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77일의 옥쇄파업, 86일의 굴뚝농성, 45일의 단식, 2626일의 투쟁

 <서울대저널> 쌍용자동차 정리해고투쟁 3대 연재 시리즈 1부  [2016년 3월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7년간의 투쟁 – “어느덧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2부 [2016년 4/5월호] 정면으로 충돌한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판결3부 [2016년 6월호)] 쌍용자동차 사건을 통해 살펴본 정리제고 제도의 개선방향

쌍용자동차 정리해고투쟁, 7개의 순간들

20091, 중국 상하이기차, 경영권 포기. 법정관리 신청

쌍용차 이사회는 긴박한 자금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주주인 상하이기차 본사에서 경영 정상화 방안을 논의했지만 결국 쌍용차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으로 경영권을 포기했다. 상하이기차는 법정관리 신청을 통해 노조와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분담시켰다.

 

타임라인 1.jpg

20095, 2646명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노조 무기한 총파업

2009년 4월 8일 일자리 나누기, 고용안정기금 출자 등 노조가 내놓은 해법 ‘쌍용차 회생안’ 에도 불구하고 쌍용차 사측은 2646명의 정리해고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5월 9일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이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을 점거했다.

 

타임라인 2.jpg

200986, 77일간의 평택공장 옥쇄 파업 해제

이 기간 동안 100명의 특공대, 1,000여명의 경찰과 사측에서 수백 명의 용역깡패들이 투입됐으며, 2042리터의 최루액, 5만V 테이저건, 단수, 소화전 차단, 의료진 차단 등 수단을 가리지 않는 강경한 진압이 이뤄졌다. 한편, 쌍용차 노사는 최후 협의를 통해 ‘무급휴직 48%, 희망퇴직 52%’에 합의했다.

타임라인 3.jpg

20129·12, 박근혜·문재인 대선 후보 국정조사 약속

9월과 12월, 각각 문재인·박근혜 대선 후보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정조사를 약속했다. 그러나 대선 이후 두 차례의 국정감사와 한 차례의 청문회만 있었을 뿐, 국정조사는 결국 무산됐다.

 

타임라인 4.png

20131, 무급휴직자 459명 복직 합의

1월10일 노사는 무급휴직자 459명 3월 1일자로 ‘전원복직’하는데 합의했다. 이는 171일간의 송전탑 고공농성 투쟁, ‘쌍차 대한문’ 분향소 투쟁 등 꾸준한 연대와 투쟁을 통해 얻어낸 성과다.

타임라인 5.jpg

201411, 복직의 꿈, 대법원에서 무너지다

2010년 11월 11일 최종적으로 정리해고된 165명 중 153명이 정리해고 무효확인소송을 제기했다. 4년의 시간이 지나 2014년 11월 13일, 대법원은 원고가 승소했던 고등법원 판결을 파기하고 “정리해고는 유효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제금융위기와 경기불황 등으로 계속적이고 구조적인 위기가 있었다. 해고를 단행할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존재했다”고 밝혔다.

타임라인 6.png

201512, 쌍용차 노··(기업노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쌍용차) 3자 간 최종합의문 타결

▲해고자 복직 ▲쌍용차지부를 상대로 제기된 손해배상 가압류 철회 ▲쌍용차 정상화 ▲28명 희생자에 대한 지원 대책 마련을 골자로 하는 노·노·사 3자 간 합의안이 11개월 간의 조율을 거쳐 최종 타결됐다. 

