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의 공동체적 해결 가능성을 묻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김보화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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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김보화 책임연구원

ⓒ 김서영 사진기자

  성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 사회에는 더 강한 법적 처벌에 대한 요구가 있어왔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 처벌법)’,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 성 보호법)’ 등 새로운 법률들이 제정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하지만 법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2월 29일 ‘피해자 중심주의’의 대안을 찾는 학내모임 ‘담쟁이’에서는 성폭력 사건의 공동체적 해결을 이야기하는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서울대저널>은 성폭력 문제의 공동체적 해결은 어떻게 법적 해결을 보완할 수 있는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김보화 연구원에게 물었다.

법에서 정의하는 성희롱, 성폭력의 범주는 어떻게 되나?

  성폭력은 상대방의 의사에 침해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 언동을 포함한다. 강간, 추행, 통신매체 및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 등의 성폭력 범죄들은 ‘형법’과 ‘성폭력 처벌법’, ‘청소년 성 보호법’ 등에 의해 처벌받는다. 성희롱은 성폭력의 하위범주로 직장 내 상급자가 업무와 관련해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용 상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성희롱은 형사법의 처벌 대상이 아니라 ‘양성평등기본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남녀고용평등과 일, 가정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해 처리된다. 성희롱을 포함한 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물리적 피해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도 가능하다.

여성주의 운동가들이 정의하고 있는 성폭력의 범주는 법적 개념과 다른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정의하고 있는 성폭력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성적 언동이다. 여성운동 단체, 반(反)성폭력 운동가들이 쓰는 성폭력은 포괄적인 범위다. 언어적 성희롱이라고 해서 결코 피해가 적은 것이 아니고 강간이라고 해서 피해자들이 다 큰 고통을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나 사건 맥락에 따라 피해 경중이 달라지기 때문에 성폭력을 넓게 정의하고 있다.

법적 해결만으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나?

  법적 해결과정 속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의 폭행 및 협박을 스스로 증명해야하고, 법이 다루는 범죄의 범위 역시 제한적이다. 강간죄가 그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강간죄는 상대방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항거할 수 없을 정도의 위협과 협박이 있을 경우에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85% 이상의 성폭력은 지인 혹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가해자에 의한 폭행이나 협박을 피해자가 입증하기 어렵고, 강간죄가 성립하기 쉽지 않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운 사회문화적 이유에서 성폭력이 발생하는 경우는 강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연인 관계에서 데이트 도중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관계가 끊어질 것을 걱정해 원치않는 키스와 같은 스킨십에 저항하지 못하거나, 노래방 도우미 여성들이 사회적 편견으로 법정에서 위협과 협박을 입증하기 힘든 경우가 그 사례다.

성폭력의 공동체적 해결이란 어떤 것인가?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공동체안의 규칙을 통해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90년대 후반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소속 동아리, 학과, 단과대학, 대학에 반성폭력자치규약을 서로 약속하자는 운동으로 시작됐다. 이외에도 일부 사회운동단체, NGO 등에서도 공동체적 해결을 채택하고 있다. 이때 운동을 시작한 주체들은 성폭력이 우연히 일어난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피해자의 삶, 특히 여성의 삶에 연속적이고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인식했다. 성폭력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경각심을 가지고 성폭력에 대해서 조심하고 반성하는 게 중요하다는 문제의식이 형성됐다. 이에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공동체의 약속에 따라서 공개 사과,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반성폭력 교육 수강, 가해자 교육 등의 방식을 실천해왔다.

공동체적 해결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공동체적 해결은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돕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성폭력 문제 해결이 가해자를 괴물로 낙인찍고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가해자가 충분히 사과하고 반성한 후 가해자와 피해자가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법은 가해자에게 벌금이나 징역을 선고하지만 사과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공동체에서 사건에 대해 토론하고 성찰하는 과정이 작은 단위에서부터 이뤄지면 그 의식들이 사회 전체적으로 커지는 효과도 있다. 그런 공동체를 경험했던 사람은 직장이나 다른 조직에서도 문제제기를 할 수 있고, 가해자로 지목되더라도 반성하고 사과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공동체적 해결의 현주소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많은 반성폭력 운동가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공동체 안에서 반성폭력 운동가 혹은 여성주의자들이 활동하기에 힘들었다. 오히려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는 일들이 많았고, 많은 운동가들이 공동체를 떠나 대학원, 상담소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초반을 넘어가며 대학 내의 자발적인 운동이 과거보다는 주춤했던 시기가 있었다. 최근 여성주의 운동이 활기를 찾고 조금씩 반성폭력 운동주체들이 나타나는 모습이 보인다. 공동체에서의 움직임, 여성주의, 반성폭력 등에 대한 이슈가 강해지고 있다. 일베, 메갈리아, 페미니스트 선언 등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2000년 후반부터는 지나치게 가해자를 괴물로 묘사하는 경향도 보인다. 아동 성폭력이 이슈가 되면서 성폭력 가해자가 사이코패스, 정신 이상자 등으로 서술되고 있다. 여기에 따라 가해자들의 대항 담론도 강해졌다. 두려움을 느낀 가해자들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사건 자체를 인정할 수 없게 되고 피해자를 탓하고 공격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역사적 과정에서 운동 주체들이 사라지고 성폭력의 공동체적 해결이 하나의 도식적인 기술로만 남은 부분도 문제다. 그 결과로 깊은 고민이나 토론 없이 가해자를 낙인찍고 강한 징계를 결정해 가해자를 쫓아버리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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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과학대학 학생회 ‘반성폭력 학생회칙’

ⓒ 김서영 사진기자

성폭력을 공동체 안에서 해결하기 위한 조건에는 무엇이 있나? 공동체는 어떤 성폭력을 어떤 경우에 다룰 수 있나?

