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이는 사람이 되고싶다”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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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사진기자

*본 기사의 인터뷰는 20대 국회의원선거 이전인 3월 16일에 진행됐으며, 기사 작성은 은수미 의원의 당선 여부가 결정되기 이전에 완료됐습니다.

  지난 2월 23일 저녁 야당의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사당 발언대에 올랐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의 표결을 저지하고 수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야당의 국회의원들이 ‘합법적 의사방해행위(필리버스터)’를 시작한 것이다. 필리버스터는 192시간 동안 진행됐으며 총 38명의 야당 국회의원이 발언했다. 그 중 10시간이라는 기록을 세운 인물은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비례대표의원이었다. 그는 불평등, 불공정, 인권탄압 등 테러방지법을 비롯해 현 사회에 산적한 다양한 문제를 짚었고, 수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번 호 <서울대저널>은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만나 그의 삶과 그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들어봤다.

  

봉제공장과 구치소에서 국회까지, 파란만장한 청년시절

  은수미 의원의 20대는 최루탄의 연기와 죽어가는 선배, 동기들의 소식과 함께 시작했다. 1983년 11월 8일 대학생이었던 은 의원은 최루탄 연기로 자욱한 상황에서 도서관에서 추락한 황정하 열사를 보았다.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그였지만, 최루탄 연기는 너무 독했다. 선배, 황정하 열사의 곁을 지키지 못하고 달아났던 경험은 그에게 자괴감을 안겼다. 선배의 죽음을 목도한 그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은 의원은 정치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노동자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노동운동을 억압하던 분위기였기에 은 의원은 봉봉이라는 가명을 쓰고 구로공단의 봉제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다. 노동환경은 처참했다. 동료들은사소한 실수 때문에 구둣발에 짓밟혔다. 그는 미싱의 바늘이 손가락을 뚫어 옷감에 피가 묻을까 두려웠다.

  얼마 되지 않아 은 의원은 위장취업으로 기소됐다. 6개월의 구치소 생활이 뒤따랐다. 다행히 은수미 의원의 첫 옥살이는 집행유예로 끝났다. 그러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이 터지면서 은 의원은 다시 구속됐다. 강간하겠다는 협박과 고문이 지속됐다. 고문을 버틴 은 의원에게 법원은 6년형을 선고했다. 장기간의 교도소 생활은 그에게 폐렴, 폐결핵, 종양을 비롯해 밀실공포증과 고소공포증을 남겼다.

  1997년에 출소한 은수미 의원은 이후 연구에 매진했다. 건강이 악화돼 공부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사회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모두 마치는 데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후 그는 국무총리 산하의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은 의원은 끊임없이 노동현장을 돌아다녔다. 장기 파업의 현장뿐만 아니라 주변의 노동자들이 근무하는 곳 모두 그의 방문지였다. 은 의원은 “현장은 나의 힘”이라며 “현장에서 받은 경험과 고민이 결합돼야 살아있는 연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의원 배지를 던지고 싶었던 비례대표 의원

  은수미 의원은 19대 비례대표로 당선된 이후에도 노동문제 해결에 몰두했다. 을지로위원회 활동은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을지로위원회는 ‘갑의 횡포로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을(乙)들의 고통과 연대’하며 ‘을(乙) 살리기 입법과 예산을 추진’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조직이다. 은 의원은 을지로위원회에서 노동문제를 다루며 “현장에서 얼굴을 비추는 것보다는 그 문제를 입법의 테두리에서 해결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것을 느꼈다. 그는 개별 사건의 노사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면서 양측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은수미 의원은 번번이 자신의 무력함을 느꼈다.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지만 사회의 ‘갑-을’ 구조 개선이라는 큰 틀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국회와 정부가 보인 태만함과 무책임함은 그를 더욱 좌절시켰다. 2014년 7월 중순 은 의원은 참사 100일이 지나기 전에 세월호특별법을 제정하고 진상을 규명할 것을 촉구하며 유은혜, 남윤인순 의원과 함께 단식을 시작했다. 열흘이 넘도록 그는 단식을 강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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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1월 2일에 열린 최종범 열사 추모문화제에서 은수미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은수미 국회의원 페이스북

  하지만 동료 국회의원들의 태도는 싸늘하기만 했다.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일부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국민들로부터 시체팔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은수미 초선 비례가 우리 당의 선거를 망치려한다”고 외쳤다. 은 의원은 살벌한 분위기를 견디며 반론했지만 당의 중론은 바뀌지 않았다. 은 의원의 단식과 반론은 파급력이 없었고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 규명에 시간을 쏟는 동안 그가 전념했던 노동현장도 무너지고 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의원님만큼은 세월호에 투신하지 않으면 안 되겠냐”고 은 의원에게 호소했다. 은수미 의원처럼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국회의원이 적은 상황에서, 그의 부재로 노동현장이 더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은 의원은 “세월호도, 현장도 무너지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엄청난 권력을 지닌 국회의원임에도 논평자로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무력감을 느꼈다. “의원 배지를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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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8일 당시 을지로위원회 소속이었던 은수미 의원은 철도민영화 저지를 위해 동료 국회의원과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은수미 의원 페이스북

