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 낮이 되면 혜화역 1번 출구 근처에는 우리와 조금 다른 모습의 이방인들이 서성인다. 어디론가 향하는 한 무리의 조선족 아주머니들 옆으로 수염을 북실하게 기른 중년 남성이 흰 봉투를 들고 지나간다. 길가에 쪼그려 앉아 뜻 모를 글씨가 써진 물건을 파는 외국인도 있다. 조선족 아주머니를 쫓아서 동성고등학교의 정문을 지나 강당으로 올라가니 낯선 언어들의 웅성거림이 나를 마주한다. 정면으로는 긴 복도를 따라 푸른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낯익은 흰 봉투를 들고 떠나가는 사람도 있다. 여기는 이주노동자를 위한 무료진료소, ‘라파엘클리닉’이다.
문턱이 가장 낮은 진료소, 라파엘클리닉 라파엘클리닉은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의료진료 및 구호활동, 인권문제 해결을 통해 최소한의 의료서비스와 기본권 보장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료봉사단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들과 외부 의료진으로 구성된 30여 명의 의료봉사자가 환자들을 진료한다. 의과대학 가톨릭학생회 구성원들과 간호대 봉사자, 타 대학 의대생 등은 의무기록·진단검사·예재진 등 기초적인 의료 업무를 분담해 의료진을 돕는다. 여기에 환자 안내·약 배부·환경 등을 담당하는 일반봉사자까지 합하면 라파엘클리닉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매 진료마다 100여 명이 넘는다. 라파엘클리닉의 뿌리는 1950년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가톨릭학생회의 빈민 무료진료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료보험이 확산된 이후 국민들의 의료복지 수준은 높아졌지만 여전히 이주노동자들의 의료복지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1996년 말 천주교 인권위원회 측으로부터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의료 환경 소식을 전해 듣고 몇몇 교수들과 가톨릭학생회 학생들은 의기투합해 이주노동자들의 진료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창구를 마련하기로 했다. 몇 달의 준비과정을 거쳐 1997년 4월 13일 혜화동 천주교회에서 첫 진료가 시작됐다. 진료는 토요일에도 격무에 시달리는 이주노동자를 배려해서, 일요일마다 격주로 진행됐다. 이들이 처음에 가진 것은 가톨릭학생회 회원들이 가지고 다니던 약품 상자 두 개와 안규리 교수(내과)가 내어놓은 50만 원이 전부였다.

강우일 주교는 이 무료진료소에 치유의 천사 라파엘에서 영감을 받아 ‘라파엘클리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2008년까지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총 11만 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라파엘클리닉을 찾았다. 그 사이 라파엘클리닉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회복지법인으로 등록해 보다 장기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진료가 가능해졌고, 후원회 활동도 활발해졌다. 한편 매 월 천여 명에 이르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고려대 의대의 몇몇 교수들을 중심으로 내과만 운영하는 ‘작은 진료일’을 준비했다.
비우니 새로 채워지는, 작은 기적의 연속 부족한 것, 필요한 것은 돈과 물건을 가리지 않고 항상 적절한 때에 채워졌다. 진료소가 자리 잡던 1997년에는 IMF 사태가 터지면서 안 그래도 팍팍했던 이주노동자의 삶이 더 어려워졌다. 당장은 약보다도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라파엘클리닉은 긴급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김전 진료소장(의과대학 생리학교실)은 “모든 것이 다 움츠러드는 동안에 라파엘클리닉은 가장 성장한 사업을 벌인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 소장이 외부 수상으로 얻은 상금은 이주노동자들의 식량을 마련하는 데에 쓰였고, 적십자사를 비롯한 단체들로부터 후원도 잇따랐다.

