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의 삶은 역사에 자취와 흔적을 남긴다. 역사는 전체의 기억이다. 개인의 삶은 역사의 시대적 맥락에서 조명될 때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우종원 열사의 삶 또한 그렇다. 우 씨의 삶을 말함에 있어 1985년 ‘민추위 사건’을 빠트릴 수 없다.

당시 민주화추진위원회 활동 모습.Ⓒ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서울대학교 민추위사건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이른바 ‘민추위 사건’은 1985년 10월 29일 검찰이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를 이적단체로 규정해 관련자 26명을 구속한 사건이다. 수도권 10여개 대학의 대학생들 위주로 80여명의 사람들이 기소 또는 수배된 대형 공안사건이었다. 민추위 사건은 대한민국의 민주투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1984년 결성된 민추위는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조직으로, 학내의 학생운동과 사회에서의 민주투쟁을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민추위는 노동문제투쟁위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원회, 대학 간 연락책 등 4개 기구로 구성돼 있었고,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등 다양한 투쟁을 이끌었다. 특히 1985년 5월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해 광주학살 진상 규명과 미국의 사과를 요구한 72시간 동안의 농성은 전 국민에게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한편 민추위는 1984년 8월과 10월, 신문 ‘깃발’을 두 차례에 걸쳐 발행해 학생운동의 올바른 방향을 고민하고 전두환 정권의 비정당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전두환 정권이 언론기본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 반민주주의적 악법을 통해 기본권을 훼손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경찰, 안전기획부 등 공안기관은 ‘깃발’을 작성·배포한 학생들을 학생운동권의 주요 배후로 잠정하고 민추위에 대한 수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최초의 수사 초점은 ‘깃발’ 작성자를 파악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나 85년 5월 민추위의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이후 수사는 민추위에 속해 있는 모든 학생들과 그 관련자들을 전부 사법처리하는 것으로 확대됐다.
1985년 10월 29일 검찰은 민추위를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한 뒤, 관련자 26명은 구속, 3명은 불구속입건하고, 약 40명을 지명수배했다. 검찰은 민추위 관련자들을 자생적 사회주의자들로 규정하고 이들로부터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거짓자백을 얻어내는데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 민추위 사건은 영화 <변호인>에서 영화화됐던 ‘부림사건’과 더불어 5공화국의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이다. 당시 민추위 의장 문용식 씨,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김근태 씨 등이 구속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씨의 죽음 또한 민추위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박종철 씨는 민추위 사건의 수배자였던 박종운 씨의 절친한 후배였다. 검찰은 박종운 씨의 소재지를 파악하기 위해 박종철 씨를 불법 연행해 고문과 폭행을 가했고, 가혹한 물고문의 과정에서 박종철 씨는 숨을 거뒀다. 6월 항쟁의 기폭제였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민추위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종원 열사는 민추위에서 홍보위원회 소속으로 학외유인물책을 담당했다. 우 씨는 민추위에서 이적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85년 8월 지명수배됐고, 도피 중이던 같은 해 10월 12일 오전 10시 35분경, 경부선 영동역과 황간역 사이 철로변 콩밭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글 쓰는 능력이 뛰어났던 대학생
우 씨는 1981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하면서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 말부터 ‘민족문화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특히 사회 복지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우 씨는 2학년 때 사회복지학과로 진학해 학문과 학생운동의 접점을 모색했다. 우종원 열사 추모사업회 대표를 맡고 있는 송호진 씨의 회고에 의하면 우 씨는 글 쓰는 능력이 특히 뛰어났다. 5공 정권의 부당성을 알리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환기하는 유인물을 작성하는 것은 늘 그의 몫이었다. ‘민족문화연구회’에서 활동하던 도중 우 씨는 1984년 10월경, 선배의 소개를 통해 당시 민추위 홍보위원장을 만났고 이후 민추위 홍보위원회에서 학외유인물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우 씨는 같은 해 11월 3일 결성된 ‘민주화투쟁학생연합’ 창립 선언문의 현장 배포를 담당했고, 1984년 12월부터는 민추위에서 현 정세 및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한 내용을 지도하고 고민했다. 우 씨는 1985년 5월 민추위의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이후 수사대상이 확대되면서 경찰의 수사망에 올랐다. 우 씨에 대한 검거 업무는 영등포경찰서에 배당됐고, 우 씨는 같은 해 8월 말경부터 서울에서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1985년 10월의 재구성
