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서 스러진 국민들의 외침

끝나지 않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

  2009년 1월 20일, 서울 도심 한가운데인 용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건물 옥상에 세워진 망루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그 안에서 6명의 국민이 사망했다. 망루에 올라갔던 사람들은 용산4 구역 재개발이 추진됨에 따라 자신의 가게를 포기하고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에 불복한 ‘사장님’들과 그들을 돕기 위해 투쟁에 연대한 철거민들이었다. 국민들의 외침에 국가는 경찰특공대 투입으로 응답했고, 망루 농성 진압을 위한 매뉴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현장에서 경찰 1명과 철거민 5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가족들은 1년 동안 사망자들의 장례를 치르지 않으며 진상 규명을 위해 투쟁했지만 결국 사건을 ‘종결’하는 데 합의했다. 참사 발생 후 355일이 지난 2010년 1월 9일 사망자들의 장례가 치러졌고, 그것으로 용산 참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끝난 사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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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산 참사 당시. 경찰은 컨테이너에 병력을 실어 농성을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한겨레

  재개발, 망루, 강제 진압

 

  공식 명칭이 ‘국제빌딩주변 제4구역’인 용산4구역이 도시환경정비사업구역으로 지정된 것은 2006년 4월이었다. 이윽고 조합이 설립돼 재개발을 추진했다. 2008년 4월 조합은 용산4구역 상가세입자들에게 보상 금액을 통보하고 이주를 강요했다. 통보된 보상 금액은 권리금 등 상가세입자들이 투자한 돈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상가세입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2008년 5월 마지막 절차인 관리처분계획의 인가가 났다. 철거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조합이 고용한 용역업체 직원들이 용산4구역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용산 참사의 생존자이자 유가족인 이충연 씨는 당시 용역업체들의 폭력적 행태에 대해 “용역들이 비둘기나 고양이의 시체를 아버지(용산 참사로 사망한 故 이상림 씨)가 운영하시던 가게 앞에 뿌려놓고는 했다”고 회상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용산참사 진상규명위)’ 이원호 사무국장은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원주민들을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위법 행위가 일어났고, 그 결과 용산 참사가 일어났지만 이러한 법규 위반에 대해 책임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2010년 12월, 용산 참사가 일어났던 남일당 건물의 철거를 끝으로 용산4구역의 철거가 완료됐다. 하지만 깨끗이 밀린 빈 땅은 한참 동안 방치됐다. 왜 그랬을까. 그보다 한 달 앞선 2010년 11월 법원은 용산4구역의 관리처분계획인가에 대해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무효 판결을 내렸다. 조합이 인가를 받는 과정에서 법과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관련 절차를 다시 밟고 재개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비용 문제로 인해 조합과 당시 시공사였던 삼성물산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고, 최종적으로 삼성물산은 계약을 해지했다.

  이후 재개발은 5년이 지나도록 진행되지 않았다. 조합은 비용 부담을 줄이려 빠르게 재개발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폭력까지 휘둘렀지만, 결국 위법한 사업 강행이 제 발목을 잡은 셈이다. 2015년 9월 효성이 새로이 시공사로 선정됐으며 본격적인 재개발 공사는 3월에 시작될 예정이다.

  세입자들을 망루로 내몬 것이 용역을 앞세운 자본이었다면, 이들의 마지막 보루이자 대화의 창구였던 망루를 무너뜨린 것은 경찰특공대였다. 이원호 사무국장은 “망루 투쟁은 곧 장기 농성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용산4구역 철거민들의 투쟁 역시 적어도 3개월은 지속될 것으로 봤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례적으로 철거민들과 단 한 차례의 대화도 시도하지 않고 농성 개시 25시간 만에 무력 진압을 실시했다. 심지어 진압에 투입된 병력은 테러 진압을 주 임무로 하는 경찰특공대였다.

