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와 노숙인 홈리스의 인권을 주장하는 활동가들은 노숙인 대신 홈리스(homeless)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흔히 사용되는 용어 노숙인은 “길이나 공원 등지에서 한뎃잠을 자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지만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정의하는 노숙인 등은 불안정한 주거생활을 지속하는 이들을 총칭하며, 노숙인이라는 용어는 이를 포괄하지 못한다. 따라서 본 기사는 노숙인 대신 홈리스(homeless)라는 용어를 사용하되, 문자 그대로 길 위의 사람들을 가리키거나 법률을 인용하는 경우에만 노숙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
2015년 1월 2일 안산에서 한 홈리스(homeless)가 병원으로부터 치료를 거부당하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홈리스 신 씨는 뇌출혈로 쓰러졌으나, 첫 번째 병원은 그에게 두 차례나 치료거부를 통보했다. 두 번째로 방문한 병원도 신 씨는 거절했다. 5시간 동안 병원을 전전한 그는 세 번째로 방문한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한 신 씨는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이는 의료복지를 비롯한 총체적인 홈리스 복지의 허술함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현재 한국은 ‘노숙인 등의 복지 및자립지원에 관한 법률(노숙인 등 복지법)’에서 노숙인의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천명하고 있으나, 홈리스의 사망률은 평균 사망률의 두 배다. 노숙인 등 복지법이 명시하는 각종 지원에 대해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서울대저널>은 홈리스행동 이동현 상임활동가, 그리고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김도희 변호사에게 홈리스의 정의, 홈리스 복지정책의 현주소 등에 대해 물었다.
현행법은 홈리스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나?
이동현홈리스 복지를 명시하는 노숙인등 복지법에 따르면 노숙인은 ‘(가) 상당한 기간 동안 일정한 주거 없이 생활하는 사람, (나) 노숙인시설을 이용하거나상당한 기간 동안 노숙인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 (다)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의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 중 18세 이상의 사람이다.
(가)목, (나)목, 그리고 (다)목은 주거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을 잘포함한다. 그러나 ‘18세 이상’이라는 조건으로 지원 대상의 여부를 결정하는것은 부당하다. 아동, 청소년 중에서도 주거공간이 없거나 불안정한 거주지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많다. 이 기준은 현재 운영 중인 시설체계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홈리스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하는 시설은 모두 법에 저촉되는 꼴이다. 이와 같이 노숙인의 연령에 대한 임의적인 정의는 현행법이 홈리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중장기 홈리스 복지정책의 골격이 되는 ‘노숙인 등의 복지에 관한 자립지원 종합계획’(이하 종합계획)은 노숙인을 더 협소하게 정의한다. 법률에서 규정한 ‘노숙인 등’은 거리에서 살아가는 노숙인을 비롯해, 불안정한 주거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 전반을 지칭한다. 하지만 실제 사업대상은 ‘대도시 역사 주변의 노숙인 밀집지역에 생활하는 1천1백여 명의 거리노숙인’과 ‘노숙인 자활·재활·요양시설 등에서 생활하는 1만2천3백여 명의 시설 노숙인’으로 축소됐다. 노숙인 등 복지법에 명시된 노숙인 정의 중 1만여 명인 (가)목과 (나)목만 취하고, (다)목에 해당되는 20만여 명의 홈리스는 정책 대상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현재 홈리스 복지정책은 홈리스 입소시설 중심으로 운영된다고 하는데, 이는 어떤 의미인가?
이동현 현재 홈리스 정책지원은 주로 홈리스 입소시설을 통해 이뤄진다. 노숙인 등 복지법에 따르면 홈리스의 자활, 재활, 요양은 각 부문의 시설에서 전담한다. 정책대상으로서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시설을 방문하거나, 입소시설에서 거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설 중심의 복지정책은 홈리스의 인권 측면에서 한계를 지닌다. 시설에 들어간 이들은 이전에 자신이 관계를 맺던 사람들과 단절되며, 사회로부터 고립된다. 현실적인 문제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홈리스 입소시설은 이웃 주민들에게 기피 대상이다. 여성 홈리스 시설의 이전을 두고 지역 주민들이 반발했던 사건은 시설 중심의 정책을 고수하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제 복지 정책은 사회의 소수에게 시설의 형태로 제공되는 잔여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사회 전반에 인간다운 삶을 보편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환돼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홈리스 복지 정책도 시설에서 탈피해 그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주거지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이동현 상임활동가 ⓒ문주은 사진기자
홈리스에도 다양한 범주가 있을 것 같다. 하위집단에 따라 적절한 복지가 제공되고 있나?