타임라인 7.jpg

  “하루하루 쌓은 것도 아닌데 어느덧 7년이란 시간이 지났습니다.” 77일의 옥쇄파업, 86일의 굴뚝농성, 45일의 단식.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이 지난 투쟁의 시간 동안 힘겹게 버텨온 기억들이다. 7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 그는 42명의 동료들을 구치장으로 보내야했고, 28명의 동료들이 복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정리해고는 최후의 구조조정 수단으로서 이뤄지는 ‘마지막 해고’다. 정리해고는 사용자의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이기에 최후 수단으로 시행돼야 하고, 불가피한 경우에도 사용자가 사전에 해고근로자를 위한 직업훈련, 직업알선 등의 사회적 지원계획을 수립하여 전직이나 재정착을 도와야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쌍용자동차 사태 이전에는 기업이 정리해고를 단행한다 하더라도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며, 설령 이뤄지더라도 소규모 형태로 여러 차례 나뉘어 이뤄졌다. 그렇기 때문에 2009년 4월 8일, 쌍용자동차가 노조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내놓은 2646명 정리해고안은 큰 파장을 야기했다. 2646명은 정규직 인원 7,130명 중 무려 37%에 해당하는 숫자였으며,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가 3,000명을 넘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정리해고였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한 순간의 통보로 사회·경제적 추락을 경험해야했고, 이후 그들을 따라다닌 것은 ‘쟤네 파업하는 애들 아냐?’라는 힘겨운 낙인이었다.

  다행히 2015년 12월, 쌍용차 노·노·사(기업노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쌍용차) 3자 간 합의안이 최종 타결되며 그간의 투쟁은 긍정적인 국면을 맞이했다. 이 합의안에 따라 2016년 1월 쌍용차는 40명을 신규 채용했으며, 이 가운데 18명이 해고자에서 충원됐다. 그럼에도 아직 복직하지 못한 166명의 해고자들이 남아있다. 7년이라는 투쟁의 역사, 아울러 그 시간 속에서 힘겹게 싸우고 연대했던 사람들의 기억이 사회적으로 공유될 때 쌍용차 문제는 온전히 해결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를 정확히 기억해야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전가된 상하이기차의 부실경영 책임

  쌍용자동차는 1997년 외환위기로 부도를 맞아 대우자동차에 매각됐다. 그러나 1999년 대우그룹도 외환위기의 여파로 붕괴되면서 쌍용자동차는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운영하는 워크아웃 약정(MOU)을 체결했다. 이후 쌍용자동차가 탄탄한 기술과 꾸준한 신종 차량 개발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흑자를 냈고, 정부는 회사를 시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쌍용자동차 매각을 위한 공개 입찰경쟁을 공고했다. 이에 따라 2004년 10월 노조, 회사, 채권단의 3자 합의를 통해 지분의 48.0%가 상하이기차로 넘어가며 쌍용자동차는 상하이기차에 인수됐다.

본지는 2013년 12월호에서 상하이기차의 기술유출 의혹과 법정관리 신청을 보도한 바 있다. 상하이기차는 쌍용자동차를 인수하고 난 후 곧바로 ▲생산규모와 설비 확장을 위한 4천억 원 자금 투자 ▲평택 공장에 30만 대의 생산 설비를 증축 등을 골자로 하는 ‘특별노사합의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상하이기차는 합의서를 이행하는 대신 자국에서 독자브랜드를 출시하고 두 브랜드 사이에 전산망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쌍용자동차 기술연구소 소속 임원들이 대거 상하이차 본점으로 파견됐고, 2006년도에는 400여 명을 희망퇴직으로 내보내는 구조조정이 시행됐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이갑호 창원지회장은 “당시 상하이기차의 기술 유출 의혹과 부실 경영에 분노하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1년만 신차가 나오지 않아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는 자동차 업계에서 상하이기차는 인수 이후 단 한 번의 신모델을 출시하는데 그쳤고, 급기야 2008년 12월에는 정부로부터 유일한 신차인 C-200 관련 기술과 체어맨, 씨백, 카이런 등의 기술 유출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상하이기차 측은 오히려 12월 17일 전면휴업을 선언했고, 2009년 1월 9일 재정 위기로 더 이상 쌍용자동차를 경영할 수 없다며 정부에 법정 관리 신청을 했다.

