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뉴스
5·18 민주화 운동 8주기를 앞둔 1988년 5월 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5·18 추모 마라톤 행사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행사의 열기가 한창 달아오를 때쯤, 갑작스레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한 청년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렸다. “양심수 가둬 놓고 민주화가 웬 말이냐!” “(북한과) 공동 올림픽 개최해 평화 통일 앞당기자!”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제 몰아내고 광주학살 진상을 밝혀라!” 그 후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청년은 소지하던 칼로 할복한 뒤 투신했다.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현실 속에서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고뇌하던 조성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종교와 세상에 눈뜬 요셉 조성만
조성만은 1964년 12월 13일 전라북도 김제에서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매우 총명한 아이였다.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었던 한글과 구구단을 스스로 익혔으며 어머니와 시장에 갈 때면 동네 간판을 줄줄 욀 정도였다. 유년 시절 홍역에 걸렸을 때도 울지 않았던, 매우 과묵하고 진중한 인물이었다.
이후 조성만은 전주서중학교를 거쳐 해성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천주교 재단의 학교인 해성고에서 그는 매주 미사를 드리면서 천주교에 귀의했다. 영세를 받으면서 그는 신에게 평생을 바칠 것을 약속하고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다짐에 따라 조성만은 가톨릭대학교에 진학하고자 했으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재수 끝에 1984년 서울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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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어서도 조성만의 신앙 생활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청년단체연합회 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에 가입했다. 평소 농촌 문화와 민속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풍물과 민요 공연을 담당했던 가톨릭민속연구회 활동에 점차 빠져들어 매일 학교와 성당을 오갔다.
조성만이 대학생이 된 1984년은 전두환 정권이 학원 자율화 조치, 국민화합조치 등 여러 자율화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그동안 침체돼있던 학생 민주화 운동의 물꼬가 트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당시 가톨릭 청년들은 여러 단체를 조직함으로써 사회 운동을 주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고, 명동성당은 그들의 중심 근거지였다.
명동성당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조성만은 자연스럽게 당시 암울했던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 그는 금서를 읽고 토론을 하며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던 자연대 언더서클에 가입해 활동했다. 여기서 그는 훗날 그의 거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김세진 열사를 만나게 된다. 그러다가 현실에 대한 고뇌는 잠시 뒤로한 채 1985년 2월 군에 입대했다.
‘구로구청의 악몽’과 통일에 대한 관심
그가 전역한 이후인 1987년 12월 조성만은 구로구청 항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6월민주항쟁을 거쳐 대통령 직선제를 일궈냈다. 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조성만은 공정선거감시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거 당일이던 12월 16일 구로구청에서 백지 투표용지가 다량 들어있는 투표함이 발견됐고, 이내 학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구로구청으로 모였다.
조성만의 발걸음 역시 구로구청으로 향했다. 이들은 밤새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투표함을 수호했고, 4000여 명의 전경은 즉시 구청을 포위해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조성만은 국가의 권력에 처참히 폭행당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해야 했다. 민주화를 부르짖는 불씨는 군화에 짓밟혀 너무나도 쉽게 꺼져갔다. 사건 직후 구로경찰서에 연행된 그는 열흘간 구류됐다. 조성만의 부모가 그가 학생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때였다.
