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호
만화계에서 여성의 위치는?
정치의 계절

만화계에서 여성의 위치는?

한국 여성만화가들의 어제와 오늘

여류시인, 여류화가, 여성 영화감독… 그들을 굳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어 특별한 관심을 갖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남성이 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그들 소수의 존재가 튀어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이 남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화라는 장르에서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서울대저널에서는 ‘한국의 여성만화가들’과 그들이 일구어놓은 ‘순정만화’에 대한 특집기사를 준비했다. 문화관광부에서는 ’91년부터 매년 ‘대한민국 출판만화 대상’을 선정, 시상하고 있다.?여기서? 대상을 수상한 만화작가들 가운데 여성작가는 몇 명일까? 정답은…한 명도 없다. 대상 이외에 저작상, 인기상, 신인상까지 포함해서 계산해도 여성작가는 단 네 명으로, 전체의 8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만화계에서 여성 만화가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그렇게 적은가? 아니면, 여성들의 작품은 예술적·상업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여성만화가들이 그들의 역량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가? 아무튼 8분의 1이라는 숫자는 한국 만화계에서 여성이 여전히 비주류임을 말해준다. 여성만화가, 그들은 마이너리티 한국에 근대만화가 도입된 이후 수십년 동안 만화계는 남자 일색이었다. 이 남자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최초의 여성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더 유명한, 1933년 「신동아」에 풍자만화를 그린 나혜석이었다. 그러나 나혜석을 본격적인 ‘만화가’로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최초의 여성 만화가는 60년대 중반에 데뷔한 엄희자이다. 엄희자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권영섭의 ‘울밑에 선 봉선이’ 시리즈 등 순정만화 성격의 작품들이 나타나 소녀들 사이에서 인기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 독자들의 심리와 감성을 보다 잘 아는 여성작가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엄희자는 말끔한 선에 세련된 서양식 캐릭터로 인기를 얻으며 본격적인 순정만화의 길을 열었고, 이후 여성만화가들의 활발한 출현이 이어져 이들이 엄희자와 함께 한국 순정만화 1세대를 이루었다. ?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에서 순정만화는 그 자취를 감춘다. 지나친 검열, 자체적인 발전 노력 부족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만화의 유통이 만화방에 의해 독점되면서 만화방을 독차지한 소년 고객들의 등쌀에 소녀층이 만화방 출입을 기피하게 된 것도 큰 원인이었다. 이처럼 1세대 순정 작가들이 사라진 빈자리에 ‘캔디캔디’를 선두로 일본 소녀만화의 해적판이 쏟아져들어와 줄줄이 흥행에 성공했고, 우리 여성만화가들의 활약은 다시 보기 어려울 듯했다. 이 암흑기를 지나 80년대에 스타로 떠오른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황미나였다. 일본만화 해적판이 단속으로 자취를 감춘 가운데 ‘이오니아의 푸른 별’, ‘유랑의 별’, ‘아뉴스데이’로 이어지는 장엄한 스케일의 역사 로맨스가 많은 여학생을 대본소로 불러들였고, 이는 곧 김혜린, 김진, 신일숙, 강경옥 등 걸출한 여성작가들이 잇달아 등장하는 토대가 되어 한국 순정만화 2세대의 시작을 알렸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캔디캔디’나 ‘베르사유의 장미’ 등 일본 순정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들은, 이후 끊임없는 변화와 파격을 시도하며 자기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그러면 한국의 여성만화가, 오늘날의 그들은 어떤 모습일까? 여성만화가들의 등장과 몰락, 그리고 재도약 지난 3월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에서는 독특한 행사가 열렸다. 한국 여성만화가 협회(이하 여만협)에서 주최하는 ‘여성만화작가기획전’이 그것. 80년대부터 활동한 정상급 작가부터 최근 데뷔한 신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성만화가들의 일러스트 작품과 직접 만든 인형, 팬시상품 등이 전시되고 작가 사인회가 열린 이 자리에는, 전시기간 내내 수많은 팬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날 여성만화가들의 왕성한 활동과 단결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97년 출범한 여만협은 현재 회원이 120여명으로, 매년 전시회를 열고, SICAF를 비롯한 각종 만화 행사에 참여하며, 만화 대여권 확보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여러모로 두드러지는 활동을 보여준다. 