  당시 경찰은 ‘과잉 진압’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철거민들이 하루 종일 도심에서 화염병을 투척해 시민들의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했기 때문에 경찰특공대를 투입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정말 테러에 준하는 상황이었을까? 이 사무국장은 “당시 경찰의 상황 보고를 보면 대부분의 시간대가 소강상태로 기록되어 있으며, 화염병이 사용된 것은 경찰의 접근이나 용역의 위협이 있었던 일부 시간대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이어 그는 “실제로 도심 테러에 준하는 상황이었다면 남일당 건물 앞의 8차선 도로를 통제했어야 하지만 이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직접 망루에 올라갔던 이충연 씨 역시 “우리는 그 지역에서 생계를 이어갈 대책과 생존권을 요구한 세입자였다. 당연히 일반 시민에게 위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항변했다.

  진압 과정에서 일어난 화재와 그로 인한 故 김남훈 경사의 순직에 대한 책임은 철거민들에게 돌아갔다. 참사 이후 이뤄진 재판에서 이 씨를 비롯한 철거민들은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죄 등으로 기소됐고, 대법원에서는 이들에게 징역 4~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철거민 5명의 죽음에 대해 기소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철거민들의 죽음은 공무집행을 방해하는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과실로 일어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원호 사무국장은 “철거민들이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권력에 의한 성급하고 무리한 진압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국민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최갑수 교수(서양사학과)는 “공공성의 총체로서 국민으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정부는 용산 참사 당시 중립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본의 편을 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처럼 용산 참사는 대한민국에서 국가와 자본이 연합하여 작동하고 있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사람이 죽었어도… ‘나쁜 재개발’은 현재진행형

  용산 참사를 통해 상가세입자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이 미비하다는 사실이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당시 용산 참사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며 재개발 대책 마련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뤄진 제도 개선은 영업손실보상비가 3개월분에서 4개월분으로 늘어난 것뿐이었다. 2012년 1월에 정동영 의원 등에 의해 발의된 ‘강제퇴거금지에 관한 법률(강제퇴거금지법)’은 거주민들의 재정착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18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이 법은 19대 국회가 들어선 뒤인 2012년 9월에 정청래 의원 등에 의해 재차 발의됐지만 여전히 계류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에 대한 논의마저 시들해졌다. 부동산 경기 하락으로 개발 사업이 많이 줄어들면서 재개발과 상가세입자에 대한 관심 역시 옅어진 탓이다.

  제도가 그대로인 만큼 2016년 현재에도 서울 시내 곳곳에서 7년 전 용산4구역에서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맞서 생존권을 주장하는 철거민들의 투쟁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2016년 1월 28일 마포구청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 마포구 신수1구역의 철거민들은 신수상가 안에서 부침개 가게, 호프집, 마사지샵 등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2015년 말 이루어진 강제집행으로 인해 운영하던 가게와 집을 떠나야 했다. 이순복 신수상가 철거민 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용역들이 좁은 가게 안에 소화기를 쏴대 숨을 쉴 수가 없었다”며 2015년 11월 30일에 일어났던 1차 강제집행을 회상했다. 그는 “개발조합에서는 영업손실보상비나 권리금 등 어떤 형태의 보상도 지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철거민들은 마포구청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구청 측에서는 조합 측과 연결해줄 테니 대화를 통해 합의하라고밖에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순복 위원장은 “원주민들에 대한 배려 없이 사업 승인을 남발한 마포구청 측에도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 위원장과 동석한 철거민은 “개발 조합 측에서는 원주민이 개발 이후 다시 이 지역에 정착하여 장사를 하겠다는 주장을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왜 재개발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빈손으로 내쫓겨야 하는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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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포구청 앞의 신수1구역 철거민 농성 현장이다. 추운 겨울,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김대현 사진기자

 책임지지 않는 책임자

  철거민들의 현실은 용산 참사 이후 7년 동안 답보 상태다. 반면 용산 참사 당시 경찰의 지휘 책임자로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서울경찰청장 직을 사퇴했던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화려한 변신을 거듭했다. 우익 단체인 한국자유총연맹의 부총재를 역임하다 오사카 총영사로 임명된 그는 임기 8개월여 만에 18대 총선 출마를 선언하며 사퇴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그는 영남대학교 객원교수를 거쳐 공기업인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임명됐고, 임기를 10여 개월 남긴 지난해 12월 다가오는 19대 총선의 출마를 준비하기 위해 또다시 사퇴했다. 현재 그는 고향인 경북 경주에서 새누리당 예비 후보로서 선거 운동을 하고 있다.

