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그 카톡방’에서만 사라진 게 아닐까

대학 사회에서 끊이지 않는 카톡 성폭력, 바람직한 대응은?

  ‘인문대 X반 카톡방 성폭력 사건’은 학생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낯선 일은 아니었다. 이미 국민대학교, 고려대학교 등 다른 대학에서 같은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카톡방 성폭력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사회에서 SNS를 통한 언어 성폭력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와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다른 학교의 사례를 통해 살펴봤다.

고려대, 학생사회 회칙이 사건 대응에 기여해

  고려대학교 카톡방 성폭력 사건은 6월 10일 내부고발자에 의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피해자에게 전달된 A4용지 700여 쪽의 전문을 통해 남학생 9명으로 이뤄진 카톡방에서 8명의 가해자가 약 1년 간 동기, 선배, 새내기, 교수를 비롯해 불특정다수의 여성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성적 대상화를 해왔음이 확인됐다.

  피해자들은 해당 발언의 내용을 확인한 후 경제학과·정경포효반(경포반) 공동학생회에 문제를 제기했다. 경포반 학생회 측은 올해 초 신설된 ‘경제학과·정경포효반 성·인권 침해 사건 대응 세칙(세칙)’에 따라 학생회장단, 피해자, 가해지목인으로 구성된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징계안을 마련했다. 이후 징계안에 관한 가해자들의 이의제기 일부를 받아들여 ▲가해자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한 사건 공개 ▲교내 행사시 피해자로부터 가해자 격리 ▲ 가해자의 과·반 행사 참여 제한 등을 포함한 수정된 징계안을 확정했다.

  그러나 8명의 가해자 중 6명만이 경포반 소속이었기 때문에 경영대 소속인 나머지 두 명의 가해자에 대해서는 총학생회 회의를 통해 징계 절차가 진행됐다. 해당 사건의 ‘피해자대책위원회(피대위)’ 관계자는 “교내 양성평등센터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조사를 마쳤고, 징계위원회가 열린 것으로 알고 있다. (피해자들 중 가해자의) 형사처벌을 요구한 사람들이 있어 성북경찰서에 신고를 마친 상황”이라고 현황을 전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본부 측에서는 별도의 조사위원회를 소집해 가해자들에 대한 징계 절차를 진행 중이다. 

  학생회와 본부의 대응과는 별개로 피해자들은 자체적으로 피대위를 구성해 사건을 공론화하는 데 주력했다. SNS에서 화제가 됐던 ‘성폭력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는 제목의 대자보 역시 피대위 대응의 일환이었다. 피대위는 보도자료를 통해 ‘모범적인 처벌 선례를 남겨 언어 성폭력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공론화했다’며 ‘해당 사건이 학교 이름이나 가해자의 신상, 자극적인 발언 내용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고려대학교 카톡방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 대부분이 속한 경포반에 마련돼있던 세칙을 기반으로 비교적 신속한 대응이 이뤄질 수 있었다. 세칙 외에도 ▲외모 평가 ▲성적 대상화 ▲성차별 언행 등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경포반 ‘평등 지향 자치 규칙’ 역시 공동체 구성원들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데 기여했다. 김태훈 경포반 학생회장은 “최근 성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면서 다른 학교와 과·반에서 관련 세칙과 여성위원회 등을 만드는 것에 주목했다”며 해당 규칙을 마련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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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경포반 학생 회칙과 피대위 보도자료 ⓒ한민희 사진기자

국민대, 사라진 학생사회의 대응에 개인에 대한 처벌만 남아

  국민대학교 카톡방 성폭력 사건은 2014년 12월 국민대학교 학생자치언론 <국민저널>의 익명 기고 ‘선배들의 아찔한 음담패설’을 통해 공개됐다. 기고문에서는 모 학과 소모임 단체 카톡방에서 같은 학과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언어성폭력이 있었음이 공개됐다. 이듬해 2월 <여성신문>이 사건에 대해 보도하면서 사건은 다시 주목을 받았다. 해당 학과는 <여성신문>의 보도 다음날 비상대책위원회를 열어 사건에 대응하기 시작했고, 성폭력이 발생했던 소모임의 폐쇄를 결정했다.

  소모임 폐쇄 결정 이후 국민대학교 측은 징계위원회를 열고, 법률 자문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국민대학교 학칙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의 경우 징계위원회에 교내 성 상담실 관계자가 포함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해결에는 성 상담실 관계자가 포함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당시 취재를 진행한 전 <국민저널> 기자 유지영 씨는 “이 사건을 성폭력이 아닌 명예훼손 사건으로 해석하면서 상담실 관계자가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징계위원회 결과로 가해자 6명 중 2명은 무기정학, 4명은 근신 처분을 받으며 사건은 마무리됐다.

