간담회는 명백한 자치활동의 모범이었다. 단순히 술친구에게 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정책을 보고 찍겠다는 진지한 자세는 지난 10여년 간 자연대는 물론 서울대 전체를 보더라도 학생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이은 시험 속에서도 학생들의 최대 관심사로 부상한 생명과학부 학생회장 선거는 결국 11월 3일 단 하루에 68%를 초과하는 투표율을 기록하며 성사되었다. 인선이나 기조 면에서 전대 학생회를 계승한 여당에 해당하는 구름판 선본의 승리였다. New Run 선본은 야당의 입장에서 전대 학생회가 미진했던 부분의 정책을 위주로 어필하고자 한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선거 직전에 참모진을 상실하여 선거캠프 구성 자체가 늦어졌고, 선전전이나 유세에서 야당의 특권인 심판적 성격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것이 주된 패인으로 보인다.
부패보다 나쁜 것이 노잼
생명과학부 선거는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학생들은 프로야구에서 두산, 삼성을 응원하듯이 저마다 각자의 근거를 가지고 각 선본을 응원했다. 양 진영을 합하면 약 20명인 선본원들은 연일 이어지는 전략회의와 선전전에 투신하며 승패를 떠나 저마다의 경험과 기억을 축적했다. 한 번 무너진 학생자치를 되살리기가 몹시 어렵듯이, 반대로 이번에 크게 부흥한 생명과학부의 학생자치가 다시 무관심과 무기력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도 몇 년간 학생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이어진다면 생명과학부는 서울대 학생자치의 교본을 자처하는 수준에 이를지도 모른다. 정치는 그 규모가 크든 작든 일단 ‘예스잼’이고 볼 일이다.
기층 학생회에서부터 학생들이 축지법 시연까지는 하지 않는 선에서 재미있는 정치를 시도한다면 학생회의 몰락은 옛말이 될 것이다. 부패나 무능보다 나쁜 것은 대중의 관심을 좀먹는 ‘노잼’이다.
김성민(생명과학부 박사과정 수료)

생명과학부에 몸을 담은 지 10년째, 후배들에게 한 글자라도 더 공부를 시키려는 지독한
교육중독자로 악명이 높다. 생물학, 세포학은 물론 글쓰기와 『논어』까지 가르치는
전천후 교육에 순수하고 ‘가치중립적인’ 정신을 강탈당한 피해자가 매년 속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