김도희 홈리스가 모두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성인 남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여성, 아동과 청소년, 외국인, 그리고 이병자 등 다양한 하위집단이 홈리스를 이룬다. 이들이 홈리스가 된 이유도 제각각이다. 여성 홈리스는 홈리스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경제적 빈곤 외에 가정 내의 문제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 IMF구제금융으로 타격을 입어 홈리스가 된 부모로 인해 홈리스 2세가 된 아동, 청소년도 있다.
개별 집단에 따라 겪는 문제도 다양하다. 외국인 홈리스는 홈리스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과 함께 외국인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편견을 감내해야 한다. 여성 홈리스는 성폭력, 성매매에 노출돼있다. 홈리스 하위집단은 개별 특수성을 지니며, 법률과 행정지원은 이를 반영해야한다. 하지만 현행법령에서는 홈리스 내부의 다양성에 대한 고려를 찾아볼 수 없다. 노숙인 등 복지법에는 여성, 외국인, 정신 질환을 지닌 이들을 위한 조항이 따로 없으며, 아동과 청소년은 아예 지원 대상에서 배제된 상황이다.
이동현 행정정책에도 하위집단에 대한 고려가 없다. 홈리스 내부의 소수자는 홈리스 복지정책에서 쉽게 배제된다. 일례로 서울시의 ‘주거지원사업’이 있다. 서울시에서 시행 중인 ‘주거지원사업’은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홈리스에게 주거비를 제공한다. 하지만 저가의 쪽방, 고시원에 이동이 어려운 신체장애인, 노인 등을 위한 무장애주택(barrier-free housing)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이동이 어려운 홈리스는 주거지원 정책에서 소외된다.
적절한 복지를 제공하려면 홈리스 실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할 텐데, 홈리스에 대한 실태조사나 파악이 정기적으로 실시되고 있는가?
이동현‘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은 5년에 한 번 홈리스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할 것을 복지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2011년 복지부가 전국 홈리스의 실태조사를 실시했으나 통계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그 이후로는 제대로 된 전국 실태조사가 실시되지 않았다. 시설에서 거주 중인 홈리스와 거리 노숙인 중 파악된 인원만 집계할 뿐이다. 따라서 홈리스 정책을수립해야 하는 정부가 홈리스 전반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고 있는 상황이
다.
노숙인 등 복지법은 노숙인 복지서비스로서 주거지원, 급식지원, 의료지원, 고용지원을 명시한다. 이만하면 충분한 지원을 보장한 것 아닌가?
이동현 복지서비스 제공에 대한 조항은 의무조항이 아닌 임의조항이다. 임의조항은 법적 구속력이 없기에, 이를 시행하지 않더라도 중앙정부는 아무런 압박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 중앙정부는 대부분의 구체적인 행정지원을 지자체에 위임하며 손을 놓고 있다. 그렇다보니 지방정부의 경제적 부담이 증가하게 된다.
비교적 재정자립도가 높은 서울시에서는 주거, 의료, 고용 분야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주거지원의 경우 필요로 하는 홈리스의 수에 비해 예산의 규모가 작고 행정직원도 부족한 상황이다. 고용지원도 서울시에서 직접 담당하기보다는 민간 사기업에 맡기는 추세다. 그 외의 지방정부는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으며, 지방정부 또한 법률을 시행하지 않더라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게다가 더해 홈리스는 이동성이 높아서 복지정책이 잘 마련된 지역으로 몰린다. 이로 인해 지방정부는 노숙인 복지정책을 마련하는 데 서로 눈치를 보며, 결과적으로 홈리스 복지를 소홀히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노숙인 등 복지법의 임의조항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인가?
김도희 임의조항이 구속력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법률의 성격으로 인해 행정청의 재량이 넓게 인정된다. 당장 법률대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법원에서 위법으로 보지 않기에 실질적인 구속력은 약한 것이 맞다. 하지만 법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홈리스 운동에서 중요하다고 본다. 홈리스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합법적인 근거기 때문이다. 당사자와 시민 사회, 여론이 법에 근거해 목소리를 내고 정부를 압박하면, 시간은 오래 걸리더라도 조금씩 개선된다. 이런 맥락에서 노숙인 복지법은 임의조항이라도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김도희 변호사 ⓒ김대현 사진기자
의료 접근성은 ‘노숙인 의료급여’로 지원하고있지 않나?