  사건 보도 후 국민대학교 학생사회에서는 학생들의 성 인식 개선 및 체계적인 사건 대응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총학생회 중앙운영위원회는 ▲대책위원회 구성 및 권고안 제정 ▲성폭력 방지 주간 설정 및 전 구성원 대상 교육 ▲성폭력 예방 교양 과목 설정 등 7가지 대책을 제시했다. 당시 총학생회 ‘소통’은 성명서를 통해 ‘문제 극복을 위해서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깊이 고민하고 사후 방지 대책을 철저히 세워야 한다’며 이러한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노력할 것’이라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총학생회에서 제시한 7가지 안 중 제대로 시행된 것은 성폭력 예방 캠페인 정도에 불과하다(<국민저널>). 현재 국민대학교 총학생회 ‘공감’은 “성평등국에서 5월 축제 때 성폭력 예방 부스를 통해 학우들과 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다”고 설명했으나, 성폭력 예방 캠페인 외에 제시됐던 대책안들의 실천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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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국민대 총학생회의 대책안에 대한 평가 (2015년 6월) ⓒ국민저널

경희대, 본부 중심 사건해결로 피해 계속돼

  지난해 11월경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 모 동아리 단체 카톡방에서 같은 학교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언어성폭력 사건이 본부 성평등상담실에 접수됐다. 이에 경희대학교는 성폭력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징계 등의 논의를 진행했다. 성폭력 대책위원회에는 대학본부와 학생사회 주요 관계자, 성평등상담실 관계자 등이 참여했다. 본부는 조사 이후 가해자들에 대한 징계를 확정했으나, 일반 학생들에게는 사건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본부 중심의 사건 해결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난, 올해 7월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에는 ‘언어적 성희롱 사건에 대한 대학본부의 처벌방식을 규탄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게시됐다. 대자보는 당시 카톡방 대화를 일부 발췌하는 한편 ‘본부에 의한 징계가 약했고, 오히려 가해자들이 주변에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니며 2차 피해가 발생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이유진 경희대 총여학생회장은 “자보의 내용이 조금 자극적인 부분은 있었으나,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응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고 밝혔다. 자보 게시 후 현재 경희대학교 학생회는 성폭력 사건 대응 과정과 재발 방지 등을 논의하는 회의체를 새로 구성한 상황이다.

  대자보에서 문제제기된 징계 내용 및 2차 피해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2차 피해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한국성폭력상담소 김보화 연구원은 “사건 해결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소외됐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대학의 경우 상담기관에서 대학 본부 등에 징계를 올리고 결정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요구사항이나 현재 상태 등에 대해서도 긴밀히 소통해야 한다“며 ”중요한 것은 강한 징계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과 소통하며 상호 인정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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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센터 박은진 전문위원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전문가와 상담을 병행하며 공론화를 진행하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한민희 사진기자

“카톡 성폭력은 구조적 문제”… 재발 방지 위해 공동체가 노력해야

  고려대, 국민대, 경희대의 사례외에도 대학사회에서 SNS상의 언어 성폭력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서울대학교 주식 동아리의 ‘오픈 채팅방’, 고려대학교 모 학과 비공개 페이스북 그룹, 연세대학교 ‘남톡방’ 등에서의 언어 성폭력이 공개됐다.

  김보화 연구원은 “남성동성사회성을 가진 집단이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며 그들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것”이 이러한 사건의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인권센터 박은진 전문위원 역시 “이전에도 남성 집단의 대화에서 쉽게 여성을 대상화하고 이에 동조하는 것이 친밀함을 표현하는 방식 이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박 위원은 “다만 (최근의 사건들은) 증거가 남을 수 있는 SNS의 특수성으로 드러난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 또한 그런 문화를 방조하거나 외면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대학사회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응은 그동안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나 징계에 집중할 뿐, 공동체 문화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유지영 씨는 국민대 사건에 대해 “징계가 사건의 본질이 아님에도 징계를 목적으로 사건을 처음부터 개인의 차원으로 해석하면서 공론화 과정이 막혀 논의 자체가 사라진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성폭력 사건을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 보고 징계에만 집중할 경우, 공동체 문화에 관한 문제제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론화 과정이 중요하다. 고려대학교 피대위는 대자보를 통해 ‘성폭력은 특정 집단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임을 알리고자 했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사건에 대해 알림과 동시에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는 역할을 했다. 박은진 위원은 공론화가 “당장 사건에 개입되지 않았더라도 일상에서 폭력적인 언행을 하거나 타인의 폭력적인 언행을 방관 혹은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성찰하는 과정”이라는 의의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특히 고려대학교 피대위의 사례처럼 최근 성폭력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공론화의 주체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김보화 연구원은 피해자가 “(성폭력을) 구조적 문제로 인지하고 피해자와 주변인들이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공동체의 왜곡된 성문화를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급한 공론화가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상을 노출시키고, 자극적인 발언내용에 관심을 집중시켜 피해자 인권회복을 더디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김보화 연구원은 “(공론화 과정을 통해) 사건이 부각될 경우 (사건이) 하나의 ‘가십’으로 머물거나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 연구원은 “(사건이 발생한 공동체보다) 더 큰 범위에서 대학 내 성문화를 진단, 논의, 성찰하는 장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이와 비슷한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성폭력이 구조적 문제임을 인정하고 공동체 문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보화 연구원은 “성폭력 예방교육, 성문화 캠페인, 반성폭력 자치규약 제정 등을 통해 서로 간의 인식의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박은진 위원은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을 갖는 것이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로 여겨져야 할 것”이라며 이에 대한 교육, 전문가를 동반한 세미나 등의 방법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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