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저장소
[김종천 / 416기억저장소 사무국장]
저는 416 가족협의회 기억저장소 사무국장 김종천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은 저희입장에서 가족입장에서 매우 반가운 손님입니다. 슬프지만 매우 반가운 손님입니다 지금 이 기억저장소에 전시되어있는 아이들 방 사진은 아이들 방 사진으로 3번째 전시입니다. 10월 16일 이후로는 빛과 소금이라는 다른 주제의 이름으로 전시가 시작이 될 것입니다.
사진에 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면 너무 깨끗하죠? 이사를 가셨습니다. 이사를 가신 후 그 전 아이 방이 너무 좁고 허름해서 그것이 마음에 아파서 더 깨끗하고 더 넓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이 수학여행 갔던 여행 물품이 있고요. 이 아이들 방 사진을 보면 그 어느 아이들 방하고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대한민국 어느 아이들 방하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 방에 있어야 될 아이들이 없다는 것이 유일하게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머리 위에는 304개의 기억함이 있습니다. 이 304개의 기억함에는 304개의 물건을 넣어질 계획입니다. 그리고 일부 물건이 채워져 있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사진을 넣어두신 분들이 의외로 많고요. 여기 영란이 기억함인데요. 영란이 기억함에는 노란 나비가 있습니다. 팽목에서 노란 나비를 본 날, 영란이가 영란이 어머니 곁으로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란이가 가는 곳마다 나비 모양을 한 무엇인가가 계속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비를 본 날이면 어김없이 영란이를 만난다고 하십니다. 지갑에 있었던 노잣돈, 아이들이 거의 다 노잣돈을 써보지 못하고 못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심을 나타내는 것들이 있고요. 그리고 물건들을 많이 넣어주셨는데요. 캐릭터도 넣어주시고, 그리고 이것은 여권인데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여행을 여권에는 도장이 하나도 찍혀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억함에는 아이들의 소중한 물건들이 계속해서 올라갈 거고요. 그리고 여기 가운데 있는 이불은 진도 체육관에서 올라온 이불입니다. 이 이불을 가져올라 올 때,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불을 왜 가져가는데 2014년 가족들은 팽목에서 안산분향소에서 그리고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청운동에서 풍차노숙을 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팽목에 있었던 이 이불은 이 이불에 배인 서러움, 고통, 그 피눈물을 우리가 어떻게 버리고 오겠느냐 그래서 우리는 이 이불을 양으로 치면 5톤 트럭 하나 가득 싣고 올라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이불을 가지고 이불을 넓게 깔고 그 위에 앉아서 무엇을 하고자 하신다면은 대여 가능하니까 이불을 가져가셔서 여러 가지 아이들을 기억하는 일들을 하시면 좀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공간설명은 이정도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단원고
[김종천 / 416기억저장소 사무국장]
1반부터 6반까지 있고 생존자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이 있습니다. 2층에는 7반부터 10반까지의 교실이 있고 교무실이 있습니다. 그럼 3층 3학년 1반 교실부터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1반부터 6반까지는 비교적 살아 돌아온 친구들이 있습니다. 7반부터 10반까지는 살아 돌아온 친구가 거의 없습니다. 1반이 19명 가장 많은 아이들이 돌아왔는데요. 여기서 가족들이 또 고통스러운 게 하나가 또 있는데 유경근 집행위원장, 예은아빠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아빠 엄마들이 ‘선생님 말 잘 들어’라는 말을 했습니다. 안내방송을 잘 따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과가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1반에 애진이하고 애진이 아빠는 좀 달랐습니다. 3번의 전화통화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애진이가 애진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빠” 그 배 상황을 설명을 했습니다. 애진이 아빠는 바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전화통화가 끊어졌습니다. 두 번째는 애진이 아빠가 애진이에게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나왔니. 아니. 왜. 나가지 말래. 왜. 선생님이 나가지 말래. 왜 왜라는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몰라 이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가지 말래라는 말을 계속 되뇌었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통화가 끊어졌습니다. 세 번째 역시 애진이 아빠가 애진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오라니까 못나가 나가지 말래. 나오라고. 친구들도 가만히 있자고 해. 나오라고 그래서 애진이가 울면서 친구들한테 우리아빠가 나가래 그때는 이미 물이 무릎까지 차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애진이는 몇 명의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나오게 됐습니다.
