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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88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1986년. ‘평화·조화·전진’이라는 기조 아래 ‘한강의 기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우리는 하나’를 외쳤던 시기였다. 하지만 상계동의 주민들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니었다. 정부의 눈에 그들의 삶은 올림픽 개최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정부는 올림픽 개최국에 걸맞은 위상을 보이기 위해, 대대적인 도시 정비에 들어갔다. 재개발의 열기에 휩싸인 상계동의 월세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하루아침에 ‘우리’ 동네였던 상계동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에게 정부가 제공하는 보상과 대책은 올림픽 개최국에 전혀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온 나라가 축제분위기였던 그 때, 그들은 외로운 투쟁을 시작했다. 1986년 상계동 철거, 투쟁의 서막을 올리다 1980년대 상계동 일대는 빈민촌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값싸게 집을 얻을 수 있는 상계동에 거주하면서 터를 잡았다. 그래도 일터가 있었고 화목한 가정, 인정 많은 이웃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개최로 인해 상계동에도 재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상계동에 전철역이 들어서면서 투기열기가 더욱 과열됐다. 치솟은 집세를 감당할 수 없는 세입자와 빈민촌의 거주민들은 상계동을 떠날 것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떠나도 갈 곳은 없었다. 상계동 투쟁과정을 직접 경험했던 고은태 교수(중부대)는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를 멋지게 보여야 하니 철거민들이 사라져야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며 “올림픽을 위해 그분들의 삶을 부정했다”고 회고했다. 상계동 주민들의 투쟁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을 연출한 김동원 감독은 강제철거의 배경에 대해 “올림픽과 더불어, 80년대 초 중동건설 경기가 끝나자 건설자본들이 정부에 로비를 해서 재개발사업을 정책적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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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거되는 상계동 판자촌의 모습. 용역들이 그 앞을 줄지어 걸어가고 있다. |
상계동 강제철거의 산 증인 안은정 씨는 본격적인 철거가 시작된 1986년 6월 26일의 그 날을 잊지 못했다. “포크레인이 무작정 밀고 들어왔어. 옥상에 있는 된장, 고추장 항아리까지 있는 대로 다 부셔버렸지. 심지어 애들이 방안에서 자고 있었는데 집을 무너뜨리더라고” 1986년 한 해 동안 십여 차례 강제철거가 진행됐다. 매번 주민들은 맨주먹으로 맞섰다. 그 과정에서 이재홍 씨(현 제정구기념사업회 이사장) 외 4명이 구속됐다. 철거작업이 지연되자 구청에서 이들에게 고발장을 내민 것이다. 안 씨는 구속되지는 않았지만 경찰서에서 숱하게 밤을 샜다. 주민들은 “우리는 구속자들이 나와야 합의하고 떠난다. 그전에는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인다”며 고려대 등지에서 ‘재소자 석방’을 외쳤다. 마침내 그 해 12월 24일 재소자들은 출감됐다. 치열했던 투쟁과정에서 4명의 주민이 사망한 일도 있었다. 그 중에는 초등학생 동근이도 있었다. 동근이는 용역들이 무너뜨린 건물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안 씨는 “우리 막내딸이 천막 안에서 자고 있는데, 그 놈들이 와서 그걸 다 칼로 갈기갈기 찢더니 질질 끌고 갔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안 씨의 딸은 7살이었다. 명동에서 부천까지주민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더욱 단합하려 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1차적으로 일부 주민들이 경기도 포천으로 갈라져 나갔다. 1,500여 세대 중 90여 세대만이 남아 상계동을 지켰다. 결국 1년여가 지난 1987년 4월 14일, 1,000여명의 용역들, 구청직원, 전경들이 모여 주민들을 상계동에서 쫓아냈다. 수십 대의 트럭에 각각의 집 호수를 표시하여 그 집의 짐들을 실어 가버렸다. 모든 것을 잃게 된 주민들은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명동성당으로 대학생들이 몰려들던 시기였다. 그곳에서 상계동 주민들은 대학생 시위대를 위해 밥을 지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대학생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이 외부에서 받은 후원금을 주민들과 나눴다. 안 씨는 대학생들 이외에도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명동성당에서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손인숙 수녀, 유안나 수녀, 헤레나 수녀와 함께 연대투쟁한 제정구 씨, 김동원 감독은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됐다. “정말 우릴 잘 보살펴주시고 사랑해주셨어. 절대 못 잊지.” 김동원 감독은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서 상계동 아이들을 이끌며 행여 엇나가지 않도록 지도했다. 김 감독은 “강제 철거를 기록으로 남겨 증거물로 쓰기 위해 촬영을 시작했다”며 “아파트에 살던 나로서는 그분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보고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주민들은 명동성당 앞에 지은 두 개의 대형 천막에서 300여 일을 지냈다. 아이들은 전철을 타고 상계동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그곳에서도 일부 주민들은 각자 제 살길을 찾아 명동을 떠났고, 결국 39세대만이 명동을 지켰다. 언제까지나 명동에 살 수는 없었기에 주민들은 부천 고강동 고속도로변에 부지를 매입했고 건물을 짓기로 했다. 부천시에서도 이를 허가해줬다. 그러나 명동에서 부천으로 가는 길마저도 순탄치 않았다. “상계동에서 쫓겨날 때 실어가 버린 짐들을 찾아서 부천으로 가고 있는데, 용역들이 부천으로 못 가게 하는 거야. 부딪치는 와중에 우린 짐도 다 잃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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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역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후 억울함을 호소하는 고등학생. |