여만협에는 김혜린, 신일숙, 김진 등 2세대 순정만화 작가들도 있지만, 90년대 이후 데뷔한 3세대 작가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이들 역시 대부분 순정만화를 그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며(명랑만화, 미스테리, 컬트 등), 순정만화 또한 매우 다양한 소재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기존의 ‘순정’이라는 개념으로 한데 묶기 곤란할 정도다. 유시진, 문흥미, 이빈 등 개성있는 젊은 작가들로 이루어진 이들 3세대 작가군은, 문하생활을 거쳐 대본소를 통해 데뷔한 예전 작가들과 달리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공모전에 당선되어 만화잡지를 통해 데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3세대 작가들의 등장과 여성만화가협회 결성 여만협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진 배경을 보면 이들 여성만화가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 일단 만화계 전체가 겪는 어려움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현 여만협 회장 신일숙 씨는 “97년 당시 청소년 보호법 때문에 만화계에 비상이 걸렸을 때, 만화계 내에도 좀 더 체계적인 단체가 필요하다 생각에 여성작가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피가 튀는 장면을 그릴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남녀가 함께 앉아있는 장면도 안되고, 심지어 사극에 도끼를 그려넣지도 못하게 하는 등 청소년 보호법으로 인한 말도 안되는 검열이 많았다는 것. 그러나 여성만화가들에게는 ‘만화가’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전부가 아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불리한 조건들은 그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겪게 한다. 가장 억울한 것은 원고료 문제.? “편집기자들이 여성만화가들의 작품활동은 일이 아니라 취미라고 생각한다. 남성만화가들은 그것이 ‘밥벌이’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회 전반의 잘못된 인식 때문에, 여성작가들에게는 남성들만큼의 높은 원고료를 주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어떤 남성만화가는 ‘여자들이 이렇게 원고료를 많이 받는 줄 몰랐다’며 벌컥 화를 내기도 한다”고 신일숙 씨는 말한다. 자신에게도 만화가 직업이고 생계수단인 여성작가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리는지 답답할 뿐이라고. 사실 모든 것을 떠나서, 똑같은 작품활동에 대해 남녀에 따라 서로 다른 값어치를 매기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여성 차별적 인식이 만화계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고, 그래서 한국 만화계에서 여성만화가들은 여전히 마이너리티다. 한국에 만화가가 몇 명이고 그 중에 여성이 어느 정도 되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한국만화가협회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600명이 넘는 회원 중에 여성작가는…아마도 5분의 1 정도”로 추정된다. 그리고 서두에서 말했듯이,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의 역대 수상자 중 여성작가의 비율은 전체의 8분의 1이다. 이렇게 각종 만화 관련 상이나 좋은 만화 선정에서 여성들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게 뽑히는 이유에 대해 신일숙 씨는 “여자들이 로비같은 걸 잘 못하죠. 우리가 보기에는 여성들의 작품에 오히려…(웃음) 괜찮은 것들이 더 많은데”라고 말한다. 정말로 로비가 부족한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분명 여성만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화가라서, 게다가 여자라서 겪는 이중의 어려움 “늘 어렵고 늘 음지 쪽에 가까왔던 저희 만화계…그리고 그 어려운 만화계 중에서도 항상 빛 덜 들어?오는 쪽에 서서 굳건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켜주신, 여성 만화가들이 있었습니다.” 여만협 홈페이지에 나오는 인사말 중 일부다. 실제로 ‘항상 빛이 덜 들어오는 쪽’에 있는 여성만화가들은 그러나 언제나 제몫을 톡톡히 해왔다. 남성 작가 일색의, 그래서 남성 독자 중심일 수밖에 없었던 만화계에서 여성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영역을 확보한 것이 그들의 성과였고, 순정만화라는 독특한 예술적 표현양식을 끊임없이 개척하고 발전시킨 것 또한 중요한 성과다. 그리고 “만화계에 큰일이 닥치면 제일 앞장서서 힘쓰는 게 우리 여성만화가들”이라고 신일숙 씨는 말한다. 여만협이 남성작가들에 비해 보다 단합된 힘으로 청소년보호법 반대나 대여권 확보 등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그녀의 자부심인 듯 했다. 한국의 여성만화가들, 그들이 ‘여성’만화가이기 때문에 써야 하는 부당한 굴레에서 벗어나 보다 빛나는 성과들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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