그 편지글을 읽어보시고요. 그리고 하늘색 노트는 방문자들을 위한 노트입니다. 한 교실에 하나의 편지는 꼭 좀 읽어 봐주시면 좋겠고 여력이 되는 만큼 단문이라도 하늘색 노트에 글을 남겨주세요. 어머니들이 와서 보시곤 합니다. 저도 가끔 펼쳐보기도 하고요. 그래서 1반 2반 교실 둘러보시고 5분 후에 3반 교실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곳 3반은 8명이 살아 돌아오고 26명이 희생이 됐습니다. 시행령 싸움 때 22가구가 아주 격렬하게 싸운 반이기도 합니다. 3반 교실에서는 형제자매와 관련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원고 형제자매들은 150명 정도 됩니다. 가장 어린 친구가 6살 아이이고요. 좀 나이가 많은 친구가 30대 초반입니다. 그리고 지금 스물세 살인 친구가 성호누나 예나가 6월 달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힘들어지고 친구랑 싸우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다 절교를 하더라고요. 현재 상황 이런 것을 이야기하면 그만해 그만할 때도 됐잖아. 왜 이렇게 유난을 떠니 이렇게 얘기가 이어진답니다. 그러면서 절교하게 되고 절연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체적인 특성이 외톨이가 되고 있다는 것. 부모들도 물론 이전의 지인들과 다 관계가 끊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울면 운다고 뭐라고 하고 밥을 맛있게 먹으면 이젠 괜찮나봐? 다 극복됐나봐? 웃으면 웃는다고 뭐라고 하고 세월호 가족들은 그래서 소리치면 세월호 갑질한다 그래서 이 엄마 아빠들의 그 스트레스를 자기 자학하는 것으로 푼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것을 지켜보는 형제자매들. 그런 자학하는 부모들을 보며 자기의 고통을 부모한테 말할 수가 없는 거죠. 지금 부모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계속 끊임없이 보면서 살아온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는데 엄마마저 아빠마저 이것인 것 같습니다. 세월호 가족 중 2명이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명은 스스로 운명을 끊으셨습니다. 그 소식을 다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150명의 형제자매들의 가장 불안한 것은 ‘내 아빠 엄마가 어떻게 될까봐’가 가장 불안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4반은 9명이 살아 돌아오고 28명이 희생이 됐습니다. 그리고 5반은 9명이 살아 돌아오고 27명이 희생이 됐습니다. 5반 교실에서는 조금 다른 얘기를 저도 잘 모르는 얘기를 하겠습니다. 그 8월 30일 날 이 기억과 약속의 길을 하면서 어떤 중학교 2학년 아이를 만났습니다. 근데 그 아이는 4반의 2명의 오빠를 만나러 왔던 것이고요. 그 2명의 오빠는 음악동아리를 같이 했던 오빠입니다. 기억과 약속의 길을 다 끝나고 그 친구가 저를 계속 보고 있기에 불러서 좀 얘기를 좀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지금까지 자살시도를 세 번 했다고 합니다. 제가 놀래가지고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오늘 오빠들하고 약속했어요 다시는 그렇지 않겠다고 용감하게 살아서 오빠들의 뜻을 오빠들의 억울한 죽음을 동생으로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8월 31일 날 일산에 있는 여기 3반의 시헌이 친구가 자살을 했습니다. 저는 9월 2일 날 그 사실을 알게 됐고요. 그래서 되게 놀랬습니다. 놀래가지고 제 주변에 있는 교육현장에 있는 지인들한테 물어봤습니다. 알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알 수 없다. 이게 꼭 안산의 문제만은 아니겠구나 하고 그때 이제 심각하게 받아들였는데 250명의 친구들은 어떤 상태일까 그 친구들은 어떤 분노,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 그래서 이제 기억저장소는 고등학생들, 대학생들 친구들이 비교적 자발적으로 오는 공간이여서 가끔 그런 것들을 넌지시 물어보는데 굉장히 답답해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 아이들의 분노가 어떻게 그 이후에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8월 30일과 31일의 일을 놓고 봤을 때 사실은 좀 많이 두렵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것에 대한 대처능력은 물론 없겠죠? 있을 수 있을까요?