  피해자들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신뢰할만한 공동체인지는 그 공동체에 소속돼 있는 사람들이라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내규나 규정이 명확하고 잘 설계돼 있어도 그 공동체의 리더, 집행국 등이 어떤 인식을 가졌는가에 따라 처리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성희롱은 공동체가 다룰 수 있고, 강간 사건은 공동체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이분법도 성립하지 않는다. 소속 공동체가 강간에 대해서 문제 제기하고 같이 고민할 수 있을만한 공동체라면 고소보다 공동체내의 해결이 나을 수도 있다. 법을 통한 해결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싸우게 되고, 이는 피해자에게도 힘든 과정이다. 명예 훼손, 모욕죄, 역고소 등 가해자가 피해자를 공격하는 상황도 많이 있다. 공동체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건이 아니라 피해자가 해당 공동체를 신뢰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공동체적 해결을 위한 원칙으로 ‘피해자 중심주의’가 이용돼 왔다. 이 개념의 의미는 무엇이고 무슨 역할을 해왔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인식론적인 문제다. ‘누가 더 객관적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약자의 시선이 강자의 시선에 비해 덜 왜곡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답하는 방식이다. 성폭력 사건 해결에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등장하는 것도 이 맥락의 연장선이다. 많은 경우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와 가해자가 기억하는 내용이 다르다. 이 때 피해자가 더 정확하게 기억할 가능성이 크다. 강자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약자들이 더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예쁘고 친하니 술을 따르라고 말할 뿐인 남성과 어딜 가도 술을 따라줘야 하는 여성의 기억을 비교할 때 여성들이 해당 상황을 더 잘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약속이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도 있어왔다. 이에 대해 설명해 달라.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의견이 모두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일부 공동체에서 그런 방식으로 오해됐기 때문에 ‘피해자 중심주의’가 왜곡된 측면이 있다. 피해자 입장을 존중하는 것과 피해자 입장이 반드시 옳다고 여기는 것은 다르다. 피해자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많다. 공동체의 신뢰를 받는 관리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되, 현실적인 제약을 설명하고 피해자를 설득해야 한다. 다만 공동체는 피해자를 존중하며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몰아세우지 않아야한다. 법에서는 항상 거짓말 여부를 피해자에게 추궁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작은 공동체에서는 우선 피해자를 신뢰하고 설득하자는 것이다.

  반(反)성폭력 운동주체들이 재생산되기 어려웠던 상황이 이런 왜곡의 원인 중 하나다. 일부 공동체에는 운동주체들 없이 “피해자 말이 옳고 피해자 말대로 해야 한다”는 도식과 말만 남게 됐다. 운동가들이 부족해지고 언어만 남자, 공동체의 관리자들이 토론과 설득 대신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에 대한 과도한 징계를 선택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렇다면 ‘피해자 중심주의’를 폐기하고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중심주의’는 여전히 성폭력의 공동체적 해결 과정에서 지향해야할 가치이자 철학이다. 일부 왜곡 때문에 ‘피해자 중심주의’를 폐기할 수는 없다. 아직 (한국 사회) 대부분의 공간에서 가해자 중심으로 성폭력이 처리되고 있고, 사건을 판단하는 대다수 공동체 구성원들의 성 인지 감수성을 신뢰하기 어렵다. 비록 사건처리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 개념을 왜곡해 적용한 경우도 있었지만, 사건 처리자 또는 공동체가 피해자와 신뢰관계를 쌓으며 해결과정에 대해 논의한다면 그와 같은 왜곡도 줄어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폭력 피해자가 사건에 대응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조언해 달라.

  긴급 상황일 경우 전국에 있는 ‘원스탑 지원센터’에서 육체적 치료와 검사, 증거물 채취 등을 진행하고 상시 대기하고 있는 경찰을 통해 고소할 수 있으며 심리 상담까지 한 번에 받을 수 있다. 강제추행, 강간, 통신매체 및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에 해당할 경우에는 가까운 경찰서에 가서 고소장을 접수하고 고소를 진행하면 된다. 민사상으로는 정신적, 육체적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 신뢰 있는 변호사에게 의뢰하거나 전국 각지에 있는 성폭력상담소를 통해 무료 법률지원을 받을 수 있다.

  대학, 학생회, 시민사회 등 소속 공동체 안에서 문제해결을 시도할 수도 있다. 내규에 따라 대책위를 꾸려서 사건을 조사하거나 가해자에게 사과, 가해자 교육, 활동정지, 제명, 탈퇴 등을 요구할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초기 대응에는 전문가와 상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각 대학이나 직장에 있는 고충처리기관이나 성폭력상담센터, 인권센터 등이나 전국 130여개에 이르는 성폭력상담소에 전화해 상담을 받고 진행하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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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정역 인근에 위치한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가와 연구자들은 저녁까지 이곳을 지킨다.

ⓒ 김서영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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