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민달팽이유니온’이 제공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됐습니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거리를 걸으면서 대학생 하연 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9시 반부터 5시까지 빽빽하게 채워진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학교 근처의 카페로 달려가 아르바이트를 한다. 몰려드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미소는 웃고 있지만 카운터에 가려 보이지 않는 다리는 계속 떨린다. 4시간을 일하면 30분을 쉬게 해준다는 법과 달리 하연 씨가 일하는 카페에는 마땅한 휴식시간이 없다. 가게가 한산해 카운터 옆 의자에 앉아서 쉬려고 하면, CCTV로 지켜보던 점장이 귀신같이 다른 일을 시키기 때문에 손님이 없어도 계속 카운터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저녁도 먹지 못하고 부리나케 달려온 탓에 굶은 배는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까지 연신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낸다.
쉽지 않은 하루였던 만큼 휴식이 절실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여전히 무겁다. ‘집’이라는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편안한 휴식,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해방, 정서적인 안정. 하지만 하연 씨가 지금 돌아가고 있는 자취방은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하연 씨에게 집은 또 다른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발단은 몇 주 전 일요일 남자친구가 자취방에 찾아온 것이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남자친구와,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바쁜 하연 씨에게 자취방에서 즐기는 데이트는 팍팍한 일상을 조금이나마 이완시키는 시간이다. 지난 일요일 하연 씨와 남자친구는 자취방에서 노트북으로 함께 영화를 감상했다. 남자친구가 돌아가고 난 다음 하연 씨가 과제를 하기 위해 책상에 앉는 순간, 잠가 둔 방문 손잡이에 열쇠가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확 열어젖히며 집주인이 방에 들이닥쳤다. 어안이 벙벙한 하연 씨의 앞에서 집주인 아저씨는 조금 전 왔다 간 남자가 누구냐며 추궁했다. 하연 씨가 남자친구라고 말하자 아저씨는 어디서 젊은 여자가 외간남자를 끌어들이느냐고 기세 좋게 말을 이어나갔다. 보아하니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계속 남자친구를 데려오면 부모님께 전화를 하겠다, 네가 내 딸 같아서 이러는 거다, 이런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아저씨를 바라보면서 하연 씨는 자신이 왜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을 더 키우고 싶지 않으면 월세를 올려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야 하연 씨는 비로소 집주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난 잘못한 거 없으니까 부모님한테 전화하실 테면 전화하시라고, 왜 허락 없이 방에 들어오는 거냐고, 온갖 말이 하연 씨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하연 씨 앞에서, 집주인은 아무튼 똑바로 하라며 소리치고는 문을 휙 닫고 나가버렸다. 닫힌 문을 바라보는 하연 씨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지만 그조차도 하연 씨가 느낀 서러움을 담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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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 씨가 월세를 올려주지 않자 집주인의 무리한 요구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 날에는 학교에서 돌아온 하연 씨를 붙잡고, “방을 확인해봤더니 변기에 금이 가고 침대 매트리스가 내려앉았다”면서 변상을 요구했다. 또 허락 없이 방에 들어온 거냐는 하연 씨의 항의를 무시한 채, 집주인은 자비로 변상을 하지 않으면 보증금에서 제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돌아갔다. 분노를 억누르며 방에 돌아와 변기와 매트리스를 살펴봤지만 하연 씨의 눈에는 처음 방에 입주했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수리 기사를 부른 하연 씨는 수리 기사에게 변기가 금이 간 이유를 물어봤다. 일단 변기 자체가 너무 낡은데다 여러 사람이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하연 씨는 수리 기사의 말을 근거로 집주인에게 수리비를 월세에서 제해 달라고 말해봤지만, 집주인은 코웃음을 치며 불만 있으면 방을 빼라는 말로 일축했다.
남자친구와 상의하자 이번 학기가 끝나고 방을 옮기는 것이 어떠냐는 답이 돌아왔다. 하연 씨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실제로 방을 구하고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자취방은 친구가 살다가 나간 것을 이어받은 것이어서, 본격적으로 자취방을 알아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집을 알아보고 새로 계약하는 것부터가 두려웠다. 하연 씨의 친구들 중에는 공인중개사가 집주인과 짜고 계약 조건을 실제와 다르게 설명해 나중에 낭패를 보게 된 경우가 없지 않았다. 지난 주말 짬을 내서 부동산을 찾은 하연 씨 역시 공인중개사가 건물 가격을 실제 가격보다 높여 말하거나, ‘안전한 집’이라고 말로만 강조할 뿐 집이 괜찮은지를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것을 꺼려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결국 하연 씨는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자취방 건물의 문간에서 다시 마주친 집주인은 벽지가 벗겨졌다며 또다시 트집을 잡았다. 건성으로 대꾸하며 방으로 돌아왔지만, 이대로 방을 옮긴다면 도배 비용마저 보증금에서 차감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방음도, 난방도 잘 안 되는 방에서 언제까지 집주인의 갑질을 감당하며 살아야 할까. 하연 씨는 머리가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