75명이 살아 돌아왔고요. 한명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 75명은 바로 단원고로 들어오지 않고 두 달 정도를 중소기업 연수원에서 완화치료를 받고 단원고 교실로 왔습니다. 일주기쯤에서 어떤 아이가 죽은 친구들과 자주 갔던 공원에서 사진을 찍어서 올렸습니다. 그것에 대한 어떤 이의 대응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살아서 좋니? 이 아이들은 그 경계에서 그 경계를 영원히 살 수 밖에 없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저께 퇴근하다가 생존자 엄마를 마났는데요. 우리는 살아 나온 게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근데 그 75명의 부모는 유가족 앞에 죄인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가족은 미수습자 가족 앞에 죄인인 인거고요. 장례를 치러서 죄인, 죽음의 현장에서 탈출해서 죄인, 사람이니까 아까 건우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부럽다. 너무 부럽다. 생존자 아이들. 고통스러운 거 이해하는데 그래도 부럽다. 너무너무 부럽다 내 아이가 그 고통 속에 살아간다 해도 나는 내 아이가 살았으면 좋겠다. 라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아까 이제 3반 김청원 선생님 7반 이지혜 선생님은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였습니다. 뭐 이놈의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이라는 이유 하나로 순직인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죽어서도 차별을 받는 이상한 사회입니다.
교실에 관련된 얘기는 작년부터 시작이 됩니다. 처음에 교문에 있던 기록물들을 누가 일방적으로 치웠고요. 그것에서 저희가 항의방문을 했었고 그 다음에 교무실에 있던 기록물이 일방적으로 치워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소식을 듣고 저희들이 와서 따졌습니다. 그것을 따지는 과정에서 아주 우연찮게 알았습니다. 그것이 10월 12일정도 되는데요. 거의 1년 전이죠. 교실을 치우겠다는 공문을 경기교육청에 보낸 상태였고 그것이 거의 다 얘기가 끝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4월 16일 이후에 1년 137일이 지났는데 그런데 이 교실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2014년 4월 16일을 들어온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유일한 거울이라고 생각해요. 이 교실이 우리사회의 유일한 거울.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로 야만적이었는지 증명하는 것이 이 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교실과 관련돼서는 진흙탕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내년 3월까지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지게 됐습니다. 너무 야만적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아까 얘기했던 250명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본다는 논리가 광범위하게 이 주변에 퍼져있습니다. 250명 때문에 왜 우리가 피해를 봐야하냐 아마 그래서 세월호 가족들이 진상규명 싸움도 힘든 상황에서 이 교실 싸움까지 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교실을 쭉 도니까 웃지도 못하고 힘들죠 우리 코 빨간 선생님. 선생님이 제일 빨개. 근데 힘들지만 뭔가를 또 에너지를 주는 저는 좀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아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에너지 이대로 멈춰 서서는 안 된다는 에너지 저는 그 에너지를 받고요. 저처럼 자주 왔다 갔다 하면 웃을 수도 있어요 언젠가 그런데 눈물 나고 이런 게 힘든 게 아니지 않습니까.
기록자인 제가 봤을 때 이제 우리가 앞장서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제 시민이 살인자를 잡는 것 사회 구조를 개혁하는 것 생명사회를 만드는 것 그리고 생명교육을 만드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앞장서면서 가족과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드리면서 교실을 돌아보는 것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0반 교실 교무실 둘러보시고 교문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고기홍 / 영석고등학교 역사교사]
사실은 이제 현재 고3담임을 하고 있는데 9월에 수시가 있다 보니까 사실은 그 2달이라는 시간동안에 다 까먹고 살았던 것 같아요. 바쁘다는 게 핑계였던 것 같고 근데 오늘 이 경험을 하면서 되게 잘못 살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어 앞으로 학교에 돌아가서 어떤 것을 해야 할지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 같아서 저한테는 중요한 변화가 된 것 같아요
@기억과 약속의 방
[김종천 / 416기억저장소 사무국장]
기억과 약속의 방이기 때문에 약속을 안 하면 방에서 못나간다.
진짠데 여기서 약속안하고 가면 저주받아요. 저주
기억과 약속의 길은 마지막 여기에서의 토론은 가족 중심의 토론은 아닙니다. 여러분 중심의 토론입니다. 그래서 모든 분들이 한 말씀씩은 하셔야 돼요. 그렇게 기억하게 된 배경은
여러분들이 뱉은 말은 여러분이 잊지 않으실 거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한 말 유가족들이 한 말을 담아서 가셔라는 겁니다.
[이재곤 / 관광고등학교 영어교사]
저는 관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이재곤이라고 합니다.