이동현 현재 법률에 따르면 ‘노숙인 의료급여’의 수급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 노숙인 일시보호시설, 노숙인 자활시설 입소자, (나) 이들 중 거리나 시설, 쪽방 거주기간이 지속적으로 3개월 이상 유지된 자, (다) 질병, 부상, 출산 등에 대해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사람, (라) 건강보험 미 가입자 또는 6개월 이상 체납자라는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이 조건은 홈리스 복지정책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숙인 의료급여 지급 대상은 전체 홈리스가 아니라 시설에서 거주 중인 노숙인에 국한된다. 노숙인 등 복지법에 따라 노숙인으로 포함되는 쪽방 거주민과 길거리에서 살고 있는 홈리스는 노숙인 의료급여에서 배제된 것이다. 3개월 이상 거리에서 거주한 이들만이 정책 대상이 될 타당한 이유도 없다. 이처럼 기준이 엄격하고 자의적이다 보니 보건복지부가 입안 당시 예상한 3천 명의 수급권자에 비해 실 수급권자는 8백여 명에 머물고 있다.
노숙인 의료급여가 비급여 항목을 지원하지 않는 것도 홈리스의 의료 접근성을 저해한다. 사회경제적 빈곤 계층인 홈리스는 약간의 의료비 부담이라도 생기면 치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또 있다. 노숙인 의료급여는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병원에 내원해야만 수급 가능하다. 하지만 노숙인 진료시설은 일부 대도시에 편중돼있어서 그 외의 지역에서 거주하는 의료급여 수급권자는 지원을 받기가 어렵다. 즉 홈리스를 위한 의료지원은 노숙인 의료급여의 형태로 존재하나 실효성은 매우 낮은 복지정책인 것이다.
조금 다른 질문이다. ‘홈리스는 게으르고 무능하다’는 인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동현 홈리스가 공공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노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와 같은 편견은 보이는 것만으로 섣부르게 판단한 결과다. 홈리스 밀집지역을 떠나 노동하는 홈리스는 우리의 눈에 포착되지 않으며, 근무 장소에서도 이들은 노숙인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하지만 쉴 공간이 없어 공공장소로 돌아온 홈리스는 다시 ‘노숙인’으로 범주화된다. 공공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에서 이들이 노동자라는 사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왜 노동하지 않느냐”며 무직 상태인 홈리스를 힐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홈리스는 정기적인 노동을 행할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다. 홈리스에게는 휴식을 취하고 노동력을 보충할 안정적인 공간이 없기에, 지속적으로 근무하기 어렵다. 또한 홈리스를 향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고 자활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거리의 생활이 신체와 정신건강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이에 더해저숙련 노동자의 일자리가 감소하면서, 대부분 생산직에 종사했던 홈리스가 직장을 구할 확률은 더 낮아졌다. 이처럼 노동시장의 구조적인 변화와 개인적인 배경이 상호작용한 결과 홈리스가 초기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와 같은 배경을 간과한 채 홈리스 개인을 비난하는 것은 낙인찍기 에 불과할 뿐, 이들이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홈리스 복지정책이 지향해야 하는 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이동현 현재 홈리스 정책은 ‘회전문 현상’을 야기하고 있다. 홈리스가 여러 시설을 전전하고 있을 뿐, 복지정책이 이들의 진정한 탈노숙을 지원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기적으로 홈리스 복지정책은 홈리스의 상태를 종결하는 데 목적을 둔 정책이어야 한다.
김도희 홈리스 복지정책은 한 사회가 보장하는 최저 생계권의 보루가 돼야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경쟁에서 도태돼 사회경제적 빈곤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체제를 옹호하고 고수하는 한, 사회는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이들을 당해야 할 의무가 있다. 주거, 고용, 의료서비스 등에서 배제된 이들은 모두 홈리스이며, 홈리스 복지정책은 모든 이들의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확대돼야 한다. SJ
* 마지막 질문에 대한 김도희 변호사의 답변 중 “사회는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이들을 당해야 할 의무가 있다”를 “사회는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이들을 감당해야 할 의무가 있다”로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