필요한 각종 진료 도구들도 시나브로 채워졌다. 마침 미장원에서 버린다는 의자는 훌륭한 치과 진료용 의자가 됐다. 당시 신학교와 의대 병원의 폐기물 처리장에서 구한 책상과 의자는 아직도 사용하고 있단다. 영상의학과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 김호철 씨는 라파엘클리닉 10주년 기념집에서 “초음파 검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 거짓말처럼 검사기를 기증해주시는 분이 나타났다. 기술이 발달해 더 이상 라파엘에서 영상 진료가 어려워졌을 때에는 혜화방사선과의 원장님이 천사처럼 나타나 단순촬영까지 도맡아 주셨다”며 간증 아닌 간증을 풀어놓았다. 이런 라파엘클리닉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2003년 몰아닥친 사스는 의료 봉사 중단까지 고려하게 만들었다. 사스가 유독 한국인에게만 힘을 못 쓴 것은 사실이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라파엘클리닉은 진료를 강행했다. 의료봉사는 라파엘클리닉을 찾아 올 이주노동자와의 약속이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이주 노동자들이 강제추방에 맞서 명동성당에서 농성한 일이 있다. 이 때 라파엘클리닉은 “찾아오는 환자만 진료할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진료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이를 계기로 2003년에는 이동클리닉을, 2007년에는 몽골을 시작으로 해외의료캠프를 시작하게 됐다. 멀리서 진료소를 방문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의정부와 동두천에서도 지부를 냈다.
“주는 것보다도 더 얻는 이 곳”

라파엘클리닉을 찾는 환자들은 내과를 가장 많이 이용한다. 파키스탄에서 온 아바스 씨(31)도 배가 많이 아파 라파엘클리닉을 찾았다고 했다. “의료보험이 없어서 돈이 많이 들까봐 병원에는 가지 못했다”는 그는 “이 곳에서는 마음 편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다”면서 웃었다. 아바쓰 씨처럼 돈이 많이 들까봐 약국조차도 쉽게 가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라파엘클리닉은 진료비와 약제비를 받지 않는다. 라파엘클리닉 안에서 진료를 완전히 마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병원으로 2차 진료를 연결해주기도 한다. 필리핀에서 온 데니스 씨(46)는 원래부터 있던 심장 문제로 처음 라파엘클리닉을 찾았고, 지금은 정기적으로 약을 타러 온다고 했다. 작년에는 안과 치료를, 그 전 해에는 한국 공장에서 일하다 다친 척추의 치료를 라파엘클리닉이 연결해 준 병원에서 무료로 받았다고 했다. 그는 “종종 약간의 비용이 들긴 하지만 치료의 대부분이 무료라는 점이 좋다”며 “일요일에도 시간을 내 우리를 도와주는 봉사자분들께 감사하다”고 전했다. 라파엘클리닉에서 무언가 얻어가는 것은 이주노동자들만이 아니다. 류현진 봉사단장(의예 07)은 “이 곳에서 사람과 기회를 얻었다”고 말했다. “봉사자분들은 제게 평생 갈 가족 같은 사람들이 됐어요.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봉사하고 계신 분들처럼 앞으로도 함께 할 사람들이라는 거죠. 한편으로는 제 스스로 이주노동자분들께 가졌던 벽을 허물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됐어요. 우리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할 분들이라는 걸 깨달았죠.
”더불어 건강한 사회를 위해 지도신부인 고찬근 신부는 항상 이주노동자들은 남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한국 사람들이 꺼려하는 일을 이주노동자들이 대신하고 있으니, 누구보다도 이들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이주노동자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고된 일이나 악덕 고용주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관심 갖지 않는 우리들 자신”이라고 덧붙였다. 다가올 10년에 대해 라파엘클리닉은 △Globalization(의료봉사의 세계화) △Reproduction(다음 세대로의 봉사 릴레이) △Alrutism(나눔) △Community(다양성과 유대) △Environment for Patients(진료환경 개선) 즉 GRACE라는 비전을 갖고 보다 나은 진료소로 도약한다는 계획이다. 류현진 단장은 “서울대 학생들을 비롯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라파엘클리닉에서 봉사의 기쁨을 누리길 바란다”며 참여를 독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