저는 교사로서 그런 일들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그런 역할이 있겠구나 해마다 적어도 아이들한테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제시할 수 있고 같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겠구나 생각을 했고요. 학교에서 큰 역할은 아니지만 이런 거 이런 내용들이 아이들이 어쨌든 지금 3학년 학생들을 보면 잠재적으로 굉장히 큰 상처가 된 건 분명합니다. 기억해내는 것이 괴롭겠지만 그게 어쨌든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그것이 또 정치하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역사를 지우려고 하는 것이고 그 중에 하나로 포함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에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가 더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송대학교 근무 강사]
저는 대전에 있는 우송대에서 일하고 있고요. 사실은 남편이 제의를 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더 빨리 오는 게 맞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고요. 한번은 와봐야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한테 많이 하는 얘기가 교육이었는데. 교육의 목표가 뭐냐 하면 전인인간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전인인간은 인간성 교육입니다. 오늘은 제가 한 가지를 배워가는 것 같습니다. 250명의 아프고 슬픈 사람들을 많은 사람들이 보호하고 위하는 게 그게 교육이라는 것을 다시 학생들한테 말해줘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고요.
[정연구 / 사월애 동아리]
저도 청춘의 지성 사월애 정연구라고 하고요 저는 여기 기억저장소랑 단원고가 오늘 세 번째 방문인데 저는 올 때마다 새로운 다짐을 하고 항상 반성을 하는 것 같아요. 일상에 돌아가고 세월호를 기억을 매일 하려고 해도 매일같이 세월호를 기억하고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바쁜 일상에 치여서 가끔 잊기도 하는데 가끔 이렇게 안산을 찾고 단원고 교실을 방문하면 제가 그동안 살아온 일상을 되돌아보고 다시 세월호에 대한 자극을 받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다짐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어떤 자세를 유지하면서 살아야하는지 그런 걸 오면서 다시 부여잡는 게 있어서 저는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로운 것 같아요. 그리고 올 때마다 동행하는 분들도 바뀌고 얘기도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분야에 있는 분들과 얘기 나누고 그러면서 힘도 많이 얻어가는 시간인 것 같아요
[최정수 / 동대부고 영어교사]
저는 동대부고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최정수라고 합니다.저도 작년에도 세월호에 타고 있었던 학생들과 같이 2학년 담임으로 수학여행을 갈 예정이었던 2학년 담임이었거든요. 그래서 4월 달에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학생들도 민감해했고 저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거보다항상 저를 지금까지 괴롭히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세월호 이. 항상 괴롭히는 것 중에 두 가지가 제가 마약 배를 타서 담임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항상 지금까지 고민합니다. 아까 선생님의 교무실도 봤지만 학생들과 같이 남아있었을까. 두 번째는 나도 똑같이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을까. 이 두 가지를 항상 이걸로 인해서 항상 저를 괴롭히는 문제였는데 참 개인적으로 풀기 어렵더라고요. 항상 정신 차리고 어떻게든 내 주변서부터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나 교사로 살아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입니다.
[정부자 / 호성 어머님]
저가 떠날 때가 된 것 같아요. 작년은 미친 듯이 돌아다녔는데 갈수록 더 힘들어요. 네 이사를 했습니다. 좋은 집으로 새집으로 갔는데 애한테 미안하더라고요. 너 버리고 간 것 같아서. 구질구질하게 살기 싫어서 새집으로 갔는데 그것도 미안하더라고요. 형제들도 못 만나요.우리가 가면 분위기 망가뜨릴까봐. 명절이고 생일이고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인생이. 되는 게 하나도 없네요. 매스컴에서는 뉴스에서는 다 끝난 걸로. 인양도 해준다. 보상얘기도 하고 10월말일까 지는 하라고 하더라고요. 특조위도 다 됐다고 너희가 원하는 대로 다 됐는데 뭐가 문제냐고 그러는데 하나도 한 게 없습니다. 특조위도 만들어졌는데 그것도 물 건너 간 것 같아요. 그냥 보기 좋으라고 만들어놨는데 힘이 없어요. 그냥 이것저것 겹치니까 몸이 아파버려요. 그래서 그랬어요. 교실에 들어가면 아파요. 그걸 보면 산 교육인 것 같아요. 잊히지 않게 하려면 교실이 남아있어야 될 것 같아요.