  비례대표의원이라는 지위 또한 그가 뜻을 펼치기에는 제한적이었다. 지역구의원 출신과 다르게 비례대표의원이었던 은 의원에게는 지역적 기반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지역구 의원들은 지지자와 지역 주민들로부터 현안에 대한 여론을 들을 수 있었지만, 은수미 의원에게는 국민과 소통할 기회가 없었다. 지역구 의원들은 은 의원에게 “너는 지역구 출신이 아니라서 모른다”고 말하며 그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정책에 대해 국민과 의논하고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점도 비례대표의원의 한계였다.

  은 의원은 “스스로 정책적으로 우수한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한다”며 “노동과 같은 관심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며 목숨을 걸고 실천할 의지도있다”고 밝힌다. 그러나 그는 “좋은 정책을 내놓는 것과 이것을 이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며 “국민들에게 실효성 있는 정책을 내놓기 위해서는 국민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과정이 수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국민들과 접촉할 수 없었던 비례대표의원에게 “좋은 정책”은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저까지 포함해서 현재 저를 지지하는 사람은 열 명”이라고 토로하는 은 의원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은 의원의 일침

  은수미 의원은 자신이 체감했던 무력감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에도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은 의원은 “당이 국민을 무시해도 상관이 없는 상황이 됐다”며 “당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어떠한 가치도 부여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국회의원들이 대중과 소통하기보다는 “3년 동안 계파전쟁에 몰두하고 선거 시기에만 국민들에게 표를 구걸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은 의원은 국회의원 사이에 소통이 없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필리버스터가 중단됐다는 사실도 기자를 통해서 들었다”며 “주요 안건에 대해 당은 국회의원과 논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이 제기하는 정부 심판론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은 의원은 “오랜 기간 집권한 여당이, 기회를 얻지 못한 야당에 비해 유능할 수밖에 없다”며 “야당이 유능함을 주장한다고 해도 국민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은수미 의원이 생각하는 야당의 역할은 무엇일까? “정당이 국민 속으로, 정당이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은 의원은 “여당인 새누리당이 국민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야당은 과감하게 기득권을 내려놓고 국민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그는 야당이 심판론을 내세우는 대신 진정성을 보여야 한고 주장한다. 은 의원은 “야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있는 이유는 야당의 진정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은 의원에게 야당의 역할이란 “국민의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를 느끼고,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진정성을 보이는 것”이다. “모든 것을 걸고 국민이 직면한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구 의원으로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다

  은수미 의원은 한때 무력감으로 “(정치를 계속할 것인지를 두고) 죽을 것 같이 고민”했지만 다시 정치의 길에 올랐다. 2015년 3월, 그는 19대 국회의 비례대표 의원직을 포기하고 경기도 성남 중원구 보궐선거를 위한 새정치민주연합의 후보자 선출대회에 입후보했다. “지역구 의원이 된다면 국민들을 직접 만날 수 있고, 국민의 마음을 얻는다면 그 이상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보궐선거 경선에서 패해 다시 비례대표의원으로 활동했으나, 20대 총선에서는 경선에서 승리해 성남 중원구의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왜 정치를 계속하려는 것일까? 은 의원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은 의원은 필리버스터 당시 국민들이 보인 호응에서 “차별,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한 분노와,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보았으며, “문제를 제기하는 국민들이 있는 한 이를 지나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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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새누리당의 테러방지법안의 직권상정에 반대하며 필리버스터에 임했다. ⓒ뉴스핌

  경기도 성남시 중원을 택한 연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에게 성남은 “아픔이 많은 도시”다. 수많은 이들이 강제로 이주돼 천막에서 시작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은 의원은 “도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들은 희생을 강요당했”으며 현재 다른 도시에 비해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주민들을 위한 여가시설은 물론 아이들을 위한 안전한 놀이터와 보행통로조차 없다. 이와 같은 “명백한 불평등”을 해결하고 “중원을 따뜻한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현 목표지만 그의 열정은 중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은 의원은 “중원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정치 물길을 바꾸겠다”며 “사람들의 사회적 자존감과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이 살아나도록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청년 시절부터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서 활동한 은수미 의원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해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전한다. “제가 여기에 서있는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쓰이기 위함입니다. 저를 어떻게 쓸지를 고민해주세요. 국회의원은 쓰이는 존재이며, 당신은 쓰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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