1985년 9월 27일, 서울시경은 우 씨가 포함된 민추위 수배 명단을 배포했다. 우 씨의 유가족이 의문사위에 제출했던 진술서에 의하면,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했던 우 씨는 10월 7일 누나와 친구에게 자수 의향을 밝혔다. 이후 우 씨는 10월 9일 오후 3시경 노량진 소재 보라매 다방에서 마지막으로 친구를 만났다. 사흘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우 씨는 10월 12일 오전 10시경 경부선 영동역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철로원에 의해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우 씨가 10월 11일 오후 8시 수원에서 동대구행 통일호 열차를 탑승했고 열차가 달리던 오후 10시경쯤 스스로 투신하여 목숨을 마쳤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의 수사 발표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 1기 보고서에 의하면, 경찰이 우 씨의 유서로 제시한 메모지에는 ‘어머니, 형, 누나, 숙부님, 국희 죄송합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필적을 확인할 수 없는 우 씨의 주민등록번호가 숫자로 적혀있었다. 유가족 입장에서는 주민등록번호가 기재된 메모지를 정상적인 유서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울러 우 씨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경찰 등이 유족과 조문객의 동향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우 씨의 죽음이 자살임을 여러 차례 강조해 말한 점 또한 의심스러운 대목이었다. 이후 종교단체, 사회단체에서 산발적으로 조사를 진행했으나 당시 공안기관에 대한 접근은 매우 어려워 별다른 결론을 내지 못했다. 우 씨의 죽음은 86년에 발생한 서울대생 김성수(사회계열 86) 변사사건 및 노동자 신호수 변사사건과 더불어 5공 말기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남게 됐다.
세 번의 상처
2000년대 들어 3,4,5공화국 당시 발생한 수많은 의문사를 조사하기 위해 대통령 직속의 특별위원회들이 출범했다. 이러한 특별위원회들은 우 씨의 유가족에게 큰 희망이었다. 그러나 우종원 열사 추모사업회 대표 송호진 씨에 따르면 유가족과 우 씨의 추모사업회는 이들의 활동을 지켜보며 오히려 세 번의 상처를 받았다. 민주화운동 관련 희생자들의 의문사를 규명하려는 제도적 차원에서의 움직임은 총 세 차례 있었다. 김대중 정권 하 1기와 2기 총 두 번의 의문사위와 노무현 정권 하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가 그것이다. 의문사위 1기와 2기에서 우 씨의 죽음은 ‘진상규명불능’ 판결을 받았고, 과거사위의 조사는 6년 동안 아무런 진척이 없어 유가족 스스로 진정을 철회했다.
의문사위는 의문사 심사에 있어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한다.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 여부와, 공권력의 위법한 개입 또는 책임 여부가 그것이다. 당시 우종원 열사의 의문사 조사를 담당했던 의문사위 소속위원 8명은 만장일치로 우 씨의 죽음이 민주화운동과 관련돼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공권력의 위법적 개입여부였다. 공권력의 개입여부를 확인함에 있어 결정적인 증인들은 진술을 회피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우 씨의 시체를 검안했던 의사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고, 우 씨의 수배·검거 활동을 했던 경찰 등 관련자들은 진술을 회피하거나 출석 자체에 불응했다. 송 씨는 “의문사위는 대통령 직속 기구였지만 권한이 너무 제한적이었고 과거사위 또한 다를 바 없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의문사위 1기, 2기와 과거사위 모두에는 조사 기관에 대한 자료 요청권만 부여됐을 뿐 그 이상의 정확한 수사를 위해 필요한 강도 높은 권한들은 배제됐다. 압수수색권, 계좌추적권, 증언거부·담합·자료제출 거부 등에 대응할 조사권, 청문회 소집권 등은 애초에 위원회 활동을 규정하는 특별법에 반영되지 않았다. 송 씨는 “당시 상황은 현재 세월호사건 특별조사위원회 관련법의 수사권과 기소권 부여 문제와 대단히 흡사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의문사위와 과거사위에서 얻은 역사적 경험은 ‘권한 없는 국가기관은 껍데기일 뿐이며 오히려 사실 규명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덧붙였다. 의문사위에 이어 2005년 12월 출범한 과거사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사의 진전을 요구한 유가족은 과거사위로부터 ‘한국전쟁 관련 민간인 학살 사건 진정이 폭주해 위원회의 여력이 부족하다’는 답변을 들어야했다. 우 씨의 죽음은 현재 ‘진상규명불능’이다.