  이에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2009년 4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상하이차 지분 51.33% 소각 ▲5+5근무 및 3조2교대 포함 일자리 나누기(잡 쉐어링)로 총고용유지 ▲비정규직 해고를 막기 위한 고용안정기금을 노조에서 12억 출연 ▲산업은행 우선회생 긴급자금투입요구를 통해 코란도 C 출시 등을 골자로 하는 ‘쌍용차 회생안’을 제시했다. 이갑호 지회장에 의하면 “경영 정상화될 때까지 기꺼이 노동자들 살 깎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고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리는 정리해고 대신 다 함께 안고 가자는 총고용보장”의 요구였다. 그러나 사측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일방적인 정리해고 통보였다. 김득중 지부장은 이를 “투기자본의 탐욕으로 인한 기업의 부실경영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파렴치한 행위”로 표현했다. 상하이기차는정부, 노동조합, 그리고 언론과의 관계에서 수세에 몰렸을 때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정리해고를 단행하는 것으로 상황을 타개했다.

본문 1.jpg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이갑호 창원지회장. 마지막까지 남은 정리해고자 중 한 명이며 이번 노·노·사 3자 간 합의안 타결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힘겹게 버텨온 투쟁의 시간

  2009년 5월 9일,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은 대규모 정리해고에 반발하며 평택공장을 점거, 옥쇄시위를 벌였다. 회사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상하이기차는 지속적으로 문자·우편을 통해 정리해고자 명단을 발송하며 희망퇴직 신청을 종용했다. 이에 따라 6월까지 2646명의 정리해고자 중 1666명은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아울러 사측은 정리해고 되지 않은 150여 명의 노동자를 모은 뒤, 정리해고를 찬성하고 노동조합의 공장 점거를 규탄하는 맞불 시위를 전개했다.김득중 지부장은 당시를 “한 공장에서 일하던 공동체가 자본에 의해 찢어지는 뼈저리는 아픔”으로 회상했다. 사측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 또한 전기, 수도, 가스를 차례로 끊어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을 압박했다. 8월 6일 경찰은 100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공장을 급습했고, 테이저건이나 가스 분사 겸용 곤봉 등을 사용해 시위를 완전히 진압했다.

  당시 쌍용차지부 지도부는 노사 최후 협의를 통해 최후 ‘무급휴직 48%, 희망퇴직 52%’에 합의했다. 만족할 수 없는 협의였지만, 김득중 지부장은 “벼랑 끝에서 조합원들의 불안과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협의”라고 설명했다. 남아있던 정리해고자 980명 중 459명은 무급휴직으로, 353명은 희망퇴직으로 전환됐고,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이들 중 165명은 정리해고, 14명은 징계해고 처리됐으며, 그 중 경찰이 파업 주동자로 분류한 16명은 기소됐다.

  이후 정부는 쌍용자동차를 매각하는 회생계획안을 법원에 제출했다. 남은 노동조합이 이에 반대했으나 법원은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선관위의 효력정지를 선언했다. 2010년 11월 23일 ‘마힌드라&마힌드라’와 M&A 본 계약이 체결되며 쌍용자동차는 마힌드라 그룹에 속하게 됐다. 해고 노동자들은 국정조사 요구 기자회견을 열고, 중국 대사관 앞에서 상하이기차의 행동에 항의하는 등 투쟁을 전개했지만, 정부는 노동조합의 복직과 진실 규명 요구에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단 한 번 정치적 관심을 받았던 때는 2012년 대선 때였다. 2012년 9월과 12월, 각각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와 새누리당 김무성 선거관리본부장이 국정조사를 약속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관심은 대선과 2013년 1월, 사측의 무급휴직자 복직 결정 이후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및 경찰의 강경진압과 관련해 두 차례의 국정감사와 한 차례의 청문회만 있었을 뿐, 국정조사는 결국 무산됐다.

  김득중 지부장은 투쟁과 국정조사를 통해 바랐던 단 한 가지는 결국 ‘대화’였다고 말한다. 작년에 최초로 교섭이 열리기 전까지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165명의 정리해고자들은 사측에게 “단지 희망퇴직을 거부한 볼썽사나운 사람들”이었고 “있어도 없는 유령 취급”을 받았다.이 모든 대화와 교섭의 요구가 좌절되는 와중에 법원의 총 47억 손해 배상 판결과 대법원의 정리해고 유효확인 판결, 아울러 투쟁 도중에 자살 혹은 질병으로 운명을 달리하는 동료들, 부양해야할 가족에 대한 미안함은 그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이갑호 지회장은 “동료들이 가장 힘들어한 것은 가족과 공동체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며 본인 또한 “거리에서 굴뚝에서 싸운다고 챙겨주지 못한 아이들에게 가장 미안하다”고 말했다.