같이 경찰서에 끌려간 친구에게 조성만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 “우리 지식인들은 너무 머리로만 살려고 하는 것 같아. 온몸으로 살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 그는 근대화의 이면에 숨은 어두운 시대적 상황에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이후 조성만은 고향에 내려갔다.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자신이 찍힌 사진들을 모아 태웠다. 더욱 부끄럼 없이 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과, 저항하는 삶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다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1987년의 학생 운동은 점차 통일 방향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였다. 이듬해인 1988년에는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후보였던 김정기 씨(철학과 85·졸업)의 제안으로 남북학생판문점회담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통일에 뜻이 없는 남북 기득권 세력을 배제하고,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대학생들끼리 모여 통일을 논의하자는 취지였다. 비록 정부의 방해로 인해 이 회담은 무산됐지만 이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전국 대학의 학생 운동이 통일 노선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즈음 조성만 열사 역시 통일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자연대 언더서클에서 만난 김세진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고민은 심화됐다. 이 시기 동안 영원한 우방이라고만 생각됐던 미국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광주항쟁 당시 정부의 진압 작전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고, 나아가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것이 입장의 요지였다. 김 열사는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반미운동을 하던 중 1986년 4월 신림사거리 부근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김 열사의 생을 옆에서 지켜본 조성만은 남북통일과 한반도 평화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미군 부대에서 군 시절을 보낸 조성만은 더욱 크게 괴로워했다. 이러한 그의 고뇌는 그가 생전에 쓴 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부활하는 韓半島
붉은 이 산천이 부른다
마지 못해 살아가는 노동의 현장
벼가 잘 익어도 잡초만 돋고 돋는 한반도의 피눈물
논두렁으로 살라고
아-
붉은 이 산천이 부른다
묶인 사슬 끊자고 너를 부르네
내 몸 내 혼을 부르네 꿈틀거리며 살아가는
아 부활하는 내 韓半島여
나아가 조성만은 통일 문제를 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봤다.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처럼 현재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에 예수가 살아있었다면 예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해 조성만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통일을 이룩해야 할지 끊임없이 되물었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단은 숭고한 자기희생이었다. 마치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을 박은 예수처럼, 자신의 한 몸을 바쳐 통일을 촉구하려는 결심이었다.
몸을 내던지다
5월 15일 명동성당에서는 청년단체연합회에서 주최한 청년들의 행사가 진행됐다. 그날 오후에는 개막식의 형태로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광주민주항쟁 계승 마구달리기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조성만은 행사 이전에 가톨릭민속연구회의 일원으로 길놀이 공연을 마쳤다. 그후 참가자들이 몸을 풀고 있을 때쯤 그는 곧장 명동성당 옥상으로 달려가 준비해둔 유서 복사본을 뿌렸다. 순간 상황이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한 최효성 청년단체연합회 회장이 옥상으로 달려갔지만, 그가 손을 뻗었을 때 조성만은 이미 옥상에 없었다. 이원영 조성만열사추모협회 회장(수학과 83.졸업)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 길놀이할 때 입던 옷을 입은 채 옥상에 올라가 구호를 외친 성만이의 모습이 섬뜩했다”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 (중략) 도대체 누가 반민족적이고 도대체 누가 애국하는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현실. 우리는 우선 아무 거리낌 없이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합니다. 그랬을 때만이 진정한 통일은 이루어질 수 있으며 한 민족이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에서 평화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의 유서 중)

ⓒ최순호 씨.
행사는 즉시 취소됐고 조성만은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무겁게 감긴 그의 두 눈을 뜨게 하지는 못했다. 학생들은 군경이 그의 시신을 탈취할 것을 대비해 병원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에 돌입했다. 이후 옛 경희궁터에서 5일장으로 그의 장례가 치러졌다. 열사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장례식에는 당시 민주화를 상징하는 정치인이었던 故 김영삼 전 대통령과 故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참석했다. 이후 그의 시신은 광주 망월동으로 운구됐다. 그의 운구차가 도착할 때 전남도청에 모인 시민들의 수는 어림잡아 30만이었다. 하지만 조성만이 생전 활동했던 명동성당에서는 그의 장례미사를 공식적으로 허가하지 않았다. 그가 자살한 것이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이원영 씨는 조성만이 “예수 대신 한반도의 십자가를 자신이 대신 짊어지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이 씨는 열사가 아닌 순교자 요셉 형제로서 조성만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교황은 한반도 통일에 대한 간절한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달했다. 남북관계는 여전히 악화되고 있으며 통일의 꿈은 점점 헛된 공상으로 사라지고 있지만, 조성만이 기꺼이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면서까지 남긴 평화의 뜻과 불굴의 정신은 아직까지 한반도에 살아 숨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