나는 전교조 선생님들한테 가서도 서울역 가서도 소리쳤어요. 전교조 선생님들이 어떻게 부모님들 싸울 거냐. 센 발언을 요구하더라고요. 앞으로 어떻게 싸울 거냐. 난 선생님들한테 외쳤어요. 부모님들한테 그런 거 묻지 말라고. 부모님들 싸우는 거 모른다고. 선생님들이 26년 싸웠으면 선생님들이 앞에 나가서 싸워달라고. 다 제자들이잖아요. 대한민국 선생님이잖아요. 선생님! 그럼 앞에 가서 싸워주세요. 교육청에 가서 싸워주세요. 교실이 살아남아야 한다면 선생님들이 앞장서주세요. 네 부모님들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요. 억울해 죽겠어요. 내 자식이 왜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것인지 진상규명을 밝혀달라는데 이 부모들을 죄인취급해요. 빨갱이래요. 빨갱이가 뭔지도 모르는데 빨갱이래. 돈이나 받고 쓰래요. 돈이나 받고. 내 자식이 어떻게 갔는지 비참하게 갔는데 내 자식이 저런 구조를 할 때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기도를 한 멍청이 엄마가 그거 좀 알고 싶다고 알고 싶다고 소리치는데 알려주지를 않아요. 입 다물고 살래요.
나는 진짜 원하는 것은요. 우리 아이들 살아올 수 없어요. 네 진실을 밝혀서. 진상규명을 해서요. 왜 이렇게 힘없는 사람끼리 뭉쳐가지고 울고불고 하는 거야 왜. 우리가 내 자식들 보내놓고 어디 숨어 있어야 하는 거야? 하나도 없어요. 밝혀진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우리한테 자식 팔아서 뭐라더라 우리보고 대통령이냐고 해요. 갑질한대. 돈 10억 받았다는데 반은 내놓으래. 너희 보상받으면 이사 갈거냐고 해. 또 어떤 말까지 들은 줄 아세요? 안산에 지금은 당신들이 바빠서 돌아다니지만 5년 10년에 어느 정도 한가해지면 당신들이 정상적으로 돌아다니면 트라우마가 와서 안산에 문젯거리라는 거예요. 그래도 웃었습니다. 네 같이 살고 싶습니다. 10억이라 100억을 줘보세요. 이 아픈 마음이 이게 사라지는지 이런 모습 보여드리기 싫었는데 선생님 정말 도와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김종천 / 416기억저장소 사무국장]
되게 많이 힘들어들 하십니다. 박근혜한테 얻어맞는 것보다 더 아파요. 이웃한테 얻어맞는 게 박근혜한테 얻어맞는 것보다 더 잔인하고 지금 그 상황까지 몰리고 있는 우리가 잊으면서 시민들이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가족들은 고립되고 동네사람들이 때리는 거예요. 동네사람이. 잠잘 곳이 사라지는 것이거든요. 좀 더 힘내야 힘내서 가족들은 또 내일이면 모레면 눈물 한 번씩 훔치면서 일어날 겁니다. 네 호성이를 만나러 가야하기 때문에 내일이면 눈물 훔치고 일어날 거니까 실은 여러분들이 유일한 가족들의 250명의 아이들의 그리고 12명의 선생님, 그리고 304명 모든 희생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정의로운 시민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로운 학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자 / 호성 어머님]
호성이 엄마는 안산에 상처를 많이 받아도 내가 젊었을 때 죽기 살기로 여기서 살아보자 한곳이 안산이에요. 내 자식이 고향이어서 부딪혀 보렵니다. 나중에 죽을 때 돼서 후회하면 어떡해요. 끝까지 여기서 부딪혀보고 살아보려고요. 그래서 분향소를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 외롭지 않게 찾아주세요. 끝까지 할 겁니다. 근데 오시면 웃을 때도 있지만 울 때도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오늘 실컷 울고 나니까 다시 힘이 생겨요. 내일은 또 새롭게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종천 / 416기억저장소 사무국장]
4시간 40분 함께한 시간입니다. 우리 오늘 또 대견스럽지 않습니까? 내일 언젠가는 우리가 영웅담을 250명, 12명의 선생님 앞에 영웅담을 늘어놓는 자리도 기쁨과 슬픔 우리가 슬픔을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일어설 때 진정한 기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50명의 아이들과 12명의 선생님 앞에 영웅담을 늘어놓을 이야기가 그 첫 번째가 바로 교실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두 오늘 즐겁다고 표현하긴 그렇고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