가까스로 부천에 도착한 주민들은 자신들의 공간이 생겼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다들 행복해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주민들 모두 가건물을 짓는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며칠 후, 그동안 이를 묵인해왔던 부천시 직원들과 용역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무허가 건물은 계고장 없이 철거 가능하다’며 입장을 바꾼 것이다. 하루만 시간을 달라는 주민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건물을 무너뜨렸다. 그 날은 주민들 20여명만이 건물을 지키고 있던 날이었다. “88올림픽 성화 봉송 지나간다고, 미관상 좋지 않다고 다 부숴버린 거야. 고작 5분 지나가는데…” 안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수적 열세의 상황에서 그들은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용역들의 폭력행사도 계속됐다. 영화 에서는 ‘난 억울해’라며 울부짖는 한 고등학생이 등장한다. 실제 그 상황에 있었던 김 감독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깡패들에게 밀려 넘어져서 흙탕물을 뒤집어쓰게 됐어. 자기 어머니가 다친 줄 안 아들이 흥분해서 용역들한테 달려들었는데 집단폭행을 당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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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 고강동에서 가건물마저 철거당한 상계동 주민들은 땅굴에서 살며 목숨을 부지했다. |
가건물마저 잃게 된 주민들은 움막을 지으며 삶을 이어갔다. 심지어 땅굴을 파서 비닐로 외풍을 막고 그 안에서 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 한 번은 겨울에 피워놓은 모닥불이 비닐에 붙어 그 안에 자고 있던 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던 위험천만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상계동 주민들이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들이 받은 모욕감이었다. 부천시에서 상계동 주민들의 모습이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대로변에 높은 담을 쳐버린 것이다. 고은태 교수는 “‘외국인들에게 너희는 보여서는 안 될 존재야’라고 국가가 말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행위였다”며 분개했다.투쟁의 원동력은 ‘우리’의 힘 땅굴까지 파서 살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주민들은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두어 달 움막에서 주민들과 함께 살았다는 고은태 교수는 “들어간 날부터 나온 날까지 내 손으로 밥을 해먹은 적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다같이 나눠먹고 재미있는 TV프로그램이 있으면 다함께 시청했다”며 주민들에게 받은 감동을 전했다. 그는 “도움을 드리러 갔다가 오히려 도움을 받고 왔다”고 덧붙였다. 김동원 감독은 함께했던 3년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주민들의 공동체적인 모습”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강제철거를 카메라로 감시해야한다는 의무감도 있었지만, 주민들의 정이 날 그곳에 오래 머물게 했다”며 주민들과 끈끈했던 관계를 떠올렸다. 88올림픽 직전에는 타 지역 철거민들과 함께 한성대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올림픽을 열었다. 고은태 교수는 한 마디로 “88서울올림픽에 대한 대항 올림픽”이었으며, “올림픽 개최국의 위상에 걸맞은 시설과 외관은 없어도 주민들에게는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그 속에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 경쟁주의, 시장논리를 통해서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가치들을 그분들이 실제 생활을 통해 보여줬다”고 회상했다.제2의 상계동 사건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상계동 주민들은 각자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직장을 잡아 안정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들도 있다. 영화 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던 고등학생은 이제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됐다. 일부 아이들은 청년이 되어 데모에 참여하며 사회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도 한다. 철거민은 아니었지만 어릴 적 직접 상계동 강제철거를 지켜봤다는 장형창 건설노조 조직국장은 “상계동 철거사건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고은태 교수는 “당시는 자본에 의한, 자본을 앞세운, 자본이 중심이 된 개발방식이 전면적으로 실시되던 때”였고, “철거민들에게는 그들의 이익이 보호될 수 있는 법, 기준, 싸움의 전거로 삼을만한 적절한 예조차 없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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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계동 철거민 안은정 씨는 ‘개발’이라는 말이 이제는 넌더리가 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
상계동 강제철거사건 이후 재개발 정책에 대한 많은 비판과 대안이 대두됐다. 하지만 25년이 흐른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상계동 주민들과 꼭 닮은 삶을 살아가야 했다. 안은정 씨가 “용산참사를 보니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탄식한 까닭이다. 용산참사 이후에는 야당과 여러 시민단체에서 재개발사업에서의 주거권 보호를 위한 ‘강제퇴거금지법’을 추진했다. 하지만 실제 입법 여부는 아직까지도 미지수다. ‘한강의 기적’을 대표하는 88서울올림픽은 폐막했다. 하지만 상계동 주민들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됐다. 상계동 올림픽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