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입구역 2번 출구의 계단으로 내려가면 다양한 표지의 <빅이슈(BIG ISSUE)>가 눈길을 끈다. 곧이어 빨간 조끼를 입은 남성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2년째 활동 중인 <빅이슈> 판매원 이무재 씨다. <서울대저널>은 이번호 「우리가 만난 사람」에 이무재 씨의 굴곡진 인생을 담아봤다.

허위문서, 그리고 사기로 길거리에 내몰리다
2010년 중순 한국에서는 잡지 <빅이슈>가 발간되기 시작했다. <빅이슈>를 발행하는 ‘빅이슈 코리아’는 ‘사회구조로 인한 빈곤 문제를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사는 판매원의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하고 경제적 자활을 돕는다. <빅이슈>를 판매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홈리스(homeless)에게만 제공된다.
이무재 씨는 자신이 홈리스 생활을 거쳐 <빅이슈> 판매원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씨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경남에서 어느 정도의 농토와 과수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씨는 농사를 짓고, 과수원 일을 도우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매형이 빚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면서 당시 20대였던 이 씨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매형의 채권자는 이 씨가 본 적도 없는 문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채권자는 거짓 보증서를 보이며 이 씨가 매형의 빚보증을 섰다고 주장했다. 순식간에 매형의 채무는 이 씨에게 지워졌다. 그리고 “조상의 선산까지 잃을 정도로” 집안이 망했다. 한 장의 문서는 그의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앗아갔고, 그에게 정신적 고통을 안겼다.
억울함과 울분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무재 씨는 이 사건을 법적으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름을 ‘무재’로 바꾼 것도 이 시기다. 이 씨는 “재물도, 재주도 없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로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울산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은 그에게 문서가 거짓임을 보일 것을 요구했고, 이 씨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감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국과수는 이 문서를 감정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재판은 이 씨의 패소로 끝났다.
이무재 씨는 이를 바로잡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국과수의 잘못된 감정은 생사람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이 씨는 자신의 피해를 공론화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90년대 중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으로 국과수의 허위감정이 언론의 주목을 받자, 그는 자신의 피해를 알리는 것에 확신을 얻었다.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국회에 청원을 냈고, 이를 국회 본회의에 올리기 위해 국회의원의 승인을 받으러 다녔다. 청원이 마침내 국회 상임위원회에 올라갔을 때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이 씨의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청원은 국회 본회의로 올라가기 전에 번번이 무산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무재 씨는 또 다른 사기를 당하게 된다. ‘이무재’로 새롭게 시작했던 그의 삶은 다시 무너졌다. 한 번의 사기는 그가 모아두었던 재산과 퇴직금마저 모두 앗아갔다. 그는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무재 씨는 허무함을 느꼈다. 60세를 앞둔 그에게 남은 것은 막대한 빚뿐이었다. 이 씨는 채무를 갚기 위해 끊임없이 일해야만 했다. 약간의 자금으로 좌판을 시작했다. 우산, 핸드폰 거치대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했지만 벌어들이는 수입은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벅찼다. 결국 그는 길거리에 내몰렸다. 1년 반 동안의 노숙 생활이 이어졌다. 노숙 생활은 그의 신체를 조금씩 망가뜨렸다. 그는 허리와 폐의 통증, 무감각해지는 발을 길 위에서 견뎌야 했다. 홈리스에 대한 낙인은 그를 더 괴롭게 했다.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느꼈던 수치심은 당시의 경험에 대해 이 씨를 함구하게 만들었다. 홈리스 생활에 대한 질문에 이 씨는 “그때의 생활을 이젠 생각하기조차 싫다”며 말을 아꼈다. 단지 괴로웠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정말 저 밑바닥으로 떨어져 극한의 고통을 겪어야했죠.” 이 씨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빅이슈>로 다시 찾은 삶
그러나 그는 절망을 다시 딛고 일어섰다. 친구의 소개로 시작된 <빅이슈> 판매원 일이 계기가 됐다. 허리와 폐의 통증으로 육체노동을 할 수 없었던 그에게 <빅이슈> 판매원은 비교적 좋은 직장이었다. 적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손에 쥐어졌다.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사람에 대한 신뢰도 다시 쌓을 수 있었다. “사람에 대한 상처가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사기를 당한 이후로는 사람을 보는 것 자체가 싫었죠. 하지만 선한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상처가 치유되는 걸 느꼈어요.”

빅이슈 판매 시스템이다. 이무재 씨는 <빅이슈> 판매원으로서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받으며, 회사에서 제공하는 임대주택에서 거주하고 있다.
현재 이무재 씨는 <빅이슈> 판매원으로서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일은 고된 편이다. 산 중턱에 사는 이 씨는 매일 오후 2시에 출입문을 나선다. <빅이슈> 판매원의 공식적인 출근시간은 4시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자리를 잡고, 매일 7시간 동안 선 채로 잡지를 판매한다. 하교하는 학생들, 퇴근하는 직장인이 잦아들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그의 업무가 끝나는 시간은 밤 11시. 이 씨는 새벽이 돼야 집에 도착한다. 새벽 3시에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우면 4시가 훌쩍 넘는다. 불면증으로 잠을 뒤척이다 일어나면 출근할 시간이 다 된다고 한다.
이무재 씨는 불편한 몸으로 주말 없이 근무하고 있다. 이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을까. 그는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빅이슈> 판매원으로 계속 근무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 씨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국과수의 허위 감정을 공론화하겠다는 결심을 잊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 내 생을 마감할 수는 없어요. 함께 활동했던 피해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생길 피해자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빅이슈>는 그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발판이다. “<빅이슈>가 있었기에 나는 생계를 유지하고, 국과수 허위감정 피해자 활동을 위한 비용을 모을 수 있었어요.” 그는 앞으로 다가올 국회에 다시 청원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피해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빅이슈> 판매도 계속하려 한다.

<빅이슈> 독자들은 이무재 씨에게 큰 힘이 된다. 이 씨는 “선하지도 않고 영혼이 맑지 않으면 <빅이슈> 독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이들과 소통하는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독자들은 이 씨가 <빅이슈> 판매원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는 <빅이슈> 독자님들과 앞으로도 계속 교류하고 싶습니다. 독자님들을 위해서라도 <빅이슈>를 그만둘 수 없어요.”
“당당하게 답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할 것입니다.”
이무재 씨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되돌아보고 있을까. 그는 그의 삶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장면에 비유했다. “저는 제 자신이 뼈만 남은 물고기를 가지고 돌아가는 노인과 같다고 생각해요. 그 노력을 해서 매형이 남긴 빚을 갚았습니다. 이후로는 ‘이무재’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었죠. 하지만 한 번의 사기가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을 다시 앗아갔어요.” 허무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진 노숙 생활은 그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킬 뿐이었다. 신체도, 정신도 많이 망가졌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빅이슈>는 그에게 인간다운 삶을 되찾아주었다. 이무재 씨는 판매원으로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독자들과 소통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잊었던 삶의 목표도 되살아났다. 이 씨는 국과수 허위감정을 알리기 위한 운동을 지속할 것이라고 한다. “나는 한을 뛰어넘는 사람이에요. 죽은 이후 신이 물었을 때 당당하게 답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