세 번의 상처는 이어 네 번째 다섯 번째 상처가 돼 돌아왔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우 씨의 죽음에 대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서의 명예회복 결정은 내렸지만 진상규명 불능임을 감안하여 사망자 보상액의 50퍼센트만 지급했다.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도 2009년 명예졸업장을 받았지만 정식 수여가 아닌 우편 송달의 형식을 통해서였다. 현재 송 씨를 비롯한 우종원 열사 추모사업회와 우 씨의 유가족은 제도권 밖에서 힘든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지난날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의혹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출범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0년 10월 17일부터 2004년 6월 30일까지 활동했다. Ⓒ MBC뉴스
오는 10월 12일, 우 씨의 추모제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그의 묘소에서 열릴 예정이다. 유가족과 우 씨의 친구들이 주축이 된 추모사업회는 지난 29년 동안 매년 그의 기일을 맞이해 추모제를 열어왔다. 2009년에는 우 씨의 사회대 후배 김성수 열사와 함께 서울대 사회과학대 16동 옆 언덕에 추모 식수와 추모비도 마련했다. 송 씨는 “지난 29년 동안 종원이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한시도 종원이를 잊은 적이 없어요. 아직까지도 종원이의 죽음을 제대로 진상규명해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입니다”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우종원·김성수 열사 추모비. 서울대 사회대 16동 옆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민주화운동 열사들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사람들]
#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추모연대)
개별 추모사업회의 연대체인 추모연대는 1992년 3월 15일 창립됐다. 추모연대 사무처장 이승헌 씨는 “추모연대 최초의 동력은 곧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열사들의 죽음을 규명하고 명예를 회복 받으려는 모두의 의지”였다고 밝혔다. ‘의문사특별법’ 제정을 위해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은 1988년 10월부터 1989년 3월까지 135일에 걸쳐 의문사진상규명 촉구 농성을 펼쳤다. 그러나 그들의 개별적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내 조직적 운동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유가족과 개별 추모사업회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단체를 결성했고, 지금의 추모연대가 설립됐다. 이 씨는 “개별 추모사업회들은 추모연대와 별도로 활동하고 있고, 추모연대는 다만 각계 사업회들을 연결하는 느슨한 네트워크 역할을 할 뿐이다”라고 부연했다. 추모연대 설립 초기의 주된 목표는 ‘제도적 과거사 투쟁’이었다. 법적으로 열사들의 의문사를 규명하고, 보상 및 명예회복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135일에 걸친 촉구 농성이 실패로 돌아간 후 1990년대 추모연대 주도로 유가족, 개별 추모사업회들은 다양한 투쟁을 펼쳤다. 특히 1998년 11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422일 동안 국회 앞에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천막농성은 전 국민의 관심사를 모으는데 성공했고, 의문사특별법의 제정이라는 값진 결실로 이어졌다.
현재 추모연대의 목표는 제도적 과거사 투쟁이 아니다. 추모연대는 의문사위와 과거사위의 활동에 실망해 일시적으로 제도권 밖에서 과거사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적 과거사 투쟁’, ‘거리에서의 투쟁’이다. 이 씨는 “법적 테두리를 믿을게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와 사회구조를 바꿔야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추모연대는 현재 기념사업과 정신계승사업을 활발히 하고 있다. 기념사업은 조형물, 영상물, 평전, 자료집, 추모제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진행되고 있다. 정신계승사업은 ‘열사들께서 살아계셨더라면 헌신하셨을 투쟁’을 지원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주)피에스엠씨(구 풍산마이크로텍)에서 부당해고당한 노동자들의 법적 소송을 도왔고, 1년 전에는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와 함께 삼성전자의 위법 도급을 비판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 씨는 “열사들이 추구했던 민주주의는 결국 사람 냄새 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가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열사들의 정신은 힘없는 자들의 권리를 위해 연대하는 방식으로 계승될 수 있다”며 “사회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 성공한 후 다시 제도적 과거사 투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때에는 예전 과거사위, 의문사위 때와 달리 허울뿐인 법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