숫자로 보는.png

 

본문 2.jpg
▲ 

노·노·사 3자 간 합의안 타결을 위해 쌍용자동차 김득중 지부장은 작년 9월, 45일 간의 단식 투쟁을 단행했다. ⓒ 미디어투데이

  7년 만에 노··사 합의로 해고자 복직문 열어

  쌍용자동차 노사 분규는 작년 12월 30일, 노·노·사(쌍용자동차 기업노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쌍용차) 3자 간 합의안 타결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1개월간의 협의를 거쳐 ▲해고자 복직 ▲쌍용차지부를 상대로 제기된 손해배상 가압류 철회 ▲쌍용차 정상화 ▲28명 희생자에 대한 지원 대책 마련 등을 골자로 하는 노·노·사 3자 간 합의안이 최종 타결됐다. 작년 1월 13일, 신차 티볼리 출시행사장에서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과 김득중 지부장 사이의 대화가 성립됐고, 마힌드라 회장이 “티볼리를 통해 쌍용차가 흑자 전환에 성공하면, 2009년에 일자리를 잃은 분을 우선적으로 충원하겠다”고 밝히며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1월 29일 첫 실무교섭을 시작하여 이후 30차례의 실무교섭, 10차례의 대표교섭이 진행됐고 마침내 ‘단계적 복직’을 핵심으로 하는 노·노·사 합의안이 타결됐다. 합의문에는 향후 신규 채용에 있어 ‘정리해고자 30%, 희망퇴직자 30%, 신규채용 40%’의 비율로 충원하며 나아가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179명가량을 단계적으로 복직시키는데 노력한다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아울러 사측 3명, 기업노조 2명, 쌍용차지부 2명으로 구성된 복직점검위원회를 꾸려 이행상황을 점검하고, 손해배상 가압류 문제는 복직 채용자가 회사를 상대로 진행 중인 법적 소송을 취하할 경우 회사도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즉시 취하하기로 합의했다. 사망자의 유족 지원을 위해 15억이 충원된 희망기금이 구성됐으며, 특히 해고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6명을 올해 1월말까지 우선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복직시키기로 합의해 실제 이행됐다.

  노·노·사 3자 간 합의안이 타결되기까지 쌍용차지부장으로서 노사 협상을 이끌었던 김득중 지부장의 노력이 컸다. 김 지부장은 “일괄 복직이 아닌 단계적 복직임에도 조합원들이 회사와 지도부를 믿어준 것이기에 보다 나은 합의안을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말했다. 2017년 상반기라는 구체적인 복직 기간을 명시하고 사측의 손해배상청구소송 철회, 비정규직 노동자 우선 채용 등을 합의안에 포함하기까지 김 지부장의 투철한 고민과 투쟁이 있었다. 김 지부장은 “비정규직 우선 채용은 6명, 손배 철회는 14명이라는 소수 조합원에만 해당되는 요구사항임에도 우리 모두의 의제로 공감해준 조합원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지난 2월 1일, 정규직 해고자 12명과 비정규직 해고자 6명이 7년 만에 쌍용자동차 작업복을 입으며 마침내 해고자 복직의 문이 열렸다. 김 지부장과 이갑호 지회장은 “쌍용자동차가 지금까지 투쟁을 이어오기까지 수많은 시민 및 시민단체, 노동조합, 소셜테이너 등의 역할이 컸다”며 “모두가 공장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우리와 함께해달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본문 3.jpg
▲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18명이 1차로 2월 1일자 복직했다. 1일 유제선씨가 사내연수를 받기 위해 경기 안성 서운면 쌍용자동차 인재개발원으로 들어가며, 남은 동료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한겨레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적당히 일할 권리, 알고 계신가요?

Next Post

서울대 세월호 학생연대, 4·16 추모주간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