  김석기 예비후보는 도심 테러에 준하는 상황에서 국민과 국가를 지킨 것이라며 용산 참사를 자신의 치적으로 미화하고 있다. 이충연 씨는 김 예비후보의 총선 출마에 대해 “김석기 씨는 국민의 요구에 대해 한 번도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고, 위험한 진압 명령을 서슴없이 내렸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이라는 더 큰 권력을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지난 1월 18일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와 유가족들이 주축이 된 용산참사 7주기 추모위원회는 경주에서 김 예비후보의 총선 출마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김 예비후보는 이에 대해 경주 시민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용산 사고는 불법폭력시위에 대하여 경찰이 정당한 법 집행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고”였다고 주장했다.

  2월 21일에는 용산 참사 재판에서 철거민들을 변호했던 권영국 변호사가 김 예비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 총선에서 경북 경주 지역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됐다. 권영국 변호사는 “총선 출마는 단순히 김석기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를 바꾸는 데 필요한 정치적 현실의 변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출마의 변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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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일당 건물이 2010년에 철거된 이후로 재개발은 진행되지 않았다. 용산의 상가세입자들을 대표해 망루에 올라갔던 철거민들은 국가의 폭력에 짓밟혔다. 이제는 건설 자본이 용산을 대표한다. ⓒ김대현 사진기자

  “용산 참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 뒷걸음치기 시작한 계기”

  결국 용산 참사를 야기한 강경 진압에 대해 형사상 책임을 진 사람은 없었다. 국민의 희생에 대한 공권력의 책임을 규명하는 데 실패한 뒤 참사는 ‘종결’됐고 잊혀졌다. 그리고 국가의 이름을 단 폭력은 더욱 강하고 빈번하게 재생산됐다. 쌍용자동차 강제 진압,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에 대한 물대포 조준 사격 등이 그 예시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위 이원호 사무국장은 “우리는 이처럼 계속해서 일어나는 참사의 한가운데를 살아가고 있으며, 이러한 참사들은 결국 공권력이 국민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국민들을 구조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용산 참사와 연결돼있다”면서 “용산 참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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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월 23일에 용산 참사 7주기 추모집회가 열렸다. 집회가 끝나자 용산 참사 유가족과 시민들은 참사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시작했다. ⓒ오마이뉴스

  서울대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민교협)’ 의장 유용태 교수(역사교육과)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로 조금씩 진화해왔던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 용산 참사를 계기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근본적으로 철거민들의 망루 농성은 재개발 사업에서 거대 자본과 영세한 상인들의 이해관계 대립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제도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당국이 분쟁의 사유를 파악할 책임을 방기하고 농성이 시작되자마자 경찰특공대를 투입했기 때문에 투쟁은 참사로 이어졌다. 유용태 의장은 “우리 국민은 애도에 후하지만 권력에 대한 감시에는 인색하다는 지적이 있다”며 “구조적 원인을 해소하고 용산 참사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애도에 그칠 것이 아니라 항상 기억하고 감시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용산 참사’라는 단어에서 많은 사람들은 불타오르는 망루의 이미지를 연상한다. 망루 속에서 철거민들은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친다. 그러나 극한 상황의 이미지에만 집중한다면, 국가와 자본이 연합하여 국민에게 폭력을 가한 사건이라는 본질은 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폭력’이란 단순히 경찰특공대에 의한 강제 진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재개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본은 국민의 삶의 터전을 빼앗았고 국가는 자본을 비호했다. 농성이 일어났을 때 국가는 분쟁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고, 참사 이후에도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을 의무를 방기했다. 국민들이 둔감해질수록 이와 같은 국가의 폭력은 더욱 노골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용산 참사를 기억하는 것은 국가와 자본이 저지르는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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